검사 프린세스 (2010) 진혁 / 소현경
1편 - 마혜리의 실패한 인생
어쩌다 어둠의 경로로 보게 된 드라마들이 몇 편 있는데, 인기 있는 것들만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새 한국 드라마 중에는 나름 언급할만한 작품이 있는 것 같다. 다양한 시청자들의 요구와 줄다리기를 해야 하고, 스타의 존재와 시청률-인기가 존망을 좌우하며, 유행도 타야 하는 드라마의 한계상 불륜, 연애 드라마, 일일극 보다는 특정 직업이나 사건 같은 특수한 주제로 그나마 더 자유롭게 다른 시각으로 일상을 다룰 수 있는 소위 ‘트렌디’ 드라마를 선호하게 되는데, 물론 여기에도 80년대 드라마들의 (도덕성과) 리얼리즘 같은 것이나, 90년대 트렌디의 심각함은 온데간데 없이 실종되었지만, 뭐, 21세기 초반은 하류층도 간지는 뿜고 봐야 하고, 지루한 현실은 통하지 않아서 착하기 보다는 무조건 잘 생기고 쭉빵하거나, 아니면 귀여미나 짐승이라도 되야 하며, 웃기거나 나쁘거나, 여하튼, 이벤트 적인 게 우선시 되는, 패션 리더들의 일상 판타지 시대라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검사 프린세스’ 역시 다른 트렌디 드라마들과 마찬가지로 두 쌍의 연인들과 두 개의 삼각관계를 내세우긴 하지만 (두 쌍의 연인은 참 편리한 구성이다) 기본적으로는 연애 사정 외에 세 가지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나는 극 초반의 무개념 여검사(김소연)의 좌충우돌 성장 이야기, 두 번째는 마혜리의 인간승리 다이어트, 그리고 세 번째는 마검사가 아버지의 업보를 풀어내는 이야기. 그리고, 이 작품의 성공 요인 중 하나인 신비로운 스토커 변호사 서인우(박시후)가 계속 마검의 주위를 맴돌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며 힘을 합쳐 과거 아버지들의 한을 풀고 해피 엔딩으로 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 드라마의 강점은 역시 초반 주인공의 통통 튀는 연기를 뒷받침해주는 나름 다양한 검사들의 일상 이야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들의 성실한 책임의식, 그 속에서 마검사가 맡게 되는 사건들이 일관된 개인주의와 충돌하는 에피소드들로 전진 배치되어 신선함을 유지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특히, 초반에 마혜리의 개인주의를 조직주의에 대항항으로 설득력 있게 밀어붙이는 부분은 은근히 힘있다) 마혜리가 ‘마검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좀 격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대로 설득력있다. 물론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상황들이 종종 이어지지만 (특히 서인우와 관련된 부분들), 시청자의 환상을 건드려야 하는 트렌디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런 것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고, 이들을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 드라마는 지나치게 억지스럽지는 않아 보인다.
‘~녀 시리즈’가 드라마가 아닌 (왜곡된) 현실이듯, 이 드라마의 이벤트적인 요소는 ‘대중적 분노’의 대상이 되는 자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는 점인 것 같다. 그래서, 주인공을 증후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숨은 사연을 지닌 온정주의로 구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드라마에서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본다) 마혜리도 다른 일반 트렌디 드라마의 ‘나쁜 남자’, ‘튀는 여자’ 캐릭터들처럼 ‘숨어있던’ ‘따스한 인간성’을 드러내며 이상적인 연인, 그리고 사회인으로 변신할 것이다.
특히, 단순하고 나름의 확고한 원칙도 갖고 있는 캐릭터의 성격이 이런 개연성을 뒷받침해 준다. 타협을 모르는 그녀는 무개념일 때는 확실한 무개념이지만, 일단 사회성을 배우기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가벼운 성격임에도)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정직하게 실천하는 타입이(라고 설정되었)다. 동시에 주인공의 캐릭터가 이렇게 단순 진지하기 때문에 드라마는 괜한 고민이나 방황 대신, 곧바로 극(무책임, 무개념)과 극(같이 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과 내숭떨지 않는 적극적인 실천)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에 비해 거의 일회성 에피소드 같이 짧게 등장하는데, 외모 지상주의를 꼬집는 듯 하면서도 사실 살찐 것은 사람도 아니라는 ‘미녀는 괴로워’의 재탕이기도 해서, 역시 다이어트 열풍에 대한 비판 아닌 긍정으로 귀결되지만, 마혜리와 그녀의 가정사를 설명하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패션과 명품에의 경도와 과거의 모멸감, 집 밖에서의 명품 날라리와 집 안에서 아버지의 독재적 권위에 떠는 모습,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혹은 않으려는) 태도와 전전긍긍 하는 이면 등.
*이런 주제들은 사실 극 초반의 사건들로 분산되어 나타난다. 가령, 개인 사정에 대한 고려(인간적인 조직주의)없이 원칙(극단적 개인주의)만 들이대거나, 폭행 사건에서 진짜와 가짜를 뚱뚱한가 날씬한가의 외모로 판단해버리는 마혜리의 오판, 그리고, 보이는 것과 그 이면(스타와 사생활/추문)에 대한 케이스들. 그녀의 과거는 까발려지고, 그녀는 구속당하며, 토마토 세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검사로서의 다양한 결격 사유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마혜리가 속한 검찰 부서 내부의 소문, 험담, 그리고 마검사를 ‘부검’으로 만드는 ‘언론-대중-사회’의 복수도 병행해서 보여준다. 이는 물론 주인공 캐릭터가 소위 ‘성장’할 수 있는 단죄의 기능을 하지만, 동시에 조직/대중 사회가 튀는 개인을 짓밟는 오래된 방식 (시선들)도 ‘아주 살짝’ 보여준다. 물론 나중엔 같은 방식으로 반짝 ‘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다시, 왕따당하며 화장실에 숨어서 조직의 의도를 엿들어야 하는 부적응자 개인의 일상은 이래저래 피곤하다.
또 다이어트 에피소드를 통해 어머니와 그녀의 관계도 더 결속력을 갖게 된다. 남편에게 냉대받으며 먹는 것에 집착하는 어머니와 재산은 많아도 힘(삼선의원의, 혹은 그것을 응징할만한 권력)이 없는 아버지가 갖지 못한 것을 대신 성취하는 도구가 되어 진짜(과거의 비만)를 잊기 위해 가짜(명품, 다이어트)에 집착하게 되는 딸. (물론, 여기서 진짜/가짜라는 구분도 인간이나 상품의 가치를 매기는 ‘사회’(=언론-정치 + 대중)가 정한 것일 뿐이니 그 자체로 진짜이기도 하고 가짜이기도 하다) 이 딸은 미모를 되찾고 남편에게 돌아가고픈 버림받은 어머니의 욕망이기도 하다.
사실, 어머니 박애자(양혜경)의 설정은 이 드라마 후반까지의 또 하나의 미스터리 라고도 할 수도 있는데, 드라마의 중반부터 시청자들은 혹시 이 여자는 마상태(최정우)의 부인이 아니라 하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슬슬 의심을 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부자 마상태가 아줌마 박애자를 대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계급적이다. 그는 그녀에게 명령하고, 위협하며, 비밀을 강요하고, 이용한다. 대신 먹는 것은 눈감아 주는데, 동시에 이 먹는 것이 그로 하여금 더욱 더 그녀를 혐오하고 멀어지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감금 다이어트를 해서 (수술 대신 짐승남 세 명에게 감금당하는 행복한, ‘겁나 큰 손’ 마혜리?) 당당하게 거리로 다시 나가며 하루 두 시간씩 자면서 고시를 패스해 검사가 되어 권력을 갖게 되는 딸은 계급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각각 부모의 꿈의 실현이다.
*연애물로써, 드라마는 여기에서 다시 진짜/가짜의 문제를 발전시킨다. 박애자는 분명 마상태의 부인이다. 마상태와 한 때는 ‘짜릿짜릿’한 진짜 사랑을 했다는 박애자가 사랑은 없다는 개인주의자 딸이 ‘가짜’ 연애에 아버지 주선의 조건에 맞는 선이나 보러 다니는 것을 불쌍해 하는 장면. 그리고, 나이트에서 즐기려 만난 가짜 ‘애인’들에게 된통 당하는 마혜리.
그런데, 이 드라마가 진정 문제적이기 시작하는 지점도 여기서부터이다. 잘나가는 변호사 서인우는 마상태에 대한 모종의 복수를 위해 미국에서 날아온 신비의 사내고, 잘나가는 건축회사를 지닌 마상태는 잘나가는 삼선의원 김 모와 정경유착의 과거를 지녔으며, 잘나가게 된 마혜리 앞에 계략에 의해 나타나는 인물들은 그 마상태의 비밀 한 조각씩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부모가 죽는 꼴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서인우의 복수는 원수를 지 자식의 손으로 파멸시키려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결국 광적인 복수 이야기인데, 뭐가 문제적이라는 것인가? 서인우가 마혜리와 운명의 장난처럼 사랑에 빠져서? 복수가 시원찮아서? 아니다. 사실, 서인우는 복수를 계획하기 이전부터 마혜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의 음모는 사실 ‘문제적’이라기 보다는 매우 이상한 '복수'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복수의 수단이 되는 마혜리가 ‘정의’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면서 그렇게 (문제적이) 된다. 사건들과 시행착오들을 겪어 나가며, 마혜리는 권력을 손에 쥔 자의 무서움을 알게 되는데, 박애-자의 딸답게 그녀가 보는 것은 가진 자가 아닌 '가지지 못한 자'의 마음이다. 그녀는 법과 정의라는 것이 개인적 판결으로 안착될 수 있다는 데에, 그것이 바로 자신이 가진 힘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다행히 나 때문에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아직 없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네 손에 있다는 거야. 사건의 운명은 어느 검사의 손에 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구. 겁난다 겁난다 겁난다…...
그리고, 이 때 다른 곳에서 서인우 역시 말한다.
억울하다는 게 그런 거죠. 멀쩡한 사람 숨통도 끊을 수가 있는 거죠.
법률적으로 더 유리한 범법자와 아무런 증거도 가지지 못하는 피해자,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그런 사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억울한 판결에 화가 난 피해자에게 폭행을 당한 마검사는 그 억울함을 이해하자, 폭행을 고소할 수가 없게 된다. 사법부, 법정은 가지지 못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가, 아니면, 억울함을 계속 재생산 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각각의 사건들의 문제이며, 서인우의 일생일대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 마혜리와 박애자의 감추어진 문제이기도 하다. 먹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박애자나, 그 동일한 과거의 기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수족관 속의 한 마리 요란한 망둥어 같은 존재가 된 된장녀 마혜리나 어떻게 보면 억울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은밀하게, 다이어트 에피소드는 진짜, 곧, ‘정의’의 문제와 연결된다. 박애자는 부유함 속에서도 가지지 못한 하층민이, 마혜리는 변신 후에도 그 기억을 지울 수 없어 계속 자신을 무언가로 치장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계급병 환자가 된다.
이것은 다시 마혜리의 연애 문제에도 연관된다. 잊고 싶은 그 사건을 사람들이 들쑤시자 기가 죽은 마혜리에게 윤세준 검사(한정수)는 이 ‘명대사’를 날린다.
과거를 놔줘야 그 자리에 미래가 오는 거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역시 과거에 얽매인 인물이라는 점. 3년 전에 죽은 부인을 (외모만) 너무나도 똑 닮은 마혜리의 등장에 그와 진정선 검사 (최송현)의 조심스럽던 관계도 얼어붙은 것이다. 작가는 이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재미있게 얽고 있기 때문에, 윤검사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한다.
윤세준, 니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니?
만일 정의라는 것이 단순히 복수가 아니라면, 가령, 잊고 싶은 진짜, 과거를 어떻게 놓아 주어야 가짜가 아닌 새로운 어떤 가능성이 도래할까? 그 가능성은 마혜리에게, 서인우에게, (그리고 윤세준에게)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또, 그렇다면, 검사가 된 입장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억울한’ 과거는 어떻게 풀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을 안고서도 마혜리는 나온다. ‘계속 끝없이’ 나온다.
네, 가지가지 하는 마검이 찾아왔습니다.
*진짜와 가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라는 모든 변주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멋진 한 장면에서 환상적으로 종합된다. 과거에서 온 엄마와 마주치는 딸의 이야기로.
내 이름 알죠?
알아야 하는 건가?
나 몰라요?
누군데?
그럼 여기 왜 왔어요?
사과하러, 축하도 하고.
미안해 하고 축하해를 어떻게 같이 해요?
그치? 사실은 축하해주러 왔는데, 사과를 먼저 해야 될 것 같애.
누구한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하는 거랑 좋아지는 거랑 다르다는 걸 알았거든.
예고: 2편- 마상태의 속죄와 구원
3편- 서인우의 사라진 과거
2편은 내년 이 시간에…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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