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ns and Talks (2001)
법과 킬러
‘킬러들의 수다’에서 가장 이상한 설정은 조검사(정진영)가 상연(신현준)을 체포하지 않고 총을 쏘는 것이다. 장진 감독의 특징으로 보아 이렇게 억지스럽고 꼬인 설정이 등장할 때는 어김없이 메시지가 따라오는데, 이 영화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는 한 킬러는 필요하다 이다. 조검사가 상연을 놓아주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로,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의 그 증오심을 없애 주겠다 이다. 이 노골적으로 천진난만한 메시지들을 당신은 곧이 곧대로 믿는가?
글쎄다. 장진 감독은 언제나 쉽고 눈에 띄는 메시지를 표방하고, 또, 그것이 영화의 의도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모든 것을 말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서 메시지 이상의 어떤 것을 계속해서 흘려 놓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벌인 판에서 가장 따분하고 쉬운 것을 찾아서 보는 사람들이 다 의아해 할 만큼 억지로 구색을 맞춰 메시지라고 제시해 버린다. 그의 영화는 배경 설정이나 리서치도 거의 없이 그저 코미디의 흐름만을 중시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틀어가며 메시지를 강조해야 하나? 장진 영화에서 메시지를 믿지 말라. 이것이 그의 영화를 보는 나의 제 1 수칙이다.
그렇다면, 조검사의 의도란 대체 무엇일까? 누구 말대로 킬러들로 하여금 탁문배(손현주)를 죽이게 만들기 위한 교묘한 도발이었을까? 그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우선 일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려면 킬러들도 조검사도 훨씬 더 신중하고 계획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양 편 다 즉흥적이고 지멋대로이다. (킬러들은 맘만 먹으면 집에 침입한 자의 신상 정보를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 세콤 직원에게 물어보면 끝난다. 조검사가 경찰이란 것은 상연이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 명함에 수갑까지 보여줬다. 조검사는 상연이 킬러들에게 자신의 정보를 줄지 안 줄지 예측할 수 없다 - 킬러들이 조검사의 신원을 알게 되면 탁문배를 죽일 이유가 없다. 조검사는 킬러들이 차 번호만 보고 그 차에 탄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죽여버릴 지 예측할 수 없다.) 더욱이, 만약 조검사가 그런 식으로 살인을 ‘의뢰’한 거라면 방금 자신이 한 말 (킬러를 굶어 죽이겠다)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러니까, 탁문배의 죽음은 우연의 일치이며, 보너스나 관객 봉사에 불과하다.
물론, 이 영화의 엉성하기 짝이 없는 설정들로 보아 굳이 여기서도 서로간에 신중하고 계획적일 이유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조검사라는 캐릭터를 그렇게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조검사는 그러기에는 너무 인간적이고, 나름 낭만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킬러들이 탁문배의 회계사를 죽였을 때 그는 탁문배에게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라며 짐짓 사과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꼭 자기 손으로 탁문배를 잡아넣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탁문배는 그로 하여금 킬러들과 경쟁자가 되게 만드는 대상이다. ‘나는 미스 유가 아니다’라는 미스터리한 전언까지 남기며 킬러들을 경쟁 대상으로 설정하는 그가, 누가 어떻게 먼저 잡는가 라는 이 대결을 포기하고 킬러들에게 의뢰한다면, 조검사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도, 그와 킬러들의 경쟁에 의한 공감대도 무너지게 된다.
조검사는 탁문배를 그런 식으로 죽여버릴 수가 없다. 마치 ‘법’과 정의의 의인화와도 같은 그의 광적인 상사(김학철)는 ‘난 그냥 그 새끼가 싫어. 그런 새끼는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이가 갈려. 그냥 두면 딴 놈한테라도 죽을 놈이야. 근데 나는 그게 싫어. 내 손으로 죽일 거야.’라고 고함치는데, 조검사는 그렇게 미쳐 날뛰지는 않지만, 분명 같은 의도를 갖고 있다. 즉, 악인이 악인에 의해서, 법의 바깥에서, 처단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악인을 오직 법으로만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처단하는 것. 기본적으로는 조검사는 법을 위반하는 악인에게는 어떤 판결을 스스로 집행할 여지마저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 라고 믿는다. 비록,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하고 엉성한 킬러들이 그의 준칙을 좀 바꾸어 놓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성실한 법의 집행인이다.
데스노트
잠깐 이 영화와 ‘데스노트’를 비교해 보자. 일본 영화에는 도착의 전통이 있다. 이 도착이란 단순히 성적인 변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배틀 로얄’은 명백한 도착을 다루는데, 거기서 변태가 되는 것은 미쳐버린 법과 그 집행자인 교사이다. 또, ‘자살 클럽’같은 영화 역시 일종의 도착을 다룬다. 자살의 도착 – 자살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그 자체로 어떤 운동의 역할을 하게 된다. 보다 쉬운 예로, 전설적이고 혁명적인 아니메 ‘아키라’의 테츠오는 도착의 희생자가 되며 동시에 ‘아키라’는 숭배대상이 된다. 모든 도착에는 이유가 있다. 배틀로얄이나 자살클럽(의 경우, ‘노리코의 식탁’)을 보면서 동조하진 않아도 그 배경을 왠지 모르게 어설프게라도 이해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전통은 원폭과 함께 시작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더 오래 전에 확립된 것일 지도 모른다. 가령 이마무라 쇼헤이의 충격적이고 뛰어난 엽기 살해범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이나, 심지어는 그 이전의 많은 사회 ‘폭력’을 다루는 영화들은 제각기 다른 도착의 지점들을 향해 쭉쭉 나아간다. 도착은 에로물에나 존재하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그리고 60년대 이후 일본 영화의 최첨단에서 도착은 언제나 사회적이었다. (물론, 포르노물에서도 최첨단이(었)지만…) 근래에는 이런 작품들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보다는 매니아적인 서브 컬쳐물이 되었지만, 이것은 아직도 일본 문화가 갖고 있는 무척 강력한 전통 중의 하나이며, 상대적으로 우리 문화에서는 금기시되어 온 장르이기도 하다.
데스노트 역시 명백한 도착증 영화이다. 성실한 법대생이었으나 법의 능력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방황하던 라이토는 우연히 발견한 데스노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그는 악인을 섬멸하는 신 ‘키라’로 재탄생 하고,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경찰들과 일본 정부, 그리고, 두문불출하는 탐정 L에 의해 쫓기게 된다. 이 영화에서 비교적 쉽게 풀어내는 윤리적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악인이라고 해서 법의 바깥에서 마음대로 처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인가? 라이토(키라)는 이렇게 반문한다. 법이 악인을 처벌하지 못한다면 그 법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가? 키라가 처벌하는 죄인들은 단순한 흉악범, 파렴치범, 폭력 사범을 떠나서 비리 정치인, 경제인 등등을 망라한다. 그들은 데스노트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다. 키라는 ‘법’에 도전한다.
영화에서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명탐정 L을 등장시키고, 반면, 대중 속에선 키라를 새로운 ‘신’으로 떠받드는 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하며, 사람들은 은근히 키라에게 동조하게 된다. 영화의 핵심에서는 라이토가 법의 대변인들을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를 쫓는 형사들이나, 악으로 규정하려는 집행인들, 그 와중에 라이토는 경찰들과 반대 인사들을 죽이고, 키라에 반대하는 그 자신의 여자친구를 계획적으로 살해하고, L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라이토는 키라가 되어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아버지는 이해할 것이라고, 차갑게, 말한다. 라이토는 도착증 환자이다. (물론, 영화의 결말이 모두 라이토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데스노트에서 진정한 도착자는 사신 류크이기 때문이다. )
킬러들의 수다를 데스노트 같은 매니아 영화와 비교하는 게 이상한가? 조검사와 킬러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두 영화는 쌍을 이룬다. 킬러들의 수다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다른 이야기를 엮고 있는데, 하나는 킬러들의 이야기 – 즉, 연애와 같은 ‘사랑’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검사들 이야기 – 탁문배와 같이 법의 구속을 빠져나가는 악인을 처단하고픈 자들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 검사들의 이야기이다. 검사들은 무력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법을 넘어서 악인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증오’를 표출한다. 법망을 피해가는 악인과 형사들의 사투를 다루는 영화는 많지만, 킬러들의 수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이 영화는 데스노트와 마주치게 된다. 왜냐하면, 조검사가 맞딱뜨리는 네 명의 사내가 바로, 일종의 사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스노트의 경찰들과 달리, 조검사는 그들에게 경기를 제안한다. 법대 데스노트의 경기. 이 영화가 빛을 발하는 지점은 놀랍게도, 영화가 가장 황당한 지점과 동일하다. 왜 조검사는 상연을 놓아주는가? 그는 스스로에게 어떤 대결을 제안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나, 검사의 직분에 걸맞는 방식으로, 탁문배라는 악인을 잡아 쳐넣겠다. 그리고, 다른 모든 악인들을 잡아 넣는 것을 일생의 소명으로 삼겠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너를 놓아준다. 그리고, 너와 경쟁해서 이기겠다. 사신이 아닌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물론, 그는 상연이 돈만 받으면 악인이 아니라 그 어떤 자라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 모든 것이 범죄라는 한 단어로 묶일 수 있다. 만일 킬러가 없다면, 모든 살인에는 범죄자가 있을 것이며, 그 범죄자들은 어떤 온당한 이유나 어떤 피치 못할 동기를 가지건 죄를 저지른 것이다. 조검사의 의무는 그들을 붙잡는 것이다. 이것이 법적 정의이다.
이상한 공존
하지만, 역시 장진 감독답게 이 영화에서도 그는 이런 문제를 ‘도출’시킬 생각은 없다. 장진 감독의 이야기들은 아이디어를 늘어놓는 타입이지 그것들을 딱히 심화시키는 타입은 아니다. (이 경우에는 심화시켜서 그리 좋을 것도 없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조검사의 의도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탁문배는 죽는다. 그것도 웃으면서. ㅋㅋㅋ!) 킬러들은 사랑에 빠지면서 사신이 아니라 가족이 되어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누군가를 폐암으로 죽게 해달라고 찾아오는 장진과 남자 친구는 마치 동성애자들같이 보이며, 하연(원빈)은 불륜 여고생(공효진)과 나란히 앉아 있고, 정우(신하균)는 화이(오승현)와 사귀고 있다. 혈액형 B형인 상연 역시 B형 남자가 제일 싫다는 오영란(고은미)과 사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은 킬러들의 수다이지 검사들의 수다가 아니다. 그리고, 조검사도 엿보면서 계속 움찔 움찔 하듯이, 이 넘들은 킬러도 아니다. 조검사는 한마디로 헛다리 짚었다.
이것은 행복한 오인이며 다행스러운 헛다리 짚기이다. 그가 만약 진짜 킬러와 대결을 제안했다면, 그때부터는 목숨을 건 사투나 정신병적 투쟁의, 데스노트 같은 영화가 나와야 했을 것이다. 대신, 상연은 절름절름 그를 찾아가서 따지고, 자수하겠다고 꼬장도 부린다. (참 그답다) 이렇게 보면 엉성함은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이미 처음 ((가짜) 빌딩 경비에게 침입자로 보이는 검사)부터 킬러들과 검사의 요상한 숨바꼭질(?) 같은 공존을 계속해서 재치있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검사는 밥을 싸주는 여고생과 만나는 하연을 관찰하고 임산부와 춤추는 정우를 바라보며 재영(정재영)의 총알들을 보쌈해가면서도 그들을 붙잡지는 않고 계속 간만 본다. 조검사에게 이들은 참으로 이상한 녀석들이며, 왠지 나사들이 하나씩 제대로 풀린 게, 그리 나쁜 놈들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문득, 그는 자신도 나사가 풀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법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가 화이와 정우의 관계에서 보는 것이 그런 변화를 확인시켜 준다. 연애는 킬러들에게뿐 만이 아니라 검사들에게도 중요하다. 관찰자로서, 또, 조언자로써, 그는 얼토당토않게 화이의 사연에 끼어들게 된다. ‘우린 잡는 사람이지 나쁜 짓 하지 말라고 부탁은 안합니다.’ ‘그래도 좀 하세요!’ 그래서 그는 부탁하러 간다. 모든 장진 영화가 갖고 있는 메시지가 ‘사랑’이라면, 이 영화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조인 나사를 풀어버리는 것.
나사풀기 – 장진 영화의 주인공들
이 영화를 보다 문득 생각해보면 정말로 이상한 점은 어떻게 이렇게 엉성한 킬러들이 지금껏 한번의 실수도 없이 임무를 다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스토리 상으로는 우연찮게 킬러들이 사랑에 빠지면서 나사들이 툭툭 풀어지는 것 같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이넘들 하는 짓거리가 그냥 봐도 참 엉성하다. 물론, 항상 엉성한 장진 영화의 설정상 모든 죄는 장진이 짊어져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어차피 개그잖아. 라고 장진 감독은 얘기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영화는 법에 관한 영화도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조검사는 계속 헛다리를 집는다.
법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면 뭐지? 이 영화에서 그저 그녀가 이뻐서 아침마다 뉴스를 (아니 오영란을) 보는 세상물정 모르는 킬러들은 사실 어떤 프로 직업인이라기 보다는 초짜 연애를 하는 풋내기 청년들에 가깝다. 웃고 있는 탁문배를 살짝 제쳐두고, 킬러들의 ‘수다’를 강조하면 이 영화는 연애 영화가 된다. 근데 왜 킬러들일까? 그것은 그들이 영화 속에서 대면하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의 사연으로 드러나게 된다. 아기를 죽이려는 유부녀 화이의 남편, 불륜을 저지른 후 제자를 내팽개친 영어 교사, 그리고, 사랑했었지만, 이제는 증오스럽기만한 오영란의 그. 킬러들이 죽여야 할 (혹은 부탁해야 할, 또는 무시하게 되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주었던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들의 사연이 얽혀들면서 킬러들의 임무는 이제 누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을 (올바르게 – 올바르게?)마무리해주는 것이 된다. 그래서, 화이의 떡과 아기(도련화)가 정우의 임무를 실패하게 하고, 동시에 조검사를 무장해제 시켜버린다면, 불륜 여고생은 이 영화에서 킬러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오영란이나 화이 만큼 이야기 전개에 결정적이지도 않은 그녀가 어떻게??
살인을 부탁하려 하지만 엉성한 킬러들에게마저도 무시당하는 이 불쌍한 여학생은, 특유의 모성을 발휘, 요리를 못하는 하연을 위해 음식을 차려주는, 킬러들의 첫 번째 여자가 된다. (화이의 떡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 음식을 얻으면서 본업을 망각하게 되는 킬러들) 또, 여학생은 쭈뼛쭈뼛 하면서도 이 환상적인 존재, 킬러들의 위치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의뢰인들과는 달리, 그녀는 환상적으로, 상연과 하연의 앞에 계속 나타난다. 동시에,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에 킬러들의 식순이, 혹은 하연의 여자 친구, 또는 킬러들의 여동생, 아니면, 킬러들의 가족인 ‘여자’가 된다. 이것은 사실 커다란 움직임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군가를 죽일 때마다 의뢰인들에게 소중한 선물을 했다고 생각하고 기념 사진을 박는 상연에게 의뢰인이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오는 것은 분명 거래자로서의 일회적인 만남이 아닌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며, 게다가, 이 여고생은 그녀 나름대로 아직도 영어교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연과 함께 찾아간 학교에서 여학생은 하연은 알아 듣지 못하는 말, 영어,로 영어 교사에게 살인을 포기하고 작별을 고한다. 더 이상 어눌하지 않게, 진심으로 말이다. 오해한 하연이 같이 울면서 ‘내가 죽여 줄게’ 라고 말하자, ‘Stupid!’ 라고 탄식하는 여학생 (사랑은 외국어를 타고 온다). 그녀는 이미 킬러들이 생각하는 사랑인 ‘증오’를 넘어서는 ‘용서’라는 새로운 언어를 보여준다. 그런 그녀가 킬러들과 함께 하게 되면서 마침내 엉성한 네 풋내기도 가족을 이루게 된다. 이전에는 의뢰인들과 사진을 찍으며 위안 삼던 상연도 (그는 ‘꽃피우기도 힘들고 구하기도 어려운’ 도련화를 던져버렸었다), 이제는 돈만 주면 살인을 수행하는 기계적인 사신이 아니라, 살인을 포기하고 같이 살 줄도 아는 인간이 된다.
그래서, 이 ‘연애 영화’의 주인공은 하연이 된다. 하연은 네 명중 가장 가족에 관심이 많고 (아버지와 형제들에 대해서 물어본다) 작품 전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며 (가끔씩 혀가 꼬인다), 네 명중 가장 얼빵하고 (그래서 쉽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네 명중 가장 순수하게 사랑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정우의 ‘음악을 타고’ 오는, ‘스텝을 밟으며’ 오는 사랑을 이해한다) 다른 세 명과는 달리 하연은 계속 느리고 어눌한 말투를 고수한다 (이해도 더디다). 이런 하연이 ‘참사랑의 진실’을 설파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실제로도 중심에 있다. 두 시간 분량 영화에서 거의 정확하게 한 시간쯤에 있다) 물론, 그는 바보 같고, 상연은 어처구니가 없으며, 정우와 재영은 그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크득크득 들썩들썩 거린다. 하지만, 그 바보스러움을 지켜주기 위해 그들은 처음으로 임무를 실패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운데 부분이다. 거기서 하연이 ‘절규’하는 사랑은 ‘분노도 용서하는’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바로 그 사랑이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다. 모욕도 참고, 고통도 참아내는 것이다.’
왜 킬러인가? 그것은 그들이 이런 사랑을 배우기 이전엔 일종의 반복적인 죽음만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혹은 사라지거나, 지워져야 하는 관계 (이것은 아는 여자에서도 중요한 테마이며 (동치성이 가지지 못한 것 중의 한가지는 ‘첫사랑’이다), 일종의 신화로서의 첫사랑의 테마이기도 하다)가 영화 속의 상상적인 킬러와 의뢰인의 관계라면, 하연의 ‘위대한’ 사랑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일회적인 관계를 끝내는 역할을 한다. 폐암으로 어떻게 사람을 죽여? 같이 살면서 죽이는 수밖에…… 어떻게 놔주면서 킬러들을 잡지? 같이 살면서 잡는 수밖에…… 때로는 죽이지 말라고 부탁도 좀 하면서. 사랑은 킬러도, 법도 초월한 채 같이 사는 것이다.
흡수되는 수행자
킬러들의 수다에서 주축이 되는 두 에피소드는 탁문배-조검사와 오영란-햄릿 에피소드이다. 조검사와의 관계에서 탁문배는 처음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살인을 의뢰했지만, 다음에는 조검사를 제거하기 위해 의뢰를 하고 (‘조검사 그 새끼 …… 아예 죽여버릴까?’라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반대로 자신이 제거당한다. 탁문배-조검사의 관계는 범죄자-법의 관계이지만, 범죄자-법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일종의 뒤집힌 사랑(?)의 관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나름 이성적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법은 그것을 어긴 범법자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살인을 할 권리를 갖지 못하며, 범죄자 역시 공권력에 함부로 저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 속의 킬러들은 의뢰인의 감정에 조응하는 환상적인 존재가 된다. 킬러들이 돈을 받고 그 대가로 사람을 죽이는 냉혈한 해결사에서 의뢰인의 감정의 응어리를 푸는 감상적 대리인이 될 때 이 영화는 한 편의 연극이 된다.
킬러들의 이상형 오영란은 ‘그 사람’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증오밖에 남지 않았고, 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기를 바란다. 영화는 오영란과 탁문배의 의뢰들로 시작하고, 영화의 마지막에 두 사람의 의뢰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결된다. 결국, 이 영화는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오영란은 왜 누구를 죽이고 싶어하냐?’ 오영란 같은 여자도 행복하지는 않구나. 누구를 죽이고 싶을 만큼.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햄릿 공연 살인은 (다른 살인과 마찬가지로) 살인의 테크닉 자체는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언급할 만 하다.
1. 햄릿 다시 쓰기
영화 속 연극 햄릿은 나름 웅장하게 재연되지만, 사실 장진 감독은 이야기를 바꾼다. 예를 들어, 포스터 선전 문구 의 ‘(모든 것도) 지나가니 추억이었다. 햄릿, 그도 죽는 구나.’라는 문구는 이 연극의 주제와 무관하다. 원작 햄릿에서 중요한 것은 아련한 죽음이 아니라, 복수나 완성, 혹은 실행이나 결단, 같은 것이기 때문이며, ‘(사랑의) 추억’은 원작과 아무 관계도 없다. 또, 원작의 마지막에서 레어티즈가 먼저 햄릿의 용서를 받고 죽은 후 햄릿의 복수가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는 햄릿이 먼저 죽고, 마지막 생존자인 호레이쇼가 없이 죽어가는 레어티즈가 햄릿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영화 속 연극에서는 죽음의 풍경이 바뀌게 된다. 원작에서의 해골을 내던지는 묘지기와 그 해골을 들고 서 있는 햄릿의 대화장면 같은 것은 없어지고, 상처 입은 햄릿이 클로디어스(숙부, 왕, 타락한 가짜 아버지)를 죽일 복수의 시간도 사라지며 (하지만, 영화 속 연극에서 클로디어스는 이미 죽어있다), 대신 햄릿이 죽은 무대에는 눈꽃이 내려온다. 감독은 원작의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탈색시킨 채 낭만적인, 새로운 죽음의 환상을 도입한다.
결국, 이 햄릿은 낭만주의 3류 연극이 되지만, 영화에 중요한 킬러들의 마지막 임무를 장식하기에는 걸맞는 배경이 된다. 감독은 이 연극에서 ‘킬러’의 역할을 하는 자들을 찾아낸다. 우선 햄릿, 그는 아버지 선왕(이상적인 아버지, 실체가 없는 유령)의 복수를 하기 위한 계획에 골몰하지만, 좀처럼 알맞은 기회를 잡지 못하고, 사랑하는 오필리어를 미치게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 몰고간다.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즈,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에 분노한 그를 클로디어스가 충동질해 햄릿을 죽일 모략을 세우고 실행한다. 그래서, 이 연극의 오필리어는 오영란과 조응하며 (미친 오필리어는 ‘소중한 분’에 대한 이별의 송가를 부르며 들고 있던 꽃을 하연에게 건네준다), 킬러들은 레어티즈를 대신해 햄릿을 실제로 죽이게 된다. (미친 오영란은 햄릿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죽기를 바란다 – 복수이자, 의식으로써)
2. 두 명의 킬러, 그들의 위치
이것도 사실은 원작을 각색한 것이다. 원작의 레어티즈는 오필리어 보다는 햄릿이 살해한 아버지 폴로니어스(클로디어스의 신하, 햄릿과 거트루드의 대화를 엿듣다 햄릿의 칼에 찔려 죽는다) 의 복수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오필리어가 미치고 자살한 것도 따지고 보면 햄릿의 책임이지만, 그가 직접적인 살인자는 아니었으며, 자살은 (교회)법으로 허용되는 것도 아니기에 적법한 죽음도 아니다. 원작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연극에서 우리는 폴로니어스를 보지 못한다.
원작 연극 햄릿에서는 두 명의 킬러 (햄릿, 레어티즈)가 각각 서로 다른 아버지(선왕 햄릿, 폴로니어스)의 복수를 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 결말에서 조우하지만, 영화 속 연극에서 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라는 주제는 ‘오필리어를 버린 햄릿’으로 대치되고, 레어티즈를 선동하는 클로디어스는 그를 이용하기 보다는 그의 상처에 조력자(즉, 킬러)와 같은 존재로 변신한다.
저 여인은 누군가. 저 여인이 진정 나의 사랑하는 여동생 오필리어란 말인가? 내가 왜 살아남아, 내가 왜 온전한 정신으로 저 몰골을 보아야 한단 말인가? 너의 고통을 나누자. 복수할 거요. 너의 복수를 도우마.
물론, 클로디어스가 레어티즈를 위해 햄릿을 죽이지는 않는다. 조력자가 되는 즉시 클로디어스는 다시 킬러에서 의뢰인으로 위치를 바꾸어 레어티즈에게 살인의 장소와 방법, 시간을 제공하게 된다. 상상적인 킬러 클로디어스는 친동생의 연인 레어티즈를 실질적인 킬러로 만들고는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진다.
반면, 영화 속 햄릿은 더 이상 킬러가 아니다. 영화는 복수하는 햄릿을 보여주지 않으며, 그 내용상 햄릿은 복수를 실행할 기회마저 박탈당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클로디어스는, 간편하게도, 이미 죽어있다) 그리고, 그는 레어티즈 역할을 하는 킬러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킬러들과 관객들이 위장된 살인의 성공에 갈채를 보내는 동안 레어티즈는 참회한다.
그의 목숨은 땅에 누워서 이렇게 끝나지만, 나의 목숨은 하늘에서 다시 죽게 될 것이오. 나를 용서하시오, 햄릿. 나를 용서하시오, 햄릿.
그런데, 영화 속의 연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햄릿은 조검사로 다시 살아 돌아오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어머니 거트루드와 결혼한 타락한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고 이상적 아버지 선왕 햄릿의 질서를 되찾고자 했던 햄릿처럼, 조검사는 연극 속의 클로디어스 같은 존재인 킬러들을 쫓아가, 그를 (법적으로, 이성적으로) 체포할 기회를 잡지만, 대신 킬러처럼 (비이성적으로, 비합법적으로) 총을 쏘고 돌아간다.
조검사는 물론 상연을 죽이지도 않는다. 그는 킬러처럼 연극을 실재로 착각하지도 않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감정에 조응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킬러가 되는 꿈을 꾸고, 연극을 한다. 왜냐하면, 법이란 것도 역시, 처음에는 사람들의 감정, 억울함, 같은 것을, 공정하게, 이성적으로, 해결해 주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부장 검사처럼, 그도 악인들을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불법적이며, 비이성적인 환상일 뿐이다. 검사란 그러한 환상에 맞서면서 악과 싸우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연극 햄릿은 조검사에 의해 완성된다. 미친 오영란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레어티즈 /클로디어스 같은 존재가 된 킬러들의 맏형 상연을 조검사는 질서를 되살리려다 레어티즈/클로디어스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햄릿을 대신해 죽이는 ‘연극’을 한다. 그는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는 상연의 뒤에서 슬며시, 상연의 분신처럼 나타나서 분리된 후,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치 거울에 비친 한 사람처럼, 상연과 대치한다. 마지막 추격전의 조검사는 상연의 분신 같이, 킬러가 된다.
오영란이 햄릿을 죽여달라고 했을 때, 이미 법은 무너진다. 진짜 우리들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손쉽게 킬러를 고용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서라면, 우리는 누구를 가짜로 죽이고, 응어리를 풀어낼 수도 있다. 조검사는 자신의 연극을 통해, 악인을 처단하는 킬러가 되는 꿈을 이루고, 현실로 돌아간다.
3. 죽음의 표정, 삶의 표정
그래서, 킬러들의 수다는 결국 연애 영화가 아닌 법과 환상에 관한 영화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조검사이다. 그는 환상적인 존재인 킬러들을 통해 광기(악인 탁문배에 대한 광적인 집착)를 해소하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환상 속의 킬러는 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원을 풀어주는 천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무대 위, 죽어 있는 햄릿의 시체에서는 나비의 날개가 돋아나며 눈꽃이 내린다. 킬러들에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탁문배의 얼굴은 ‘악’을 상실한 채 웃음꽃을 피우게 된다.
마지막, 조검사에 의해 쫓기고 총을 맞으면서, 상연과 킬러들은 현실로 돌아온다. 달리면서 상연은 자신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을 맞게 된다. 그가 대리 가족처럼 생각해왔던 의뢰인들과 그들의 ‘소원’을 풀어준다는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범법자를 쫓는 경찰이란 이성적인 존재 앞에서 ‘초라함’으로 돌변한다. 계속해서, 하연은 말한다.
형이 운 이유가 슬프거나 겁나서는 분명 아니었을 거다. 형이 흘린 눈물은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잊어버린 순간에 나는 눈물과 조금은 비슷하다.
마지막 순간, 총을 맞기 직전, 상연은 철창 너머로, 또 하나의 현실인 미래, 화이의 아이, 를 본다. 자신이 죽일 뻔했던 그 아이는, 설령 그것이 불행하더라도, 죽지 않고 태어날 것이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들이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면, 세상은 존속될 수 없을 것이며, 역설적으로, ‘사랑’이란 것도 그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법이나 종교 같은 것들은 이 무심한 세상에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살아남고, 그에 걸맞는 ‘사랑’의 방식을 찾아내기 위한 방편들이다. 사람들은 대개 억울한 사연들을 무수히 안고 살게 되지만, 그것은 마치 삼키기 어려운 음식처럼 우리를 살찌운다.
하연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 그들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마지막에 조검사를 찾아간 상연은 현실로 투항하고 적법하게 자수하려 하지만, 조검사는 그를 환상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이런 식으로 그는 킬러들과 타협을 보며, 자신은 현실로, 킬러들은 환상으로, 그들의 연극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상연은 자신들이 ‘굶어 죽는’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하연을 안심시키고, 하연은 ‘세상엔 이렇게 죽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라고 하며 킬러의 역할을 긍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적인 결말이다.
세상은 법(사랑)이 지배하며, 이성적이어야 할 법(사랑)과 실제 이성(사랑)의 괴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족할 수 없게 만들고, 환상적인 해결책을 원하게 만들 뿐이다. 때로는 그러한 환상이 ‘기적’으로 실현되어 현실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 실재란 그렇게 쉽게 가로지를 수 없는 환상을 생산하며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고, 우리를 계속 그렇게 무언가를 꿈꾸면서 살아가게 만든다. 물론, 이것이 다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킬러란, 이렇게 나약하고 제멋대로인 우리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환상이며 그 환상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연극의 배우들인지도 모른다. 하연이 말하듯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며 산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 킬러들의 수다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hlSUwU-Zohg
*
이 글은 조검사와 킬러들, 그리고 킬러들이 맡는 임무들 중 탁문배, 화이, 불륜 여고생, 오영란의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는 인물들은 킬러들의 무기를 제공하는 주씨 아저씨와 왼손만 없어지는 사내인데, 주씨 아저씨의 경우는 분석할 필요도 없이 킬러들의 대리 아버지 역할을 한다. 그는 상연과 하연의 아버지의 어릴 때부터의 친구이며, 하연에게 둘째가 있었다고 구라 가족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이 영화가 오버하는 순간을 장식하기도 하는데, 오페라 하우스 살인을 하면 ‘이 나라가 시끄러워질 거’라고 경고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장진 감독이 어설프게 준비한, 앙꼬없는 떡밥에 불과하다.
네 명의 킬러들은 굳이 따로따로 다루지 않았지만, 대체로 여자들과 쌍을 이루게 된다. 상연은 오영란과, 정우는 화이와, 그리고, 하연은 여고생과. 그러면 남는 것은 재영 하나인데, 이 영화에서 가장 킬러다우며, 다른 세 명의 어눌한 코믹 코드가 없으며, 결과적으로 연기에서도 붕 뜨는 인물이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사건은 그가 해결한다. (물론, 정우도 폭탄을 터뜨려 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상연에게 따지다가 오영란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위험은 다 잊어버리고 ‘그럼, 오영란을 진짜로 봤단 말이야?’라고 물으면서 역시 결국은 바보가 되버리고 만다. 불쌍한 재영……
스타가 된 덕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배우는 원빈이고, 신하균과 정진영의 연기도 뛰어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는 신현준이라고 생각한다. 일관되게 어눌한 하연과는 달리 상연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신현준은 여러가지 리듬을 보여주어야 하는 상연을 멋지게 연기할 뿐만 아니라, ‘로맨스 킬러’를 생각나게 하는 그의 개성적인 외모마저 상연이란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톡톡히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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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감독은 말없이 다른 영화들을 갖다 쓰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 어쨌건, 코미디로서 웃기기도 하거니와, 킬러라는 환상적인 소재를 쓴 작품 중에서도 이 영화는 손꼽힐 만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초반 몇몇 장면은 ‘인정사정 볼것없다’를 흉내낸다. 나머지는 리서치의 엉성함이 미학으로 승화되는.. 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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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연극 햄릿은 위에서 언급한 점들 말고도 원작과 많은 차이를 지닌다. 가장 큰 차이로는 대사가 다른 부분들이 있다. 전혀 미친 여자 같지 않은 오필리어의 노래 같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원작의 오필리어가 사람들에게 꽃을 나누어주는 행위도 여기서는 다르게 이용된다. 즉, 영화 속의 연극 햄릿은 영화에 맞춘 맞춤 연극이다. 그래서, 레어티즈/클로디어스의 장면 같은 데서는 다른 의미들을 삭제하면서 강렬한 집중력을 획득하게 만들기도 하고, 햄릿/클로디어스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대사를 동시에 말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강력한 장면을 연출해내기도 한다.
오직, 연극의 첫 장면, 선왕의 유령을 보는 보초의 장면만이 원작과 비슷하다 (같지는 않다). 한편, 이 연극의 현대적이고 효과적인 무대미술과 코러스 같은 차림으로 무대 위에 등장하는 말없는 군중의 사용은 특기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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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연극과 킬러-조검사-오영란의 관계는 이렇게 도식화 해볼 수 있다.
선왕-햄릿 법/이성-1. 햄릿(배우), 2. 조검사
대 대
폴로니어스-(오필리어-클로디어스)-레어티즈 환상/감성-(오영란-증오심)-킬러들
(#괄호 안은 원작이 아닌 영화 속의 관계)
두 아버지들(선왕 햄릿과 폴로니어스)은 각각 법과 환상으로 대치되며, 두 아들들은 조검사와 킬러들로 대치된다. 의뢰인은 오영란, 그녀는 사랑의 환상(폴로니어스)를 잃었다. 클로디어스는 이 모든 사람들의 관계를 형성해주는 사랑-->(타락)-->증오심 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연극 전체의 움직임을 영화로 재구성해 보면, 선왕(법/이성의 유령)의 사주를 받은 햄릿(1.배우)이 폴로니어스(환상)를 죽이면, 아버지를 잃고 미친 오필리어(오영란)의 (상상적) 자살이 클로디어스(증오심)를 움직이고, 클로디어스는 레어티즈(킬러들)를 사주하며, 햄릿 (1.배우)를 죽인다. 하지만, 선왕(법/이성)의 유령은 떠나지 않고 또 다른 햄릿(2. 조검사)를 불러낸다. 이 새로운 햄릿은 법적인 복수를 해야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또 다른 킬러가 되어 연극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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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며 죽는 탁문배 장면이나 햄릿의 죽음 장면들, 또, 상연이 보는 어린 화이의 장면은 개인적으로 무척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장면들과 상연이 찍은 사진 속 의뢰인들의 평범한 모습들을 비교해보면, 이 작품이 말해주는 여러 다른 삶과 죽음의 표정들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웃으며 죽는 모티브를 뒤집으면 팀 버튼이 멋지게 형상화한 조커의 웃음이 생각날 수도 있고, 반면,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회(극장판)에 등장하는 ‘천사’가 된 사신 레이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조커의 웃음과 탁문배의 웃음은 왠지 ‘예술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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