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천사의 이야기

이박오 2012. 4. 14. 08:58

Lilja 4-ever (2002) Lukas Moodysson 
 

 

 

 


루카스 무디손 Lukas Moodysson 감독의 ‘Lilja 4-ever’ [천상의 릴리아]는 간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독이 마지막에 메시지로 전하듯이, 그것은 심지어 국가의 차원도 간단히 뛰어넘어 버린다. 릴리아가 쓰레기가 되어버린 옛 소비에트연방 어딘가에 있건, 꿈의 나라 미국에 있건, 혹은 스웨덴에 있건, 그것이 사실상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청소년, 아동의 성매매와 착취에 대한 고발이며, 그것은 대개 가난과 무지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바로 이 간단 명료함 때문에 어느 정도 당황하거나 심지어 실망하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다큐멘터리 적인 영화의 사실성만으로도 분노와 슬픔, 연민과 아픔을 혹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가령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같이 지나치게 개인적이지 않아서 마치 여러 사람의 토의와 사례 연구를 통해 나온 것 같으며 (사실 사마리아에서의 성매매와 이 영화의 성매매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혹은 비슷한 다른 영화들 (예를 들어 ‘Maria Full of Grace’ [기품있는 마리아])처럼 막판에 어떤 희망이나 개인 주체의 능동성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릴리아는 그저 16살이며, 무력하고, 단순하며,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당하다가, 자살을 택하는 보통의 아이이다.

 

이렇게 끔찍하게 사실적인 이야기에 실망을 하거나 당황한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어떤 서사의 힘을 찾으려 애쓰는 작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호를 해 보자면, 적어도 이 영화에는 뭔가 이상한데 라고 할만한 장면들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자살하는 두 아이들, 볼로디아와 릴리아가 천사가 되는 장면들이다.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이유없이 얻어맞는 14살 남자아이인 볼로디아는 릴리아에게 천사가 될 거라고 말하는데, (릴리아에게) 버림받고 자살해버리는 그가 영화 속에서 먼저 천사가 되어 릴리아의 환상 속에 나타나고, 릴리아 역시 자살한 후에 천사가 되어 영화는 천사가 된 두 아이들이 건물 옥상에서 농구공을 갖고놀며 즐거워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사실적이고 다큐멘터리 적이며 또한 비정한 이 영화(비정함은 인물의 표정, 혹은 증오와 사랑이 뒤범벅된 이야기, 또는 그것을 애써 숨기는 조작 따위가 아니라 오직 무의미한 일련의 '사건'으로 나타날 때 가장 끔찍하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증명한다.)에서 이런 환상적인 장면은 왠지 좀 어색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사실적 고발 정신에 대해 사족같은 느낌도 들며, 혹시 감독의 동정이나 대책없는 희망의 반영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만약 이렇게 해석해 버린다면, 이 영화 역시 막판에서 Maria Full of Grace 와 같은 '드라마'로 반전되어버리고, 영화의 리얼리즘은 치명적으로 손상받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난 후에, 아이들은 다 천사다 혹은 이렇게 불쌍한 아이들이다 라고 굳이 날개를 달아준 것 같다. (반대로 우리는 동물적이고 비열한 변태같은 존재, 혹은 그에 맞서 이들을 보호하는 수호자들이 되어야 하나?) 혹자는 이야기에 관계없이 이미지만으로도 여기에서 더 연민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럴 경우에는 왠지 감독이 아이들을 지나친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어 관객에게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더 문제이다. (이를 테면 왕의 남자의 마지막처럼 뒷북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감독은 여기에 몇 가지 흥미로운 몸짓들을 보탠다. 예를 들어, 천사로 다시 태어난 릴리아가 자신의 잘못된 행동들을 정정하면서 친절하고 영리한 아이로 잠시나마 거듭나는 것, 그리고, 볼로디아를 통해 '자살'이라는 행위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Lilja 4-ever 라는 릴리아 자신의 의지와도 위배되며, 자살할 경우 그녀의 삶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해질 뿐만 아니라 '타락'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는 것.

 

사실, 영화 속의 릴리아는 영리하지도 친절하지도 않고, 선택은 모두 틀렸으며, 그녀의 의지는 무심하게 짓밟혀서, 결국 그녀 스스로 인생에 패배한다. 그런 것들이 감독이 강조하는 시선이다. 릴리아는 단순히 천사같은 희생자라기엔 다소 제멋대로이며, 선의를 갖고있다기 보단 대책없이 타락한 버려진 아이에 불과하며, 강한 의지로 다시 태어나기에는 애시당초 너무나도 사랑받지 못했던 존재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아이들을 천사로 만들기엔 영화의 서사 자체가 너무나도 사실적이라는 - 즉, (우리의 도덕적 환상에 부합할 만한) 드라마가 결핍되었다는 - 점이 석연찮게 다가온다.

 

다시 말해, 천사가 된 볼로디아와 릴리아의 모습을 동정과 연민의 태도로만 바라보며 이런 순수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충전하며 만족감에 빠지고싶은 관객에게 이 영화는 알게 모르게 무언가 굉장히 찜찜한 구석을 남긴다. 릴리아와 볼로디아는 별볼일없이 무능하고 때로는 감당이 안될 탈선한 아이들일 뿐이고, 그들에겐 어떠한 사랑을 주는 가족도 없으며, 어떤 신뢰를 줄 만한 친구도 없고, 어떤 관심을 주는 이웃도 없다. 두 아이들을 포함하는 이 영화의 타자들은 모두가 서로의 삶에 지쳐서 서로를 이용해야만하는 각박한 사람들이며, 그렇게 서로 이용하고 잡아먹는 관계 속에서만 일말의 자기파괴적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피해자들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의 스웨덴인들에 가까운(?)) 우리는 릴리아가 아닌 릴리아들, '저런 싸가지없고, 그럴 것이 당연해보이는 타락한 아이들'에게 이런 이웃들과는 다른 진정하고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보내줄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인간적으로 보였던 단 한명인 안드레이가 가장 차가운 매매인이란 사실은 자명한데도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가난해서 모든 가능성의 척도가 돈으로 계산될 수밖에 없는 쓰레기 같은 동네에서 안드레이는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과 인간성 또한) 부유한 유럽의 환상으로 릴리아를 유혹한 후에 다시 그 부의 세계에 상품으로 팔아 치운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순수해 보였던, 그래서 릴리아같은 촌뜨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속였을 법한 이 안드레이가 릴리아를 범하지않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가 이미 그녀를 '상품' 이상으로는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선의와 따뜻한 관심이 사실은 충분히 무심하게, 마치 사물을 대하듯, 연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진정 무서운 것이다. 우리도 타자를 사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릴리아가 비행기를 타고 아주 잠시 마치 자신의 삶이 될 것인양 착각할 수 있었던 물질적 풍요로움은 스웨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자신과는 무관한 쇼윈도 뒤편의 환영이 되며, 그녀의 삶은 다시 자신을 팔고 조그만 공간에 감금되며 ‘신’과 마주하는 쳇바퀴도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보다 인간적일 것 같았던 스웨덴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바쁘고 미친듯이 놀며 여전히 외롭다. 물론 릴리아가 보는 스웨덴인 이란 자신을 구매한 일정 부류의 사람들일 뿐이고 이들 역시 릴리아를 상품으로 볼 뿐이지만, 어쨌건 그녀가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스웨덴은 부유해서 풍족하고 보다 폐쇄적인 쓰레기 국가일 뿐일 것이다. (스웨덴에서 릴리아가 갇혀있는 아파트와 러시아에서 볼로디아가 점령한 폐건물의 옥상은 그래서 별반 차이가 없다)

 

감독이 릴리아의 시점으로 잡아내는 스웨덴 인들의 모습은 그래서 지나치게 동물적이고 무의미하며 어떤 이야기나 깊이가 없고 헉헉댈 뿐이라는 데서 모두 비슷하다. 의미없는 개들의 몽타주처럼 나열되는 그들의 얼굴들은 한편으로는 웃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스러우며, 동시에 추하고, 사실은 불쌍하다. (타자에 불과한 개개인에게 약간씩의 의미를 부여하며 진열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고 이야기를 불려내는 일반적인 영화의 호기심어린(?) 시선과는 매우 비교된다.)

 

그들 중 조금이라도 길게 나온 단 두사람은 맨 처음 '그냥 내 손만 잡아주겠니'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첫 구매자와 '닥치고 내말만 들어'라는 마지막 구매자. 두 사람이 환상으로 갈구하며, 언어로 요구하는 내용은 일종의 대척점에 있지만, 결국 그 백일몽같은 그렇고 그래서 뻔한 '이야기'들이 또 다시 헉헉대는 동물적인 상황으로 합치되며 끝난다는 점에서 이 영화 속의 '이야기'의 가능성은 비참할 정도로 없다.

 

마찬가지로, 릴리아의 삶은 '이야기'나 '드라마'에 대한 배신으로 점철된다.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는 엄마에게 애증을 드러내는 릴리아의 극적인 연기도 결국 찢었다가 다시 모아 붙인 엄마의 사진을 태워버리는 것으로 끝나고, 그렇게 소중히 간직하려 했던 두 천사의 그림도 마지막 주기도문과 함께 내던져져 박살난다.  
 


 
국가 또한 가족이나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이모와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냉정하고 비루한 러시아의 보호원 직원이나 결국 너를 러시아로 되돌려보내 살인자들의 밥이 되게 할거라는 협박 속의 스웨덴 경찰도 릴리아의 삶에는 오직 겉도는, 심지어는 이해할 수도 없는, 차가운 이야기들일 뿐이다. 결국 릴리아에게 남는 것은 스스로 새겨 넣었던 자존심의 염원, Lilja 4-ever, 자신이 '저 개새끼들보다' 영원하리라는 결심뿐이다.

 

그래서, 천사 볼로디아는 릴리아에게 자살만은 안된다고 소리치는데, 영화의 절정이자 결론은 릴리아가 자신의 자존심인 스스로의 꿈을 깨버리고 (포기하고) 자살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도 무력하다. 사후에 릴리아가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후회하고 좀 더 착하고 영리한 아이가 될 수 있었다면, 즉 자신의 삶에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이라고 아무리, 아무리 꿈꾸어도, 그 '이야기'는 환상이 아닌 실재에서는 자신의 믿음이나 의지보다는 후회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며, 자살만은 안된다는, 짧은 삶이 어쨌건 영원한 죽음보다 의미있다는 볼로디아의 절규 같은 조언 역시 모든 꿈이 차단되어 버린 릴리아의 마지막 순간에는 거친 락 음악에 묻혀 의미없는 지껄임같이 시끄럽게 재잘되는 단속적인 외침들로 변할 뿐이다. 악다귀 같은 삶이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갉아먹을 때, 내 삶의 주인은 나 라는 식의 카피 문구 따위는 쇼윈도 속에서나 가능한 거짓 꿈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릴리아는 자신만의 의미없는 작은 세상과 자신을 이용할 줄만 아는 의미없는 불쌍한 사람들 속에 갇혀 스스로의 무의미했던 삶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더 넓은 세상에, 영화관 밖으로 언제든지 걸어나갈 수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떠한 이야기와 의미들을 가지고 릴리아와 같은 타자를 대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어떤 윤리적인 태도를 가지고 이러한 타자들을 대해야 할까? 가난한 러시아인들과 부유한 스웨덴 인들 사이의 어떤 지점에 나의 이야기는 존재하는 것일까? 천사가 된 볼로디아가 릴리아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그는 옥상 위에서 보이는 '세상'을 선물로 준다. 하지만, 릴리아는 '"이건 그다지 좋은 선물은 아니야"… "재미도 없고"… "너무 추워"… 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그에 대비될만한 어떤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는다. 학대아동을 다루는 '극'영화들이 가능성과 함께 너무 쉽게 제시해버리는 순수하고 영리한 아이의 이미지와 따뜻한 이웃, 혹은 가족, 인권운동가, 친절한 미국 시민, 유럽 시민, 등등의 이미지는 실제 릴리아와 같은 많은 아이들에게는 영화 속 이야기, 아니, 별나라 이야기 따위에 불과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주기도문을 외워도 정작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그런 종류의 ‘정의로운 꿈 속의 이야기’ 말이다.

 

대신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릴리아와 볼로디아의 천사들은 그들이 꿈꿀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야기를 실현시키기 때문에 사실 이 장면은 동정적인 제스쳐 따위가 아니라 영화 속의 의미있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야기에는 사실 줄거리도, 목적도 없다. 볼로디아의 꿈은 천사가 되어 매일매일 농구를 하는 것이었고, 릴리아의 꿈은 볼로디아와 함께 즐겁게 지내는 것이 다였으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 사후에 구성된 환상에 불과하므로, 관객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동정섞인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철저히 부정되어온 그 모든 사람들의 파편적인 ‘무의미’와 ‘이야기 없음’들이 결국 이렇게 밖에 집약될 수 없다는 데에서 이 하나의 장면, 이미지에 불과한 이야기는 어쩌면 모든 다른 진정한 ‘이야기’들의 씨앗이 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느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가 될 것인가?

 

 

 

 

* Lilja 4-Ever - theatrical trailer

http://www.youtube.com/watch?v=zqrQBJNDM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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