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연성
장진 사단의 영화 텍스트는 매우 성기다. 현실감을 상실하는 상황들은 둘째 치더라도, 각각 에피소드들의 성격이 너무 강해서, 영화는 튼튼한 줄기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큰 나무가 아니라, 비대한 각각의 장식물들이 이리저리 널려있는 연약한 크리스마스 트리 같이 위태로워 진다. 장진 감독은 나름 강력한 에피소드들을 발굴하거나 창조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에피소드들의 덩치가 커져감에 따라 작품의 일관성이나 궁극적인 존재 이유 같은 것들은 자리를 잃거나 급조된다. 현실적인 무게와 이야기의 흐름이 사라져버린 이 왜곡의 자리들을 그는 맛깔스러운 대사들의 대결로 채워 넣는다. 말하자면, 그는 일화와 잡담에 능한 달변의 이야기꾼 같다. 이야기들은 재미있는데, 그를 통한 어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서 결국에는 억지를 써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본 장진 사단의 영화들은 대략 8편 정도인데, 그 중 ‘아는 여자’와 ‘웰컴 투 동막골’을 빼놓고는 모두 이야기에 ‘개연성’이 심각할 정도로 부재한다.
이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보통 사람들이 장진 감독을 옹호할 때, 그리고 감독 자신도, 그의 텍스트가 연극적, 혹은 블랙 코미디 라고 하는데, 연극이나 블랙 코미디라고 해서 개연성이 없어도 된다는 법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장진 사단의 영화는 관객의 동참 (즉, 말이 안 되는 부분을 눈감아 주는 아량)을 요구한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바로 작품에 개연성이 부재한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하지만,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것과는 별도로, 개연성이란, 이야기가 얼마만큼 매끄러운가, 그 자체로 얼마의 설득력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장진 사단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 개연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가령 ‘킬러들의 수다’같은 작품은 따지고 보기 시작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이 안 된다. 킬러들이 덜떨어진 것이 설령 가능한 일일지 몰라도, 그들의 비전문적인 행동들이 이야기에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도입할 여지도 같이 제거해 버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살인 시퀀스는 현실성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의 촌극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사실, 그들의 행동이 비전문적인 것을 말하기 이전에 그들이 영화 속의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 자체도 말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쫓는 검사가 결국 놓아준다는 설정이나 이유는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검사가 내세우는 이유란 것은 ‘킬러들을 굶어 죽이겠다’는 것인데, 굶어 죽이는 것 – 인간의 타인에 대한 증오를 없애는 것 - 이 불가능하다는 상식은 집어 치우고라도, 이는 법적인 관점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이다. 가령, 킬러들의 수다를 ‘데스노트’와 비교해보면 문제의 심각성은 간단하게 드러난다. 킬러들도 일종의 데스노트이며, 영화에서도 주지시키듯이, 그들은 심지어 ‘정의’라는 개념 자체도 괘념치 않는, 돈만 준다면 누구든 죽일 수 있는 기계 용병에 불과하다. 적어도 데스노트의 라이토는 왜곡되었으나마 정의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라도 있었다.
단, 이 영화는 일종의 동화로 볼 때 약간의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것도, 동화이기 때문에, 현실과는 엄격히 유리된 한에서 말이다. 결국 킬러들은 연애를 시작하고, 임무를 방기하고, 사랑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1 이딴 것들이 킬러라니…… 하긴, 진짜 킬러가 본다면 좀 귀엽기는 할 것 같다…… 고 할 줄 알았냐? 2 이것 역시 옳은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인간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검사는 냉장고 아이스박스에 총알이 재워져 있는, 어이가 없는 킬러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호기심을 갖게 되고, 그들을 제거하기 보다는 같이 숨바꼭질 하면서 공존하기, 자신도 킬러같이 환상적인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여전히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지만,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이유를 내세우면서라도 검사는 현실에 맞부딪혀 보려는 킬러들의 맏형을 다시 그들의 세계로 돌려보낸다. 이렇게 생각할 때 현실과 유리된 기계들의 덜떨어짐은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 (사자와 허수아비와 양철 로보트 – 뭔가 하나씩 부족한 존재들)의 순수함으로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장진 사단의 작품들이 모두 동화로 보면 이해가 가능해 지는 것만도 아니다. ‘바르게 살자’의 경우 그 소박한 캐릭터들의 설정은 역시 동화적이기도 하지만, 이번에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경찰 측의 비효율성이나 안일함을 넘어선 걍 ‘무’대응이다. ‘바르게 살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킬러들의 수다’보다 좀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일지 몰라도, 훈련상의 납치범 정도만과 대치하는 허수아비 경찰서장 이승우의 철저한 무계획 및 무대응은 이해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는 왜 무식할 정도로 깐깐한 정도만을 뽑아 놓고, 또 ‘경찰의 위신이 달린 문제이니’ 최선을 다하라고 부탁까지 해 놓고는, 막상 자신은 그 모든 것을 그냥 ‘쇼’라고만 치부해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가? 망할 놈의 정도만이 셔따만 안 내렸어도 잡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가? 설마, 장진 감독은 그가 말하는 ‘블랙 코미디’를 위해서, 그러니까, 경찰의 무사안일이나, 우리 사회의 소위 ‘요령주의’를 풍자하기 위해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캐릭터를 이렇게 무책임하게 설정해 버린 것일까? 도대체 이 인간은 너무 똑똑한 것인가 아니면 멍청한 것인가?
우선, 우리는 여기서 장진 감독의 캐릭터 설정의 눈에 띄는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캐릭터 설정을 충실히 하지 않는다. 바르게 살자의 이승우도, 킬러들의 수다의 조검사도 그러려니와, 동화 속 킬러들도, 또, 자기 일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훈련중인 상사를 ‘순직’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정도만도, 일상에 발 딛지 못하는 상상 속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전문직에 대한 리서치도 없이 설정되어 현실성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그냥 어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흥미로운 대사를 치기 위해, 또는 극적 구조상 필요해서 등장하는 것처럼 일면적이거나 맹목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그 무언가를 위해선 훨씬 더 복합적이고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다른 것들을 외면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나사 빠진 인물들이다.
또 한가지, 더 중요한 점은, 그렇게 맹목적이거나 단순한 캐릭터가 영화의 안일한 메시지를 만들어내고 전달하는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영화 바르게 살자는 계속해서 경찰의 안일한 대응을 조롱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그 영화 속에서 그건 경찰의 잘못이 아니라, 안일하게 조성된 이승우라는 나사빠진 캐릭터의 탓이다. 정도만이 보내는 훈련의 헛점들에 대한 메시지는 사실 이 이상한 캐릭터가 있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들이다. 만일 경찰의 무사안일 주의를 비꼬는 것이 의도라면 이 영화는 모든 (무사안일한) 경찰들의 조롱을 받아도 싸다. 조검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킬러들을 굶겨 죽이겠다고 하지만, 킬러들의 맏형 상연마저도 그 말이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데,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막내 하연은 심지어 킬러(타인에 대한 살의와 증오)의 존재를 자연의 순리와 동급으로 격상시켜 버린다. 이렇게 안일한 메시지의 조성은 사실 ‘사랑이 별거냐’는 아는 여자나 ‘전쟁이 무어냐’ 라는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예외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이렇게 적합한 과정도 없이 단순한 캐릭터들에 의해 쉽게 발설되어버리는 메시지들 때문에 장진 영화들은 ‘이해하기 쉬운’ ‘따스한’ 영화들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가령 그 중 가장 그럴듯한 영화인 아는 여자에서도 여러 명의 사람들이 사랑을 반복해서, 아무 맥락도 없이 쉽게 쉽게 정의내리고 지나쳐간다. 최악의 경우엔 말도 안 되는 경로를 따라 퀴즈쇼에서 마지막 문제까지 간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결론을 통해 서로를 (혹은 사라진 한 여자를) 이해하게 되거나 (그들이 이해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무슨 진실(진실???) 인가?), 동화 속, ‘일상적인’(일상적인??) ‘옆집 아저씨 아줌마 같은’ (무슨 옆집???) 대통령들이 조리장과의 교감을 통해 (어떤 교감? 뭘 통해??) 결심을 하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순진하다 못해 황당한 순간들이 도래한다. (‘효자동 이발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도대체 뭐가 따스하다는 것인가? 대책없이 순진해서??
상황극
물론 장진의 영화들이 이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장진 감독 자신도 자기 영화의 개연성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때로 변명을 하거나 인정을 하면서도, 비슷한 영화들을 만들기를 멈추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그런 아량을 갖고 보아달라고 호소하기도 잊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장진 감독은 문제점들을 몰라서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부각시키며 즐기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재구성하고 놀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것을 사랑한다. 관객들이 거기에 동참해서 보기 시작할 때 장진 감독의 모든 영화들은 단순한 코미디 이상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비록, 그것이 현실에, 그리고 일반적인 논리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떻게? 이를테면, 전술적인 말장난들 같은 것으로. 그의 최대 장기는 역시 그 특이한 종류의 말장난에 있다. 이 말장난은 단순한 꼬리잇기나 뜻밖의 말실수를 통한 의외의 사실을 노출 시키는 일반적인 농담의 차원을 약간 넘어선다. 장진의 말장난은 곧 그의 연극성과 일맥 상통해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엉뚱한 대화에 휩쓸리면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의미를 뒤틀기 시작할 때 성공한다. 즉, 장진의 장기는 하나의 인물에 집중되는 하나의 이야기를 길게 늘여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인물들이 짧은 시간에 조성해내는 어떤 앙상블(‘연극성’)에서 나오는 이상한 힘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상식을 무너뜨리는 한 순간(‘하이코미디’ 이자 ‘블랙 코미디’)들을 조성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전술적인 말장난들을 재치와 느긋한 속도감으로 버무려 산개하고 밀어붙이면서, 개연성 없는 상황들을 계속 전개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이것은 일종의 눈속임 같은 것이기도 하다. 가령 마술사가 관객을 속이거나 사기꾼이 판을 벌이듯, 장진의 대사들도 그렇게 말도 안되면서도 그럴 듯 하게 관객을 속이려 든다. 예를 들어보자. 바르게 살자에서 신임 서장에게 딱지를 떼버린 정도만, 그를 두둔하려는 친구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딱지를 뗏다고 말을 하는데, 듣던 교통과장, ‘그건 동물들이나 하는 짓이야!’ 버럭 화를 낸다. 이 말장난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동물들이 아니라 순경들이 당연히 해야 할 임무라는 사실이다. (애당초 딱지 안 띠고 넘겨 보려는 이승우부터가 잘못이다) 물론, 대사의 논리적인 의도 역시 블랙 코미디로서 경찰들을 조롱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대사들은 그 자체로 재밌는 놀이가 되어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면서, 정도만이라는 인물의 단순성, 직선적인 우직함을 더 부각시킨다. 여기서 저 과장놈이 미친 거 아냐 라고 격분하거나 한국 짭새들이 다 저따위지 라며 바로 빈정상하면 이 말장난은 실패하지만, 고거 재밌네 라고 웃는 순간 말장난은 성공하면서 상황을 좀 더 이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된다.
말장난은 위와 같이 간단할 수도 있지만, 장진 감독이 선호하는 것은 이런 단순한 농담조 보다도 상황극에 있다. 가령, 킬러들의 수다, 불륜여고생과 킬러 맏형 상연의 첫 대면 장면이나, 성격이 더러운 정우와 임산부 화이의 만남 장면 같은 것들이 모두 말장난의 발전된 형식에 속하는데, 중요한 점은 이들이 일종의 상황극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상연과 불륜 여고생, 여고생이 느릿느릿 약간 모자란 톤으로 ‘아저씨 킬러죠?’라고 말하자 내빼는 상연 장면, 역시 느린 속도로 최대한 모자르게 대답하는 그는 혼자 딴 데 보는 척 하면서 방백을 하듯이 궁시렁거린다. ‘썅, 별게다…….’ 대사 치는 속도의 차이를 보면 상연이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리고 물론 웃겨진다). 아파트 문 앞에서 자신을 죽이려던 정우와 마주친 화이. 역시 느릿느릿한 톤으로 ‘떡 드세요’ 말을 거는데, 어쩔 줄 모르는 정우 역시 어색하게 양팔을 펴며 ‘환영합니다, 저희 동네에 오신 걸.’ 화이 역시 어느 순간에는 제 속도로 대사를 친다.
그리고, 이 어색하지만 웃기는 상황극들은 여러 명이 같이 휩쓸려갈 때 더 재미있어 진다. 불륜 여고생에게 우린 킬러 같은 사람이 아니야 라는 설명을 여러 명이 하다 보니 나중엔 ‘우린 우리가 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야’ 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나오게 된다든지, 바르게 살자에서 인질이 된 대인원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 속에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반항하면서도 점점 쓸데없는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정도만을 따라 ‘헛것’을 좀 더 잘하기 위해 자신들도 모르게 노력하게 된다든지, 이런 종류의 판은 크면 클수록 더 이상하고 웃기게 된다.
그래서, 장진 감독은 근본적으로 소수 보다는 다수를 선호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혼자 생각할 때는 이성적인 듯 하다가도, 여러 명이 대화하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어 갑자기 비이성적이 되거나, 자존심을 세우거나, 기분을 따라가거나, 뭐 그렇고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재미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퀴즈쇼’ 같이 왁자지껄하고 산만한 영화는 오히려 장진 감독에게는 일종의 자기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대인원이 보여주는 다양함과 정신 없는 충돌의 발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다양한 사람들이 이상한 하나의 상황 속에 휩쓸려가면서 엉뚱해지고 비일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상황’의 재미이다.
그래서, 장진 영화가 가장 강력할 때는 오히려 가장 말이 안 되는 때이다. 그게 성공하면 굉장히 웃기게 된다. 가령 킬러들의 수다에서 화이 남편이 쳐맞는 시퀀스. 처음에 상하연 형제가 어눌한 태도로 천천히 사죄하다가 퍽 퍽 퍽 얼굴을 때려주고 나가면, 곧이어 조검사가 타서는 ‘부탁하러 온거야 새꺄, 부탁! 부탁! 부탁!’ 하면서 막 발로 찬다. 혹은 아는 여자의 야구장 시퀀스들, 동치성이 실연당한 여인의 절규를 듣다 공을 놓치고 영웅(?)이 되어 광란 상태에 빠진 관중들의 헹가레를 받는 장면이나, 마지막 야구장 시퀀스의 통쾌한 홈런(?) 장면을 따라 웃는 표정 그대로 굳은 채 고개를 돌리는 선수들과 감독 코치들, 관객들. 바르게살자에서 흥분한 미스 리가 정도만한테 ‘니 맘대로 딱지 붙이고 니 맘대로 할 거 다 했는데, 나도 내 맘대로 하면 안되냐?!’ 따지다가 ‘옳소!’를 외치는 우반장에게 ‘아저씨는 죽었잖아요!!’라고 핏대를 세우는 장면. 이러한 장면들이 웃기는 이유는 그 장면 자체에 힘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웃기지만 이상한 작은 에피소드들에 관객도 차차 무장해제 되어야만 이런 절정들이 진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가령, 하연의 ‘참사랑’의 설파와 조검사에게 '부탁'해달라고 명령하는 화이, 사랑을 위해 공을 던지는 ‘미친 놈’ 동치성, 그리고, ‘훈련은 실전처럼’을 실천하는 정도만의 요구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인질들. 이런 것들을 관객도 받아들여야, 이 장면들이 정말로 재미있어 진다. 이것이 상황극의 조건이다.
생각해 보라.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상한 상황들 속에서는 우리 자신도 종종 웃기는 실수들을 하지 않는가. 그것도 매우 진지하게. 장진 감독이 노리는 것은 이런 부조리한 상황의 조성과 그 속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들을 부각시키거나, 계속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부조리가 제대로 강렬한 사회풍자로 이어졌던 ‘개같은 날의 오후’ 역시 다수의 인원들이 휩쓸리는 엉뚱한 사건이 발전해 소동, 소란, 그리고 일종의 굿판으로까지 나아갔을 때 그 환상적인 결말로 치달을 수 있었다. 이때, 사람이 많다는 것은 개개 구성원의 목소리 모두를 수렴하는 민주주의의 장으로써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속의 이상한 역학관계, 상황이 모두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끄는 집단의 등장, 개개인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이상한 결단을 하게 만드는 쑥덕공론의 형성 같은 것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정치의 형성과정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우스꽝스러움이기도 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중지를 모았는데, 결론은 한낱 자존심이나 경쟁심리 같은 것으로 결정나 버리다니.. 혹은, 애초 하나의 상황에 불과했던 헛것이 사람들을 이상한 결론으로 이끌어버리다니.. 그 속에서 장진의 주인공들이 슬그머니 나타난다. 장진 감독의 영화에 메시지 따위는 없어도 (나는 기본적으로 그의 ‘따뜻한’ 메시지를 차갑게 불신한다, 또는 가볍게 농담으로 넘겨준다.) 주인공들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장진 감독이 진정 따뜻한 지점은 그 주인공들이 바보짓을 했단 것을 분명하게 보여줄 때라고 생각한다. 그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맹점을 가지고, 혹은 바보 같으나 여전히 진실된 표정으로 중심에 서기 때문에 관객의 동정어린 친근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가령 아는 여자의 이상한 ‘사랑’의 민주주의는 동치성과 한연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바르게 살자의 훈련은 결국 이승우와 정도만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또, 킬러들의 수다에서 조검사가 마주치는 환상이란 무엇이며 킬러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가? 그리고, ‘박수칠때 떠나라’에서 결국 헛물검사 최연기가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Cinema' 카테고리의 다른 글
Prosecutor Princess 1 (0) | 2012.04.17 |
---|---|
천사의 이야기 (0) | 2012.04.14 |
The Girl who Leapt through Time (2006) 細田 守 (0) | 2012.04.02 |
Crime Story (1993) 黃志強 (0) | 2012.03.28 |
Lovers' Concerto (2002) (0) | 2012.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