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The Girl who Leapt through Time (2006) 細田 守

이박오 2012. 4. 2. 10:18

 

時をかける少女 (2006) 細田 守

 

 

                         

 

 

미래에서 기다릴께.

. 금방 갈께. 달려서 갈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관한 질문은 영화가 끝나갈 때, 치아키와 마코토의 대화로부터 비롯되었다. 머나먼 미래에서 기다리는 치아키를 향해 마코토는 어떻게 ‘달려’ 갈 수 있을까? ‘방랑자들’이라는 제목의 티브이 시리즈로 제작되기 이전, ‘엘 하자드’ OVA에서 여장소년이었던 마코토는 이 영화에서 소녀로 등장한다. 어차피 환타지로 가득한 엘 하자드에서의 여장은 또 다른 환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으니까.

 

 

1.     엘 하자드

 

먼 미래에서 그 때에는 사라지고 없는 한 폭의 오래된 그림을 보기 위해 현재를 방문한 방문객인 치아키는 엘 하자드의 마코토처럼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마코토에게 기다리겠다고 한다. 엘 하자드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렇게 하나가 돌아오는 사람의 이야기인 반면 다른 하나는 달려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 있다.

 

저 쪽에서 돌아오건 이 쪽에서 달려가건 그것이 무슨 차이겠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차이를 구성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엘 하자드의 마코토는 뭐든지 잘하는데 반해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마코토는 잘 하는 것이 없이 그저 본인의 표현에 따라 ‘운이 좀 좋은 … 알고 보면 그것도 아닌’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좀 더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 그리고 사실 엉뚱한 이상으로 엉망인 예이지만 - 그것은 영어와 일본어의 어순의 차이일 수도 (라고 억지를 써 볼 수도) 있다. 동사가 앞에 오는 영어를 말하는 마코토는 중언부언 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결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반면 일본어를 말하는 마코토가 중언부언 하는 동안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어를 말하는 마코토는 환상적인 마코토가 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이유도 모르게 마코토는 항상 무언가를 해낸다. 그에게는 ‘열쇠’가 주어져 있고, 그의 행동과 동떨어진 결과는 그 의미없던 행동 자체를 깨버릴 수 없는 주문으로 만든다. (심지어 봉인된 이퓨리타는 그 열쇠를 주기 위해 이미 만년 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다) 반면 호두알 모양의 ‘배터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소녀 마코토는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계속 한 사건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이 영화에서는 아주 중요한 윤리적인 명제가 된다.

 

마코토가 이득을 보는 만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엉뚱한 이야기를 좀 진지한듯 바꿔 말해 보자면, 그 차이는 연역법과 귀납법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귀납법이 근본적으로 비논리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논리가 아닌 결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반면 논리적이지 못한 연역법은 종종 당위를 가장한 환상이 된다. 엘 하자드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구성하는 각각의 사건들은 모두 환상적이라 두 작품 모두 환상의 나열식 구성이라고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경우 그 환상의 경우들은 각각 귀납적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정해지며’ 열쇠가 아닌 배터리는 일정한 수량의 ‘기회’를 줄 뿐 결과 자체를 담보하지 않는다. 사건은 정해져서 ‘너 아니면 누군가가 반드시 대신’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무언가 변하는 만큼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어떤 파급 효과는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만화의 환상성에 대해 자의식적인 이 작품은 언젠가 꽤 유행이 되었던 ‘시간 되돌리기’의 소재를 쓰고 있지만, 여기서의 ‘시간 되돌리기’는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반복과 변주에 집중되지도 않고, 단순히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반복해서 되돌려본다는 식의 도덕적인 장난으로 갈무리되지도 않는다. 엘 하자드와 연결되면서 이 작품은 과거뿐만이 아니라 머나먼 미래의 세계와도 연관을 갖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의 타임 리프(시간 뛰어넘기)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특정 과거가 아니라 결국 열려진 미래를 향한 연습의 의미를 갖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당위나 환각이 아니라 다가올 어떤 것을 위해 한결같이 나아가야 한다는 어떤 비밀의 윤리이다.

 

이전의 시간 되돌리기에 관한 작품들이 많아 보이는 변주 속에서도 결국에는 이미 정해진 몇 개의 시간을 반복적으로 왕복하는데 비해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며, 그림으로 표상되는 과거는 안개에 뒤덮여 있는 슬픔의 시대로, 미래 역시 의미들이 사라져 버린 상실의 시대로, 각기 다르게 예감될 뿐이다. 현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옳은선택을 통해 사건을 바로잡으면 정답이 되어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은 개개의 결과를 가지며 그 결과들에는 정답이랄 것이 없다. 이미 과거에서부터 역사란 정답의 연속이 아닌 선택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잘못된 과거라도 그냥 하나의 실수로 ‘정정해야 할’ 것이 아니며, 그것 또한 모두 소중한 진실이기 때문에 미래는 그러한 진실들을 통해 결정되어 나간다. 이러한 시간 인식 속에서 현실은 그러한 과거와 미래의 징검다리와 같기 때문에 또한 항상 비결정적이고 역동적일수밖에 없다.

 

 

2.     백투더퓨처

 

여전히, 실험의 방식 자체는 예전에 보았던 헐리우드 영화들의 시간 되돌리기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타임 리프라는 모티브의 미학적 핵심은 ‘잃어버리지 않는 기억’에 있다. 과거로 되돌아갈 때마다 사건은 새롭게 반복되지만 의식은 이미 경험했던 것에 ‘더하여’ 축적된다. , 시간을 거슬러가는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은 거슬러 ‘젊어지지’ 않고 되풀이되는 과거는 그저 다시 주어진 기회처럼 덧붙여진 시간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런 식의 모든 시간여행 영화의 시간은 사실상 여전히 일직선적이며, 만약 삶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반복되는 과거는 우리의 수명을 직접적으로든 상대적으로든 그만큼 단축시킬 것이다.

 

시간여행 영화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여행자의 인식도 반복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작품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치아키와 마코토의 경우처럼 상대방이 타임 리프를 할 경우엔 자신에게는 온전한 시간이 주어진다. , 몸과 마음 모두 과거로 돌아간다. 물론, 이 때, 어떤 미래의 경험은 지워진다. 치아키가 말하듯이, 마코토가 기억할 수 없는 사라진 어떤 미래에서 코스케와 하나는 마코토 대신 죽는다. 말하자면, 백투더퓨처 시리즈와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와 백투더퓨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백투더퓨처 역시 근본적으로 정답과 오답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여행 영화들의 유혹과 포기할 수 없는 덫은 바로 과거나 미래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야 관객들이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엔 과거도, 미래도, 그 어떤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내용도 마코토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신비스러운 하나의 그림과 일상 속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한순가 튀어나오는 치아키의 존재만이 구체적으로 현재가 아닌 시간을 증명할 뿐. 마코토가 바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 내일의 현재 속에서 갈팡질팡하다보니 어느새 천금 같은 기회는 다 사라지고 오직 한 번, 단 한 가지의 변경만이 가능한 미래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기회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3.     선택에 관한 짧은 이야기

 

만약, 시간 여행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들의 주제가 사실은 선택의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시간 돌리기 영화들과 가장 비슷한 근본 범주로 엮을 수 있는 것은 우스개나 비극으로 모두 변주가 가능한 세 개의 소원에 관한 단편들일지도 모른다. 가령 시골 어느 아낙네에게 자기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걸 바보같이 써 버려서 소세지를 자기 남편 코에 붙였다 떼어내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던지 (우스개의 경우), 아니면 인도 원숭이의 손으로 자기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지만, 사실 돌아오는 것은 시체 그대로의 아들이기 때문에 다시 돌려보내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던지 (저주의 경우) 같은 것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한정된 기회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시간 여행 영화들의 궁극적인 서사의 목표들처럼 옳은 선택인가 그른 선택인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하지만, 당연히, 이 이야기들은 시간 여행과는 무관한 오로지 현재의 선택 이야기이다. 그래서 전능한 세 번의 기회는 항상 의미없이 날아가버리고, 결과적으로는 주인공들의 돌이킬 수 없는 현재 상태만이 남아 더 강렬하게 부각된다.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 혹은 아들의 상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말하자면 시간 여행의 모티브를 이용하지만, 오히려 선택의 이야기의 구조에 더 가깝고, 또 충실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간 영화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 마코토는 자신에게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소 즐겁고, 또 줄기차게, 현재의 사사로운 선택들에 자신의 천금 같은 시간과 기회들을 계속 낭비하게 된다. 사실, 사람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짧은 지를 모를 때에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는게 아닐까?

 

 

4.     보르헤스와 완성의 이야기

 

하루하루가 불만족투성이인 평범한 고등학생 마코토에게 심지어 어떤 부분 (노래방에서의 시간)은 목이 쉬도록 줄기차게 반복된다. 그런데, 삶의 몇몇 순간들이 몇번씩이고 이렇게 우리에게 반복된다면, 우리는 이전에는 보지못했던 한 사건의 세부들을 반복하면서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의식(무의식?)의 영역에 있어야 할 기억들을 의식의 이편으로 끌고 오는 작업일 수도 있고 달리 보면 삶의 한 순간을 수많은 의미들로 채워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기억과 시간에 관한 장난을 치기를 즐겼던 보르헤스의 작품들에는 한 순간을 정지시키거나 매 순간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흘라딕은 사형대에 묶인채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정성스럽게 수없이 퇴고되어 이제 완벽하게 기억되는, 그러나 쓰여질 시간은 없는, 한 작품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완성하고, 푸네스는 개미 한마리 나뭇잎파리 하나하나의 움직임마저 모두 기억하는 무의식이 없는 완벽한 의식 속에서 고독하게 죽어간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적 환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환타지의 이면에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욕망, , 무한한 시간은 완성을 담보한다는 또 다른 절대적 환상이 있다.) 보르헤스는 그 환상을, 완성시키는 순간 헌데 완성이란 무엇인가?? - 파괴해 버림으로써 우리에게 그 균열의 지점을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종국에는 완성의 의미 자체가 의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 ‘이 복수가 다 끝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우진은 묻는다.)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물론 이렇게 완벽한 의식 혹은 완성된 하나의 인식을 가정하는 작품은 아니다. 대신 이 일상적인 작품에는 말해질 수 있었던, 혹은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들, 지나쳐갈 수도 있었던 진실들, 잊어버릴 수도 있었던 진심들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예를 들어, 처음 마코토가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다. 말할 수 없는 궁극적인 공포.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 사람들이 종종 잠 속에서 죽음의 순간을 꿈꾸는 이유는 그러한 의식의 한계, 혹은 그 순간의 완벽한 무기력함을 경험하기 위해서일 것이며, 이렇게 꿈꾸어지는 갑작스런 자신의 죽음 속에서 의지적이거나 자존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꿈에서 죽음은 결정적인 소멸, 완전한 사라짐으로써의 의미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 한 발자국만 덜 디뎠어도, 한 순간만 더 주어졌어도, 오늘만 아니었다면..등등.. 간발의 차이로 선을 넘어선 후의 아주 잠깐 동안만 느낄 수 있는 완벽한 무기력함 (완벽한 죽음의 경험.. 혹은 환타지와 실재의 경계에 닿는 죽음 충동의 발현)으로 경험된다.

 

마코토가 처음에 즐거워하는 것은 그러한 간발의 차이들을 자기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이다. 이렇게, 짧게나마 그녀는 ‘신’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바보’라서 그 위력을 자각하지 못하지만. 하지만, 어쨌건 죽음의 경험같은 것들은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된다. 반복해서 노래방으로 돌아가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마코토가 결국 목이 쉬어 버리듯이, 시간이 무한히 계속되어 맘 내키는 대로 잘못을 되돌릴 수 있다해도 결국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지쳐버리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엘 하자드에서 이퓨리타가 마음을 돌리는 (느끼는) 순간도 ‘어차피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이라면..’ 이라고 생각하며 고독을 깨닫는 순간이다.

 

 

5.     이퓨리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마코토의 경우 기회도 무한하지 않을뿐더러 그녀 자신이 매순간을 온전히 책임지지도 못한다는 불완전성에 있다. 가령 백투더퓨처 같은 영화에서도 인물들의 선택에 따라 각기 다른 미래가 결정되듯이, 마코토가 죽지 않는다면 그녀의 자전거를 타는 다른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대신 뛰어든 치아키를 구할 수는 있어도 치아키 대신 소화기를 맞는 유리까지 구해낼 수는 없다. 아무리 기회가 많다고 해도 그 결정이 일으키는 모든 결과들이 다 행복할 가능성은, 비율로 보았을 때는, 언제나 원래의 가능성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결정의 윤리적 중요성은 그런 모든 가능성들을 감내하고 나아갈 때만이 획득된다.

 

절대로 그렇게는 하지 않아.

?

남의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그렇게 나쁜 짓은 못하겠어?

과거로 좀 돌아갈 수 있다고 해서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했잖아. 지금까지 실컷 해 왔으면서.

.. 그렇게 생각했어?

뭐 그런 셈이지.

마녀다.. 역시 마녀 이모야.

 

이 작품에서 이퓨리타 대신 등장하는 마녀 이모는 엘 하자드 OVA 2기에 등장하는 이퓨리타처럼 ‘다른’ 이퓨리타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기에서 엘 하자드를 계속 여행하는 마코토 일행은 다시 이퓨리타를 만나는데, 이 이퓨리타는 마코토를 모르는, 그리고 다른 연인과 함께 하는 다른 사람(?)이다. 2기도 1기만한 환타지에 불과하지만, 어쨌건 2기에 마코토는 이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엘 하자드의 경우처럼 결국 죽음이라는 진실이 수반하는 고독과 그 고독감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환상적인 사랑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동시에 엘 하자드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사랑의 윤리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 하는데, 그것은 백투더퓨처의 경우처럼 도덕성을 가장한 가계 이기주의 따위는 아니다. 다른 영화들과 이 작품이 다른 지점은 타자 대신 자아를 혹은 악 대신 선을,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통해 어떤 미래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만드는 그 방식에 있다. 이 때 자아의 미래 역시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리게 된다. 시시각각 변화하면서 통제할 수 없음이라는 전언을 반복적으로 보내오는 마코토의 과거는 가령 메멘토같은 영화의 반복되는 과거의 파편들처럼 어떠한 진실을 찾을 수 없음이라는 진실/거짓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 영화의 마코토도 지극히 개인적인 진실게임을 하고 있기는 하다.. 덧붙여, 메멘토는 이러한 면에서 어쩌면 혁신적인 테크닉을 보여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실망스럽고 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더라도 말이다. 가령 비밀의 베일을 효과적으로 들춰냄으로써 경탄을 이끌어 냈던 식스센스유주얼 서스펙트같은 소위 반전영화들과 비교해보라.) 마코토라는 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간을 달려가게 만든다. 비록 잃어버린 진실을 찾을 수 없더라도. 그리고, 다시는 그와 만날 수 없더라도.

 

 

6.     냉정과 열정사이

 

반면에 마녀 이모가 잃어버린 또 다른 어떤 마코토가 ‘언젠가 돌아온다’고 했더라도, 그리고 마녀 이모가 말하듯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은 것이었고 ‘눈 깜짝할 시간’이었다 하더라도,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그것은 소멸되는 시간들이다. 복원사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인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조반나 선생이 말하듯 피렌체라는 도시 전체는 과거의 기억을 먹고 사는 죽은 도시이다.

 

물론 현재의 마녀 이모가 복원하는 그림은 치아키를 끌어오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결국 마녀 이모는 자기 대신 다른 누군가가 무언가를 지속할 수 있도록, 무언가를 만날 수 있도록, 무언가 일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엘 하자드의 마코토 역시 이퓨리타를 만나기 위해 고고학자가 된다. 하지만, 단지 그 그림을 보기 위해 미래에서 이 시대로 여행온 치아키는 그림은 보지 못하고 마코토를 만나게 된다. 마코토 역시,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어느 새 치아키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종종 배신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아마 누군가는 평생을 다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떤 진실은 사실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무수한 우연적인 사건들의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지 그 사건의 중요도나 가치, 그것이 담지해야 한다고 우리가 굳게 믿어 마지 않을 '운명적 사랑'이나 그 사랑의 진실따위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는 끝내 피렌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사랑이 과거의 기억속에서 튀어나와 다시 현실과 맞딱드리는 순간에도 말이다.. 복원된 작품이 훼손되는 모티브와 그에 대한 반응은 결국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이 영화의 커다란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복원사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진실은 결국 자신이 복원하는 과거 또한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복원은 하나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기 보다는 (복원에 대한 현재적 이해) 하나의 과거를 잠깐 끌어오는 작업이다. (복원에 대한 통시적 이해) 이때 복원은 진실의 회복이기 때문에 그 발화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떠한 과거와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잇는 현재라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떤 과거도 다른 어떤 과거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단지 그렇기 때문에라도, 복원사라는 직업은 다른 어떤 직업만큼 가치있고, 또 위력적인 것이다.

 

마코토, 너는 나같은 성격이 아니잖아. 약속에 늦는 사람이 있으면 달려서 데리러 가는게 너잖아.

 

마녀 이모가 말하는대로, 마코토는 치아키를 만나기 위해서 달려간다. 프레임의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결국,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기다리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지만, 여전히 마코토는, 엘 하자드의 환상 속의 마코토와는 달리, 다시 한번 더 듣고자 했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라진 한 미래의 말을, 그 말을 다시는 듣지 못하게 된다.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 치아키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고, 때로 우리가 놓치는 어떤 것은 우리가 얘기치도 못하게 우리 삶 전체를 바꿀 수 있을만한 그 어떤 것이었을 수도 있다. 언젠가는 사라질 치아키에 대한 후문이 어떤 식으로 퍼지든, 마코토에게 치아키는 그런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한순간 다시 프레임 안으로 돌아온 그가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다시 사라지는 것처럼. 마코토가 미리 본 것, 그 순간에는 그냥 지워버릴 수 밖에 없었지만 결국 그토록 그리워 하게 되는 것,은 그 불가역의 가능성이 선취된 사라진 한 미래의 기억 – 혹은 예감 - 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마코토는 그것을 환상적으로 다시 획득하는 대신 그것을 통한 다른 가능성을 약속한다.

 

그 그림, 미래로 돌아가봐도 없어져있거나 불타있지 않을 거야. 치아키의 시대에도 남아 있도록 어떻게든 해 볼께.

 

치아키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마코토는 (이미 과거가 된) 자기의 미래에서 보았던 그 그림, 마녀 이모가 삶의 한 시절을 바쳐서 복원하는 그 그림은 오래된 과거의 시각과 촉감을 간직하고 있지만 역시 어느 누구도 그 본래의 의미나 가치는 가늠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적인 비밀의 역사이다. 모든 복원사들이 알고있는 진실은 복원되는 과거가 영원할 수는 없어도, 여전히 자신이 그것을 복원하고 있고, 또 복원해야 한다는 어떤 요구이다. 설령 자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작품이 그만큼 가치가 있어서라기 보다도, 잊혀진 진실과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서. 작품이 증거하는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열어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 단 하나도 없듯이, 가치 없는 과거라는 것 또한 단 하나도 없다.

 

 

7.     시간을 달리는 소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미래에서 기다리는 치아키를 만나기 위해 마코토가 달려서 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 비밀의 윤리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코토가 말하듯이, 그것은

 

비밀!

, 뭐야 그게!

나중에 말해줄께. 

 

 

 

 

 

   

* 시간을 달리는 소녀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Xk9SAmD00Iw

 

 

 

 

 

 

 

이 글에서는 엘 하자드의 마코토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마코토, 그리고 이퓨리타와 마녀 이모들이 종종 별다른 구별없이 언급되기 때문에 엘 하자드를 본 적이 없는 분들께는 헛갈리거나 혹은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엘 하자드와 이 작품이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알다시피 SF소설 원작이 따로 있으며 같은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여러 편의 영화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엘 하자드 역시 두 편의 OVA와 두 편의 TV 시리즈가 있는데 방랑자들 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TV 시리즈에서 캐릭터의 설정은 OVA와 판이한 점이 있다. (가장 큰 것으로는 TV 시리즈에서 마코토는 더 이상 여장 남자 캐릭터가 아닌 평범한 남학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엘 하자드OVA와 이 작품을 묶어서 생각해 보았는데, 그 이유는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설정과 기억을 나누는 방식의 특이성을 이 두 작품이 공유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엘 하자드에 대한 글에서 따로 이야기했지만, 타임 리프에 대해 가장 과격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작품은 사실 가이낙스 (안노 히데야키)건버스터일 것이다. 반대로 타임머신이란 소재를 가장 참신하고 유쾌하게 다룬 작품으로는 역시 모토히로 카즈유키의 섬머타임머신블루스가 있다.   

 

만약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엘 하자드의 관계가 아직도 의심스럽다면 치아키가 미래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코토가 뛰어가는 장면과 엘 하자드 OVA 1기 마지막 편을 다시 보길 권한다. 물론 두 작품은 매우 다르다. 심지어는 비슷해보이는 그 환상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그리고,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하나’의 윤리적 태도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가능성 그 속에서 우리가 갖게 될 서로 다른 각자의 진실에 관한 것이다. 언젠가 말했듯이, 하나의 작품이란 작가()이 제시하는 환상적 이정표이지, 어느 누구의 삶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정표에서 너무 오래 서성거릴 필요는 없다. 이미 오래 전에 프로이드가 너무 쉽게 말해 버렸듯이, (모든) 문학은 근본적으로 ‘환타지’의 영역에 속한다.   

 

 

 

 

 

마코토, 타임 웨이츠 포 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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