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2002) 이한
사진-이야기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을 잊어간다. 기억하기 싫어 억지로 지워버리는 것들도 있지만, 너무 기억하고 싶은데 스르르 빠져나가듯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들도 있다. 때론 귀신 영화를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홀로 남은 남자처럼, 나도 언젠간 저러지 않을까? 모든 것이 꿈이었던 양, 망연자실하지나 않을까? 사람들은 귀신 이야기가 잊혀지기 싫어 머무르는 자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 반대로 자꾸 잊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보여준다고 느낄 때가 있다. 기억하고 싶은데, 나를 잊지 말라고, 우리의 진실들을 기억해 달라고 속삭이면서 자꾸 멀어져 가는 순간들. 사랑의 기억들도 그렇게 잊혀져 간다. 우리가 진정 사랑하기는 했었나?
시간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이야기하고 소설을 쓰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처음 사진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가 영혼을 잡아먹는 악마라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덧없이 날아가는 시간을 잡아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엄청난 위력에 겁을 집어먹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불과 한 세기 반이 조금 지난 현재, 사진에서 동영상으로, 이미지의 재생이 손쉽게 조작될 수 있고, 화소 단위로 정밀함을 따지게 된 지금도, 흑백사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동영상이 너무 절실하게 현실을 잡아챌 수 있어서, 무서워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손아귀에 잡힌 순간이 너무나도 초라하기 때문에, 그 찬란했던 순간이 겨우 이거였었나?, 볼품없는 진실을 보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차라리 흑백 사진을 택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진실은 오히려 저 지나간 시간의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친다.
그래서, 이야기도 사진도, 시간을 붙잡기 위한 수단이었건만, 점차 시간을 변화시키고 감내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어차피 손에 잡히는 현실이란 생각보다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는다. 가족 앨범이나 연애 앨범을 만드는 것은 현재의 증거를 남기는 것을 넘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현재를 잡아채지는 못하지만, 반복되면서 당장은 몰랐던 숨어 있던 어떤 의미를 환기시킨다.
가끔 친척들이 집에 오면 앨범을 같이 보는데 다 이상하다 그래. 죽은 사람 사진 보면서 좋다고 웃고 그러니까.
영화 ‘연애소설’에서 같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경희(이은주)와 수인(손예진)은 말한다. 우리 둘이 같이 보인다. 맨날 같이 보였으면 좋겠다 라고. 그리고, 지환(차태현)은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둘 만이었던 시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준다. 난 사랑에 빠졌어요. 어쩌면 좋죠? 별 일 아니군. 아니에요. 너무 아파요.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요. 계속 아프고 싶다! 같이 축구 중계를 보며 열광하고, 같이 여행을 떠나고, 같이 깡패에게 대들고, 영화를 보며, 같이 한다는 것이 이렇게 단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세 사람. 그들은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며 거울 속에서 나와 그렇게 그들만의 시간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시간을 한 시간 전으로 돌렸어요!
지환이 수인과 경희의 삶에 끼어드는 가장 모험적인 한 순간. 그는 그들에게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한다. 첫 눈에 반했다고 고백했던 지환은 ‘불편’하다는 수인의 말에 시계로 얼굴을 가린 채 바깥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둘이 아닌 세 사람 모두 친구가 되기로 한다. 연애소설은 삼각관계의 틀을 따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아는 그런 치정관계를 그리지는 않는다. 지환은 수인을 보고 첫 눈에 반하지만, 수인은 경희를 보고 있으며, 경희는 지환을 훔쳐보고, 수인은 그 둘의 연애를 보며, 그 속에서 사라져갈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래서, 수인은 이 영화에서 가장 현명한 인물이 된다. 처음에는 지환에게 관심이 없지만 경희의 달라지는 태도와 지환의 순수한 초대에 응해 삼각 관계를 허락하는 그녀는, 경희와 지환의 훔쳐보기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그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자기와 같은 처지면서도 활발해서 바깥으로 맴도는 경희를 사랑하고 의존하지만, 나중에는 자신과 경희 모두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주는 존재가 되는 지환도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두 개의 특별한 관계의 방식이 존재하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방식과 그것을 보호하며 사진으로 남겨줄 수 있는, 시간을 돌려주는, 방식. 그리고, 수인에 의해 그 사랑들은 그냥 그렇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순환의 출발점 - 수인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을 관찰하며 그 자잘한 특징들을 기억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때로는 흉내내보기도 한다면, 수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 이름 바꾸기를 제안한다. 만약, 우리 둘이 함께일 수 없게 된다면, 그땐, 나는 너가 되고 싶어. 내가 없어지더라도, 내 사랑이, 나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게. 그들은 그렇게 서로가 된다. 수인은 경희를 통해 자신은 누리지 못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 경희가 좋아하고 살아 가는 것을 보고 싶은, 경희가 되고 싶은 수인. 경희가 수인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닐까? 수인은 바로 자신이며 또, 지환이 반했다고 믿고 있는, 자기가 좋아하는 지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운명을 함께 나누는 동지이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수인은 경희의 다른 모습이며, 결국 경희가 돌아가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지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경희의 연인이며 동화 속의 아빠와 같이 시간을 돌려주는 지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자기 아빠의 귓볼에 지환의 점을 찍어보는 수인. 경희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받아주었던 지환은 수인에겐 어느새 또 다른 아빠의 역할도 하게 된다. 자신들이 아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착한 아빠를 지환에게서 발견하면서 수인도 지환의 소중함을 깨닫고, 마지막에는 눈을 감은 채 그의 얼굴을 마음 속에 담게 된다.
이름 바꾸기와 얼굴 만지기. 하지만, 수인의 이 모든 놀이들은 예정된 포기를 받아들이는 몸짓이기도 하다. 비록 수인이 지환과 경희의 마음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해도 그것은 그녀 자신이 욕망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세 사람의 사랑을 움직이는 출발점이 되는 장본인이란 것도, 이름을 바꾸거나 얼굴을 마음에 담는 그러한 행위가, 바로 움직일 수 없는 그녀의 위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지환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경희에게로 옮겨갈 수 밖에 없다. 이제 막 시작할 수도 있었을 사랑을 포기하고 홀로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쓸쓸한 수인. 그녀는 마지막으로 경희를 불러본다.
그리고 종착점 – 경희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경희이다. 그리고, 영화 속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사라진 경희를 찾아 헤매는 지환의 이야기이다. 경희는 수인이 보는 것들을 볼 수 없거나, 혹은 외면해야 하지만, 숨은 바람을 찾아내 대신해 주기도 한다. 수인 대신 병원에서 뛰어 놀며, 몰래 사랑에 빠지려 하고, 투정을 부리거나, 수인이 모르는 연애 박사라 자청하며, 여행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환을 바라보며, 욕망하고, 달뜨는 그녀의 사랑은 수인과는 달리 해답이 없다. 자신도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채 수인에게 질투와 죄책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경희. 영화에서 묘사되는 한 번의 위기에서 수인을 거절했다가 다시 뛰어가는 것처럼, 경희 역시 둘이 아닌 세 사람의 관계로 지속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 편지를 전달할 수 없고, 마침내 혼자가 되었을 때에도 두 사람으로서 수인의 방식으로 지환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정말 미안한데 그냥 우린 니가 불편해졌어.
세 사람 중, 어쩌면, 우리들과 가장 닮은 인물일 지도 모르는 경희는 그렇게 처음엔 수인의 거울 속으로, 다음엔 지환의 사진 속으로 초대된다. 그녀는 아픈 사랑의 세계로 호기심에 들떠 걸어 들어가며, 그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간다. 한 사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 가장 소중한 부분이 만약 사랑이라면, 수인과 지환의 소중한 것들이 모두 그녀에게 귀착된다. 수인 대신 지환과 어색한 연애를 하고 양말을 빨아주며 지환 대신 사진을 찍는 경희. 시간을 돌려보기 위해 주먹으로 시계를 부수고 바늘을 돌려 보지만, 결국 돌아올 수 없는 수인을 따라 침대 속으로 사라지는 경희. 그녀는 지환을 놓친 채 수인이 되어 거울 속으로 홀로 들어간다.
잃어버린 추억 – 지환
결국 거울 속으로, 동형의 연인으로, 수인과 경희는 사라진다. 대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닌, 고등학교만 졸업한, 미숙한 아이들의 풋사랑 같은 ‘연애’를 선사했던 이 이상한 커플이 사라지면서 지환은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의 사진도, 시간을 뒤로 돌린다는 그의 행동도 결국, 사라지는 연인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연애를 하는 누구에게나 마지막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땐 누구나 자신의 소중했던 삶의 기운 같은 것들을 얼마간은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마치 누가 뜯어먹은 것처럼.
야 니들 맨날 붙어다닐 동안 뭐했냐? 집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그러게. 그 동안 뭐 했던 걸까? 그 동안 뭐 했던 거지 우리?
학비를 벌기 위해 항상 아르바이트를 하는 현실의 지환. 그는 지금 택시 운전기사이지만, 피곤하고 더부룩한 행색을 하고 있으면서도 짝사랑에 빠진 여동생을 챙겨주는 자상한 오빠이기도 하다. 5년 만에 찾아간 까페의 선배는 말한다.
하긴 뭐 사진이 니 등록금 대신 내주는 것도 아니니까. 근데 너 그거 아냐? 나는 니 사진도 좋았지만 사진 찍을 때 니 모습이 더 좋았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지환. 그는 그렇게 나이를 먹어간다.
처음엔 말야, 시간이 흐른다는 게 나한텐 그 애들이 생각나는 게 하루에 백 번에서 아흔 아홉 번 다시 아흔 여덟 번, 아흔 일곱 번, 그러다 자꾸 숫자를 잊어버리게 되다가, 갑자기 머리 색갈이 검정색이었는지, 갈색이었는지, 잘 생각이 안 나서, 내가 정말 좋아하기나 했던 걸까? 우리가 정말 만나기나 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였어.
다시 움직이는 – 연애소설의 유산
어쩌면 너무나도 순수해서 동화 속 인물과도 같은 이 영화의 세 사람이 진정으로 빛나는 지점은 그런 모습들을 받아들이는 그들 자신과 또 주변의 따스한 세상 속에서 인 듯 하다. 경희를 생각하는 수인의 배려와 수인을 생각하는 경희의 마음, 그리고 두 사람을 아끼는 지환의 자상함 같은 것은, 때로는 너무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한 번도 그렇게 착해 본 적이 없었던 어떤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희망 같은 것을 남겨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마음은 영화 전체로 퍼져나가 지환이 돕는 카페의 선배 형과 수인의 아빠, 그리고 수인과 경희를 시기하지 않고 동정해주는 여고 동창들, 강아지가 된 지환이와 뛰어 노는 시골의 아이들, 지환의 여동생과 그녀가 사랑하는 책방 청년, 그리고 경희를 사랑하게 되는 우편 배달부로, 영화의 모든 인물들에게로 조금씩 퍼져나간다. 마치 한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공유하게 되듯 그들도 무언가를 나누어, 잊혀졌던 연인들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난 그녀를 사랑한다. 보낼 수도 없는 편지를 쌓아두고 있는 그녀를 이해할 순 없지만, 어찌됐든 난 우편배달부이다.
이 영화의 실질적인 소설가 역할을 하게 되는 우편배달부. 그가 사랑하는 특별한 방식은 감추어둔 그녀의 사진들을 수신인에게 보내주는 것이다. 한때 세 주인공이 함께 보았던 영화 속의 우편 배달부가 결국 시인이 되듯, 그도 나름대로 무언가를 해낸다. 지환의 유산이었던 사진이 그에게 다시 돌아가면서 이 영화는 시작했고, 사진들을 받아보며 기억도 되찾아가는 5년 후의 지환은 동생의 사진을 찍어 보내 주는 또 다른 우체부 역할을 하게 되며, 마지막엔 결국 그 사진들을 따라 수인을 되찾게 된다.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 전 경희가 수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수인의 얼굴을 만져보는 지환. 그리고 지환을 통해 잃어버린 경희의 손길을 느끼고 손을 뻗어보는 수인. 잃어버렸던 사랑이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두 사람은 재회한다.
*연애소설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l7vIvoez4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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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마지막 단락에서는 경희와 수인의 이름을 바꾸어, 그들의 원래 이름을 돌려줘 보았다.
이 글에서 굳이 지환과 재회한 수인(경희)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우선 그것이 영화 밖의 이야기 이기도 하거니와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수인과 경희의 캐릭터 설정상 꼭 필요한 내용이며, 감정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감독이 원하는 것은 마지막에 경희의 죽음을 보여주는 슬픔이 아니라, 그 짧은 재회의 시간으로 연애를 통한 상실을 경험했던 지환으로 하여금 경희와 수인이 못 이루어준 사랑을 되찾게 해 주는 것이라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세 인물을 통한 특별한 관계 형성에 성공하고, 그것을 영화 속의 영화 (일 포스티노), 다시 세 인물 밖의 인물들 (지환의 동생과 책방 청년, 그리고 우편 배달부)로 확장시키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연애는 첫 사랑 정도의 순수한 분위기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연애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정도의 운명적인 성격도 띠는데, 이것이 두 여자 주인공의 특이한 배경과 관계, 그리고 캐릭터를 통해 무리함이 없이 오히려 더욱 설득력 있고, 또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특별하게 사용되는 수인이 제안하는 두 가지 놀이는, 지환이 제안하는 사진 찍기나 시간 돌리기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사진이나 시간 돌리기는 결과를 외면하거나, 모르거나, 혹은, 다르게 해석하고 싶은, 실질적인 힘은 없는 눈속임이나 위로의 성격을 지니는 데 비해, 수인의 놀이들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희와 수인의 이름이 바뀐다는 사실은, 놀이로 시작했다 해도, 두 사람에게 매우 매우 중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두 가지 면모를 모두 따뜻한 시각으로 다루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연애를 하는 세 사람 모두 자신들의 굴레에서 벗어나 잠깐이나마 삶을 행복하게 즐기게 된다. 환상적인 연인의 역할을 하는 수인-경희 (그들은 ‘일생 동안 한 번 밖에 사랑 할 수 없는 심장을 가졌다’ 라는 꿈 점 결과가 나온다)와 현실의 연인 역할을 하는 다른 사람들 (특히 지환의 경우 ‘우유부단’한 연인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모두를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맘에 들었다.
또 한가지 주목했던 점은 수인이 제안하는 놀이들과 지환이 알려 주는 사진이나 시간 돌리기 같은 것들을 결국 물려받는 사람이 경희라는 점이었다. 어릴 적 수인이 내다보는 창 밖에서 그 안 (수인의 세상) 으로 갑자기 뛰어들어오는 경희는 수인에게는 창문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경희는 수인을 대신한다 - 그렇게 수인은 경희를 사랑한다) 반면 수인을 감싸고 있는 경희의 세상에 갑자기 뛰어드는 지환이 하는 행동들이 경희를 다시 바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지환은 경희를 사랑한다 - 그렇게 경희는 지환을 사랑한다) 경희는 지환과 수인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을 선물 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5년 후에는 지환에게 사진을 돌려보내기 시작한다 (물론 실제로 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편배달부-소설가 의 개입이 매우 중요해 진다). 지환이 도착했을 때, 경희의 얼굴을 만져보는 그의 행동은 지환에게 남긴 수인의 유산이기도 하며, 경희는 이에 화답함으로써, 수인과 지환 모두의 마음에 응답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순환은 완성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도를 넘지 않는 현실적인 에피소드들의 활용도 좋다. 어쩐지 비현실적이거나 동화적일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에는 비현실적이거나, 진부한 내용은 전혀 없다. 가령 이 영화와 비슷한 구도를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영화 ‘클래식’에서 중요한 반디 에피소드는 CG이며 완전히 작위적인데 비해 (반디를 병 속에 넣고 가을까지 집안에서 키운다는 설정은 단순히 말이 안 된다) 이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반딧불을 지환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등장한다. 또, 일반적으로는 싸움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 멋진 남자 장면도 이 영화에서는 멋지게 변형된다. 발 좀 치워 주세요. 제 친구가 불편해 합니다. (근데 사실 이 장면에서는 그 깡패 아저씨들이 ‘일 포스티노’를 같이 본다는 것이 더욱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영문과 학생이지만 택시기사이기도 한 허름하고 헌신적인 지환이라는 캐릭터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다른 영화에서와 같이 영문학 강사가 되거나 하는 영문과 남학생은 정말 많지 않다), 또 무척 닮고 싶어지는 용감하고 자상한 인물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는 헤어지는 순간에도 상대방을 배려한다. 나도 이제 너희들 불편해. 말 다했으면 가. 늦었어. 이 영화에서도, 모든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역시 주인공 세 사람의 연기는 잊을 수 없을 듯 하다.
감독은 코멘터리를 통해 수인과 경희의 관계를 동성애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성애, 레즈비언과는 거의 무관한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면 여중-고생들이 느낄만한 동성에 대한 동경과도 비슷한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상상적인 것 이상을 넘어 필연적이며, 또 두 사람을 규정하는 운명적인 양상을 띠게 되므로 같다고는 볼 수 없다. 여중-고생들의 동경의 감성은 ‘뜨거운 것이 좋아’의 강희와 친구나, '여고괴담' 시리즈2-5편의 여학생들의 유대감 같은 데서 잘 표출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단, 강희의 경우, 아주 잠깐이나마 동성애를 체험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다.
특이한 삼각관계를 다루는 또 다른 기억할만한 영화로는 ‘클래식’이 있다. 클래식에 등장하는 두 개의 삼각관계 (어머니-연인-아버지)/(딸-친구-선배) 중 딸의 삼각관계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어머니의 삼각관계는 매우 특이한 경우가 되는데, 그것은 연인과 아버지의 각별한 관계에서 기인한다.
삼각관계에 관한 영화는 (당연히) 무수히 많다. 영화사의 고전으로는 역시 프랑소와 트뤼포의 ‘줄과 짐’이 있는데, 난 왜 이 영화를 아직도 못 보는지 모르겠다.
사랑의 상실과 잊혀지는 추억 같은 문제를 다루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이명세 감독의 ‘엠’이다. (이 영화도 삼각관계를 다룬다) 사실 이 글의 첫 부분은 오히려 그 영화의 마지막에 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엠’에 대해서는 다른 중요한 점들도 많이 있으니까.
사진에 관한 영화도 여럿 있지만 당장 언급할 만한 것으로는 안진우의 ‘오버 더 레인보우’가 있다. 사고에 의해 ‘차단’당한 기억의 미스터리를 사진을 통해 찾아가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결국 두 개의 진실 (사랑하는 사람, 사랑의 상징) 이 드러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링크된 ‘연애소설’의 공식 트레일러는 재밌게도 ‘안녕 U.F.O.!’의 음악을 쓰고 있다. 이은주가 시각 장애인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음악이 매우 좋고, 또 다른, 매우 특별하고 흥미로운 사랑 이야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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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은 ‘연애소설’이다. 왜 그럴까? 영화 속에서 제목이 직접 언급되는 것은 지환의 동생을 통해서이다. 책방 청년이 연애소설과 시집들만 빌려준다고. 위 글에서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우편배달부라고 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가령, 소설을 쓰는 사람은 지환이 될 수도 있고, 경희가 될 수도 있다. 혹은 미리 포석을 깔아놓는 수인일 수도 있고, 영화를 만든 감독일 수도 있다. 일 포스티노에서 진짜 시인은 따로 있었듯이 말이다.
가령, 이한 감독의 다음 작품 ‘청춘만화’에는 두 명의 작가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무직자인 아버지와 주인공 ‘지환’이다. 여자 주인공 달래와 두 남자의 삼각관계를 그리는 이 작품은 연애소설이나 클래식의 특별한 관계를 조성해내지 못하고 왠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착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사랑 이야기로 끝나는데, 영화와 관계된 두 직업(지환-액션스타-시나리오 작가, 달래-여자 주인공)에 대한 경도된 애착의 표현, 환상을 넘어 동화가 되는 에피소드들(다람쥐 무덤), 경희-수인이라는 환상적인 커플이 아닌 씩씩하고 건장한 두 남자들의 순진하고 욕망 없는 희생적인 우정만을 강조한 점, 굳이 어떤 관계의 전환을 만들기 위해서 사고를 집어 넣은 것이 오히려 이야기를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흐름을 방해한 듯 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특이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달래와 지환의 아버지들이다. 달래의 아버지는 온 몸이 마비된 환자이며, 지환의 아버지는 무능력자이다. 연애소설의 돌아가신 지환의 아버지와 비슷한 설정일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인의 아버지와는 매우 다른 캐릭터들이기도 한데, 달래 아버지의 경우 연애에서도 매우 소심하고 순수했던 것으로, 지환의 아버지는 지환을 얻으면서 아내를 잃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 두 아버지의 역할은 매우 다른데, 달래와 아버지의 경우, 그 관계는 경희-수인과 비슷한 것이 된다. 움직일 수 없는 달래의 아버지에게 달래는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있지만, 정이 무섭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달래의 마음을 끄집어내는 거울의 역할을 하게 된다.
지환의 아버지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같이 술을 마시던 중, 어머니를 잃고부터 자신도 망가진 것 같다는 말에 ‘그럼 낳질 말지’ 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던 호로자식 지환은 문득 아버지의 희망을 묻게 된다. 아버지도 젊었을 때 하고 싶은 일 하나 정도는 있었을거 아냐.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아버지 진심을.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대신 지환의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데 (하지만 제대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그의 먹튀 전력으로 보아 그 소설도 완성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그 소설 속 외계인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의 진심도 드러난다. 그래서, 사고 이후 지환과 아버지의 대사 또한 힘을 얻게 된다. 아버지, 내 다리 먹었어? 미안하다. 내가 너무 배가 고파서. 청춘만화의 시나리오 작가 지환은 달래와의 연애 이야기를 쓰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 연애 이야기를 안에 담은 지환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된다.
*청춘만화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QAGwqcxF1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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