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2005) 곽경택 - 죽음의 구조
ㄱ. 최명신의 ‘자살’
1. 사디스트적인 자살?
얼마 전 정성일 선생님의 글에서 읽고 불현듯 생각나 찾아본 영화 태풍. 첫째로 알게 된 것은 ‘씬’ 의 본명이 최명식이 아니라 최명신이라는 것.. (ㅡ..ㅡ);;ㅋ
두 번째로 알게 된 것은 내가 그 글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었다. 최명신의 죽음은 사디스트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오독에는 원래 글의 글쓴이의 잘못도 있다. 그는 분명히 최명신의 죽음이 ‘사디스트적인 자살’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단, 어디서 어떻게 오독이 일어났는지 잠깐 짚어보고 본격적인 영화 얘기로 들어가 보자. (정성일의 글은 The King and the Clown 4. 참고평론 – 세상과의 불화, 죽음과 함께 사라지다 – 에 링크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굳이 링크까지 가지 않도록, 필요한 부분을 직접 인용하겠다) 오독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곧 포기하고 (혹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고) 누이를 죽인 다음 죽음을 받아들인다. 갑자기 여기에 공리주의적 차원의 해결이 제시된 것이다. 그때 자살적 몸짓은 갑자기 전체를 위한 희생이 된다. 그러므로 이 몸짓은 사실상 상징적 무효에 해당된다.
글쓴이는 분명 최명신의 ‘포기’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잘못 읽은 것이 확실하다. (죄송합니다 ㅠ..ㅠ) ;;; ) 분석은 이러하다. 그는 사디스트적 복수로 남한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가 원하는 복수란 대상이 불분명한 정치 체제(북한, 중국, 남한, 미국 등)를 향하는데 그것을 가시화 하기 위해 체제와는 무관한 남한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복수는 상징(적 복수인 남한에 대한 복수)를 실재(적 복수인 남한 사람들을 죽이자)로 착각하는 행위가 된다. 다시 확인해보자. 글쓴이가 말하는 복수의 ‘불가능성’이란 ‘계획(테러)’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계획이 성공해도, ‘복수’는 완료될 수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이상한 복수이다. 왜냐하면 이 복수의 불가능성은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기 때문이다. 복수의 대상을 그 대상(의 원인)이 속한 구조 전체에로 확장시킬 때 그 대상(의 원인)은 결국 분단이 되기 때문이다. 혹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 된다. 그런데 분단 그 자체에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최명식은 분단이라는 현실을 한반도의 절반인 남한으로 축소한 다음 그의 가족들이 결코 가지 못한 ‘꿈의 나라’ 남한에 핵 풍선을 날려보내 지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결심한다. 원인이 괄호쳐진 채 대상만이 남을 때, 거기서 만족을 얻고 싶어할 때 이것은 도착적인 기쁨이다. 그 기쁨을 얻기 위하여 고통의 실재에 대해서 상징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명식은 그 상징을 읽지 못한다. 혹은 상징을 실재라고 착각한다. 그러므로 슬프게도 그 복수가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 성공은 하나의 메시지일 뿐이지 그것을 통해서 인과응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명식에게 그것은 자신의 경험적 고통을 형식적으로 갚는 것이며, 그 핵 풍선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상징적 복수에 대해서 개인적 육체의 차원으로 갚는 실재적 재앙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는 비대칭의 사건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명신은 곧 그 복수를 공리주의(다수 – 여기선 남한 사람들)를 위해 포기하고 희생, 자살한다. 그러므로 이때 자살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갑자기’ 그것은 ‘전체를 위한 희생’이 되고, 상징적 복수가 공리주의를 위해 포기되는 순간 ‘상징적 무효’가 된다. 즉, 복수는 사디스트 적인 도착증세를 보였지만, 자살은 공리주의 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글쓴이가 후에 박경원의 죽음과 비교 분석하는 과정에서 최명신의 자살이 ‘사디스트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 문제가 된 부분.
그것이 첫 번째와 다른 이유는 하나가 세상에 대해 사디스트적인 자살이라면 다른 하나는 마조히스트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세상의 법에 대해서 자기를 상징적으로 부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세상과의 계약에 상상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첫 번째’라 함은 최명신의 자살이다. 그리고 글쓴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사디스트적 자살이다. ‘세상의 법에 대해서 자기를 상징적으로 부수는 것’이 바로 사디스트의 자살이다. 반면, 공리주의적 자살이란 세상의 법을 위해서 (상상적으로, 상징적으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자, 이것이 내가 (글쓴이를 따라) 오독한 지점이며, 이유이고, 변명이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ㅠ..ㅠ);;
만약, 글쓴이가 공리주의를 위해 복수를 포기하는 최명신의 자살이 여전히 사디스트 적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때 자살적 몸짓은 갑자기 전체를 위한 희생이 된다.’라고 주장했던 자신의 논리에 위배된다. 게다가 사디스트의 자살이란, 언급했듯이, 절대 전체를 위한 희생 같은 것이 아니다. 사디스트라면 그 누구를 위해서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없어야 한다. 진정한 사디스트의 자살이란, 모든 것이 불가능할 때의 최후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해가 가능한 메시지를 보내는 모든 악인은 이미 사디스트가 아니다. 복수가 포기되는 순간 최명신의 ‘메시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만한 것으로 변환된다. 만약 이 영화가 ‘사디스트의 죽음’을 보여준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진정한 사디스트의 일면을 보여주는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1971)’처럼 사회에 귀속하기를 끝내 거부하고 즐기는 괴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카우보이 비밥: 천국의 문[劇場版 カウボーイビバップ 天国の扉](2001)’의 빈센트처럼 끝까지 가는 행동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빈센트는 계획대로 나노머신을 도시에 퍼뜨린다. 그의 연인일 뿐만 아니라 분신, 혹은 딸일지도 모르는 (그의 피를 받은 여성) 엘렉트라에 의해 죽을 때에도 그가 기억하는 것은 한 여인일 뿐이다. 스파이크는 그가 나약하다고 하며, 영화는 ‘꿈에서 깨어나라’고 반복하지만,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시각이다. 최명신은 그러지 않는다. 글쓴이의 최명신의 자살에 대한 분석은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의문스럽다.
2. 희생양의 엄격성
그럼, 여기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 보자. 공리주의적 자살이란 대체 무엇일까? 혹시 그건 희생양의 또 다른 부류가 아닐까? 하지만, 글쓴이는 최명신의 ‘전체를 위한 희생’은 희생양의 자살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최명식과 박경원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 번째의 자살이 있다. 이것은 희생적인 선택이다. 이때 희생은 가장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을 포기할 만큼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선택 중에서 이 자살적 몸짓은 내가 없어져야만 전체를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이 전체 안에서 오직 나만이 모순의 대상이 될 때 전체는 내게 희생을 요구한다. 그때 나는 사실상 자살에 떠밀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이것은 해결을 숨기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양의 논리이다.
여기서, 글쓴이의 논리는, 최명신의 자살이 ‘엄격’했느냐 하는 것이며, 또 그가 ‘없어져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다. 희생양은 뽑히거나 타살당할 수도 있지만, 이타심을 발휘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그들이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혹은 죽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다른 방도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그들이 잘 알고 있다면,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더해서, 그들의 죽음의 이유가 타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닌 어떤 개인적인 것이어서도 안 된다. 물론 최명신의 자살은, 엄격한 것도, 그가 없어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죽어야 남한 사람들이 사는 그런 관계란 가령 강세종의 입장에서 볼 때, 혹은 법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도, 아니 사실 관객이 보기에도 성립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이미 핵폐기물의 타이머 작동을 포기한 상태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희생양의 자살이 아니다.
글쓴이가 말하는 진짜로 ‘엄격’한, ‘내가 없어져야만’ 하는 그런 자살이 자연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두 가지 경우는 재난과 질병이다. 유명한 뗏목 우화 (이름을 까먹었다) 처럼 한 사람이 죽어야 다른 하나를 살릴 수 있는 경우. 혹은 누군가가 죽어야 다른 이들의 생명이 연장되는 극한 상황 같은 것, 또는, 신탁 같은 것이 있어서, 누군가를 죽여 제를 올려야 하는 경우 같은 것도 포함해 볼 수 있겠다. 여기서 희생양이 되기를 자청하는 이야 말로 글쓴이가 말하는 대로 전체를 위해 떠밀려 자살하게 되는 셈이다. (희생양을 ‘뽑는’다면 그건 물론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그리고, 신탁이나 제사의 희생양은 사실 질병과 관련이 깊다. 유명한 예가 바로 오이디푸스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테제는 다름아닌 이것이다. 테베에 역병이 창궐했다. 신탁에 따르면, 역병은 한 사람에 의해 발생했으며, 그를 추방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역병의 원인은 국왕 오이디푸스 자신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무지했던 자신의 눈을 찌른 후, 크레온을 옹립하고 자신을 테베라는 공동체에서 추방한다.
3. 희생양의 대척점 – 역병과 파생 장르
근대 이전에 역병은 죽음의 가장 막강한 사도 역할을 해 왔다. (이에 비하면 전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이디푸스의 역병은 상징적(근친상간)이므로 그가 추방되면 끝나지만, 실제의 역병은 생물학적이므로 인간이 있는 그 어디에서건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역병, 전염병, 바이러스, 원자폭탄(후유증), 고엽제, 오염, 각종 증후군, 신종 감염균, 에이즈, 나노머신, 같은 것들이 각각의 문화에서 같은 의미로 극단적인 악(죽음)의 표지, 대량 살상의 가능성이 된다. 많은 오락 서사는 이런 죽음의 힘을 손아귀에 쥔 악인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전통적인 드라큘라도 이 역병의 분류학에 연관시킬 수 있는데 (예: 베르너 허족의 불길하게 아름다운 ‘노스페라투[Nosferatu : Phantom Der Nacht](1971)’) 이 경우 역병은 미화되어 죽음이 ‘살아나’고, 대량살상 대신, 감염자 모두를 살아있는 죽음의 사도로 만든다. (좀비와 에일리언(숙주) 장르도 비슷하지만, 여기서는 역병이 미화되지 못하고 상상적인 죽음(이미지로서의 부패한 시체)의 현신이 된다) 단, 신세대 흡혈귀 서사는 이와 전혀 다른 문제를 다루는데, 간단히 말해 타자에 관한 문제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신세대 흡혈귀는 무서운 존재라고 오인되는 (그런데 알고 보면 사실일까나..아닐까나..) 타자일 뿐 죽음을 전염시킬 생각이 거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의미의 축소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간 지점에 있는 흡혈귀 장르의 가장 매력적인 작품들이 닐 조던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 Vampire Chronicles] (1994)’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흡혈귀의 본령은 역시 질병의 숙주로써 죽음과 희생자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데에 있으며 (물론 자살이 아니라 타살의 희생양), 그 도착성 (희생자는 흡혈귀로 다시 탄생하며, 흡혈귀의 죽음이 희생자의 구원(진정한 죽음, 안식)이 된다. 즉, 병원균이 사멸해야 모든 이가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도 보인다.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흡혈귀는, 잘 알려져 있듯이, 종교의 패러디이며 (일종의 반기독교집단) 도덕적 반전 (난교), 오염, 병균의 초자연적 미학 (날아다니는 쥐-박쥐, 변신, 괴력, 햇볕, 마늘에 소독된다), 그리고 권위를 가장한 광신(드라큘라의 귀족성)이기 때문에 과학과 이성, 종교와 도덕에 대한 도착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영화 태풍에서 최명신이 남한에 투하하려는 것이 폭탄이 아니라 핵폐기물이라는 것은 일단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비록 영화의 서사에 이렇다 할 궤적을 남기지 못한 채 불발로 끝나지만, 핵폐기물 역시 일종의 바이러스, 세균, 죽음의 저주이며 폭탄과 전쟁이 외부로부터의 폭력이라면 이러한 것들은 체내에 잠입해 괴사시키며 보이지 않는 죽음의 공포를 퍼뜨리는 내부로부터의 오염, 혹은 도착이기 때문이다.
4. 공리주의?
따라서, 비록 마지막에 포기되기는 하지만, 최명신이 남한에 보내려 했던 것은 분명 폭탄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고, 그의 자살은 어쨌거나 남한을 살리고 자신이 죽는다 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살아서 남한과 화해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마저도 누나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다. 마지막에 누나 최명주를 죽이는 것은 그 자신이지만, 그녀는 이미 죽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처음에는 뇌종양, 다음에는 총상) 그가 누나를 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강세종이 그에게 항복(에 의한 생존)을 권할 때 그는 거부한다. 그는 남한과 화해할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풍선에 실린 폭탄의 작동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그는 명백하게 복수도 포기한다. 하지만, 복수를 포기한다고 해서 남한을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마지막 순간에 상징(남한)이 아닌 실재(사람들)를 용서할 뿐이다. 즉, 그는 남한과의 화해는 거절하지만 남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을 맞아 자살하게 된다. 이것이 글쓴이가 말한 ‘공리주의’이다.
하지만, 이 정의에는 문제가 있다. 공리주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희생양과 겹치는 범주가 아닌가? 다시 한번 살펴보자.
말하자면 이 전체 안에서 오직 나만이 모순의 대상이 될 때 전체는 내게 희생을 요구한다. 그때 나는 사실상 자살에 떠밀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이것은 해결을 숨기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양의 논리이다.
여기서 글쓴이가 주목하는 것은 질병, 재난의 희생양이 아니다. 왜냐하면, 질병, 재난의 희생양은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말하는 희생양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기 위해 희생하는 자, 사회정치적 희생양이다. 가령 민주주의 속의 공산주의자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모두가 네 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 라고 하는 자. 또는 사회 전체의 도덕 윤리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자, 또는 사회의 법적 정의를 파괴하는 자, 국가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자, 등등.
문제는 이러한 사회정치적 악인들이 희생양이 될 때 그들의 죽음이 ‘엄격’하고 그들이 ‘없어져야만’하냐는 것이다. 민주주의 속의 공산주의자가 사라진다면 그의 신념도 사라지고 그가 보았던 사회의 문제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실종이 ‘엄격’한 것인가? 그가 꼭 ‘없어져야만’ 했을까? 글쓴이의 희생양의 논리는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글쓴이가 제시하는 희생양의 원리가 사회정치적 공간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적 공간에는 엄격함, 내가 없어져야 그가 사는 ‘엄격하게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녹색 인용부분의 논리는 완전하지 못하다. 글쓴이는 범주를 다시 짜야만 한다. 그가 제시하는 ‘엄격한’ 희생양은 사회정치의 장을 제외해야 하거나, 또는 그가 말하는 엄격하지 못한 ‘공리주의’와 교접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공리주의란 다수에 의해 떠밀려, 다수의 통일성과 이득을 도모하기 위해 작동되는 원칙이다. 그리고, 이 때 ‘다수’란 많은 부분에서 사회정치적 장과 일치하게 된다. 만약, 최명신의 죽음이 공리주의라면, 그의 죽음은 또한 희생양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는 남한 사회에서 어차피 격리(실종)되어야 하는 위험인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명신이 격리(수감)될까봐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끝낼 수 없는 개인적인 복수와 죄없는 남한 사람들 사이에서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자살을 택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공리주의적 자살이며 희생양적인 최후이다.
5. 애증의 자살
최명신의 자살은 분열적이다. 상징과 실재가 분리되면서 사실상 그의 분노가 표출될 대상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분열적 갈등의 예는 무수히 많다. 부패한 정권에 대항해서 싸우려 하지만, 막상 그 앞잡이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경찰들은 명령을 따르는 것 말고는 죄가 없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글쓴이도 최명신의 복수는 박-을 죽이는 것으로 끝났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물론 박-역시 일개 힘없는 하수인에 불과해서, 그를 죽인들 뭐가 크게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최명신은 분명히 풍선들을 날리려 한다. (영화는 배의 해치가 작동하지 않아서 다섯 개만 날아간다고 쩨쩨하게 타협을 본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폭발 버튼은 누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성일 선생님의 글은 정확히 옳은 결론에 다다르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 그 글은 이렇게 정정되어야 한다. 최명신의 복수는 사디스트적이지만, 그의 자살은 분열적이다. 그의 자살은 공리주의적이지만, 희생양적이기도 하다. 또, 그의 자살은 상징적인 파괴(왜 죽었는지 이해 못하는 죽음)가 아니며 산 자를 향한 메시지로 변한다. 관객은 최명신의 죽음 앞에서 의문을 갖게 되거나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한 넘쳐나는 분노들로 보아 거기에도 실패한 것 같지만..ㅜ..ㅠ) 영화 속 강세종이 완성하는 서사는 그것을 입증한다. 그는 이렇게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최명신이 띄운, 그러나 터뜨리지는 않은 풍선들이 남한 사람들에게 ‘결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마지막 바램’이었을 거라고. 강세종의 일관된 서사는 남한에서 띄운 풍선에 의해 날아온 삐라로 시작해서 최명신이 돌려보내는 풍선으로 끝난다. 태풍의 서사는 감동적이며 멜로드라마틱하다.
6. 고향(조국)과 가족
이제 마지막으로 공리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태풍과 비교될만한 서사를 지닌 영화 카우보이 비밥을 다시 소환해보자. 비밥에서 빈센트의 행동은 정신분열적이기는 해도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다. 그는 자신의 꿈(타이탄에서의 악몽의 경험)과 현실(화성의 거대 도시와 제약회사가 지배하는 삶의 구조)를 명백히 대칭적인 것으로 놓고, 그 중 하나(자신의 꿈)를 선택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빈센트의 이야기에는 희생도 공리주의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자살을 택하는 이유는 오직 엘렉트라 때문이다.
엘렉트라를 기억하는 순간 그의 꿈(악몽)은 꿈 속의 빛의 나비들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데, 그로써 그는 안식으로서의 죽음의 의미(자신의 존재 증명으로서의 추억)를 획득하고, 그것을 택하게 된다. 빈센트의 죽음에는 ‘기니 피그(실험양)를 기억해 달라’라는 메시지 따위는 없다. 물론 그가 세상을 파괴하려 할 때에도 그런 메시지 따위는 염두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으로 남는다.
비밥의 서사는 다층적이어서, 빈센트는 사실상 두 가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두 개의 다른 선택을 놓고 도박을 하는 셈이다. 하나는 꿈과 실재, 또 하나는 자신(현실)을 죽임과 타자(엘렉트라, 추억)를 죽임.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그는 꿈을, 그리고, 자신을 죽임을 택한다. 스파이크는 빈센트와 비슷한 인간임에도 그의 죽음에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게 된다. 그는 같은 구조틀 위에 존재하지만, 빈센트와 다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스파이크의 선택은 티비 시리즈와는 약간 다르다.)
두 개의 다른 층위는 교차한다. 엘렉트라의 개입은 빈센트로 하여금 악몽(세상의 멸망 속에 홀로 살아남는 것)과 현실(세상 속에서 악으로 살아남는 혹은 죽는 것)의 이분법에서 나와서 자신을 발견하게 만들어 준다. 그의 자살은, 스파이크가 말하는 대로 그것은 나약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타인과는 무관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스파이크-엘렉트라-빈센트의 관계를 강세종-최명주-최명신과 병치해 볼 수 있다. 일단 스파이크-강세종은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 엘렉트라-최명주의 경우 엘렉트라는 빈센트의 선택과 무관하게 살아남을 것(세상이 파괴돼도 그녀는 살아남는다)이며 살아남는다. (빈센트는 그녀를 기억하고 자살한다). 최명주는 최명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죽을 것이며, 최명신에 의해 죽는다. 엘렉트라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빈센트는 자살하고, 스파이크는 빈센트의 나약함을 생각하며, 영화 카우보이 비밥의 궁극적인 의미(그것은 일종의 ‘리얼 포크 블루스’이다)도 획득된다.
반면, 최명주가 죽고 나자 강세종은 최명신의 죽음에서 나약함을 발견할 수가 없게 된다. 누나의 죽음은 동생에게 어떤 다른 선택의 가능성도 남겨주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 태풍이 ‘혈연’의 서사를 이루는 일차원적인 근친상간에 가까운 동질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강세종은 부모님과, 최명신은 최명주와, 그의 친구들은 또 그들의 누이들과, 심지어 러시아 암매상은 체르노빌에서 죽은 동생과, 연결되며, 이 혈연은 동료애로 확장되어 강세종은 해병대 동기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 아버지 ‘조국’과, 최명식은 그의 (태국) 친구들과 끝없는 로망스를 갈구한다. 그래서, 그는 사기꾼이며 원수이지만 형제 (한 핏줄)이기도 했던 남한에 대한 ‘복수’에 더욱 더 눈 먼 지도 모른다. (그는 가장 ‘좆 같은 것’이 강세종과 자신이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이것이 태풍의 비현실적으로 낭만적이며 일관되게 동형적인 멜로의 세계를 꽉꽉 채워준다.
그렇다면, 최명신의 자살은 어째서 공리주의적일까? 그가 자살하는 것은 남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 오히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목숨걸고 지켜야 할 것(혈연, 가족, 친구들)이 모두 사라져버려서가 아닌가? 우리는 강세종이 상상하는 최명신의 메시지와 눌러지지 않은 폭탄의 단추, 최명신이 죽어서 누나와 해후하는 환상을 같이 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영화는 나름의 정답을 제시한다.
미운 건 미워도 우리 고향이 거기 있지를 않슴매?
우리 그 동안 너무 힘들었질 않소. 이젠 나하고 식구들이 다 있는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기요.
결국, 태풍은 친구와 가족, 그리고 조국과 분단에 관한 영화이며, 최명신을 자살로 몰고가는 모순이란 바로 그 조국(고향)에 의해 버려진 가족이었다. 가족과 조국이 대치한 모순의 상태(분단)에서 영화는 한 형제 한 핏줄이라는 개념으로 그 모순을 뒤덮으려 한다. (강세종이 이해하는 메시지, 혹은 환상 속의 최명주가 말하는 고향) 최명신은 끝내 고향을 버리고 가족을 택한다. 하지만, 그는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포기한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강세종이 염원하는 메시지로 끝나게 된다.
결국,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는 하지도 못하고 끝나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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