切腹 [Harakiri, Seppuku] (1962) by 小林正樹
1. 영광의 하라키리
1630년, 도쿠카와 시대가 시작한지 30여년, 한 늙은 낭인이 에도의 명문 이이 가문의 저택으로 찾아온다. 히로시마의 몰락한 한 가문의 상급 무사였던 그가 원하는 것은 하라키리[腹切り: 일본 무사도의 할복자살]. 주군의 가문이 몰락한 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에도에 올라왔건만, 시대가 태평한지라 넘쳐나는 낭인들에겐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고, 곤궁과 허기 속에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사무라이다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니, 이이가에서 하라키리를 시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이가의 참모장은 그를 불러 이야기를 하나 해준다.
2. 참모장의 이야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젊은 낭인 치지와 모토메. 우연찮게도 그는 늙은 낭인과 같은 가문 출신이며, 늙은 낭인과 같은 의도로 이이가를 찾아와, 늙은 낭인과 같은 이유로 하라키리를 허락받고자 했다. (‘주군의 가문이 몰락한 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라며 참모장의 이야기 속에서 둘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에도에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낭인들이 여럿 있었으니, 그 이유는 몇 년 전 한 낭인이 한 명문가에 하라키리를 하고자 찾아갔다가 그 기개에 감탄한 가문의 수장이 그를 고용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낭인들은 너나할것없이 이를 모방해 겉으로만 하라키리를 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의도를 가지고 명문가들을 찾아가니, 새로운 골칫거리가 된 이들을 보통은 돈 몇 푼 주고 쫓아버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검도와 무력으로 명성을 얻은 이이가에서는 더 이상 이런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으니, 가문의 혈기왕성한 상급무사 세 사람이 이 같은 수치와 타락을 이이 가문에서도 수렴할 수는 없다고 분연히 일어선다. 그들의 주장과 계략으로, 이이가는 치지와에게 가문의 무사들이 모두 참관하는 가운데 영예로운 하라키리를 시행할 수 있도록 허락, 혹은 강요하는데…
3. 치지와의 검
당장 하라키리를 시행하라는 명에 치지와는 갑자기 말을 바꾸어 하루나 이틀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무사의 말은 돌이킬 수 없는 법. 그는 곧바로 은밀한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그의 검을 검사한 세 명의 무사들은 그가 진검이 아닌 대나무로 만든 목검을 차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당초 치지와는 하라키리를 하러 온 것이 아닌 게 명백해졌다. 세 명의 무사가 내놓은 계략, 혹은 모욕이란, 이런 치지와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하라키리를 시행하도록 압박하는 것. 즉, 낭인 자신의 검으로 확실하게 개복을 해야 목을 치겠다는 것이다.
할복이란, 원래 자결자가 단검으로 자신의 배를 가로 그어 개복한 후에 보조자가 대검으로 목을 치는 것인데, 근래에는 할복 자체도 드물거니와 할복의 행태도 변해 용기 있게 개복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세태에 반하고자 이이가는 치지와의 모든 요청을 묵살하고, 그가 자신의 목검으로 개복하도록 압박한다. 결국 치지와는 ‘두부도 벨 수 없는’ 자신의 목검을 땅에 대고 그 위에 엎어지기까지 하지만, 보조자는 확실하게 개복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목을 치지 않고, 그는 수치와 불명예, 모멸과 조롱 속에 혀를 깨물어 자결한다.
4. ‘하라키리’
고바야시 마사키의 1962년작 ‘하라키리[切腹: Harakiri(Seppuku)]’는 일본 시대극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며 종종 사무라이 영화의 최고봉으로까지 평가받지만, 의도적으로 찬바라 (검술극) 장르의 기술을 숨기는 작품이다. 반권위, 반전, 그리고 자신이 주장하는 ‘휴머니즘’ 영화의 대가인 고바야시의 카메라는, 찬바라에 혁신을 가져온 구로자와 아키라나 오카모토 키하치와는 정 반대로, 때로 전투장면을 갑자기 삭제하거나 아예 다른 곳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는 단순히 감독의 의지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괴물이 되어버리는 늙은 낭인을 검술의 명문 이이가에서는 불명예스럽게도 총으로 사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늙은 낭인, 츠구모 한시로,는 마지막에 이이가의 무사 전원과 싸우며 가택의 공적 영역인 안마당을 피로 물들인 후 건물 안으로 난입해 살아있는 주군의 대리와도 같은 어느 상급 무사의 방에서 난동을 피우고, 마지막으로 가문의 권위와 무력의 상징인 붉은 갑주가 놓여있는 가옥의 중심까지 침범하여 갑주를 부순 후에 장총 사수들이 나타난 후에야 자신의 단검으로 그 자리에서 개복한다. 이이가는 그러한 완력과 무술, 그리고 명예를 행하는 그를 도와주지 못한다. 이이가가 그를 도울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통제불능의 상태를 조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츠구모 한시로는 이이가가 자신의 하라키리에 영광을 부여할 수 있는 어떠한 기회나 조건도 허락하지 않는다.
명배우 나카다이 테츠야가 연기하는 츠구모 한시로는 미쿠니 렌타로가 연기하는 참모장과 함께 이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두 축이며, 두 사람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히 범접하기 힘든 카리즈마를 조성한다. ‘하라키리’는 이 두 사람, 몰락한 대가의 늙은 낭인과 권력의 행정력을 상징하는 가문의 참모장의 대결 속에서 무엇이 명예이며 어떤 행동이 의미있는 지를 묻는 영화이다.
5. 츠구모 한시로
전후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신극단 출신의 나카다이 테츠야는 미후네 도시로와 함께 구로자와 아키라가 키워낸 명배우이지만, 그를 처음으로 주연 발탁하고 동반자적 페르소나로 삼은 것은 바로 6부작 (실제로는 세 편) 영화 ‘인간조건[人間の條件: The Human Condition]’의 감독인 고바야시 마사키였다. 그는 미후네같은 세계적인 스타가 되지도 않았지만, 미후네같이 권위적인 마초이미지, 혹은 다른 어떤 이미지로 고정되지도 않았다. 데뷔 후 몇 년 안에 그는 오즈 야스지로같이 확고한 자신의 시스템을 갖춘 감독들을 제외한 일본 대부분의 거장들의 작품에서 다양하고 비중있는 인물들을 성공적으로 연기해내어 전성기 일본 영화의 역동성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고, 이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하는 츠구모 한시로는 필요에 의해 교활하고 의뭉스러운 인물이면서도, 무사로서 명예롭고 긍지를 지녔으며,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도,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하고 인정 넘치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벌이는 일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 그는 참모장의 이야기를 포함한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자신이 순순히 하라키리를 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지만,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하고 덤덤하게 ‘이것(그는 손으로 배를 가르는 시늉을 한다) 말이오?’를 되풀이하며 신뢰를 얻는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듯이, 모든 것은 그에 의해 사전 계획되고 통제되었다. 치지와의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조장하고 (참모장은 자기 의지만이 아니라, 츠구모의 요청에 의해 이야기를 해준다), 자신의 할복 보조자 문제를 부각시켜 스스로 이야기를 할 시간을 벌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이이가가 자신의 하라키리를 행하기에 적절한 정도로 명예로운 가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들어’낸다.
6. 사실은 항상 조작된다
어떻게 사실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만들어’지는가? 만들어지는 것은 이이가의 불명예이다. 충분히 명예로운 이이가는 그의 조작에 의해 갑자기 그 명예를 박탈당한다. 어떻게 그것을 조작해내는가? 치지와에게 이이가가 그렇게 했듯이 권위와 명예의 코드를 통해서이다. 그는 사무라이의 코드들을 치지와보다 훨씬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용해서 치지와의 명예를 박탈한 이이가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불명예를 ‘만들어서’ 되돌려준다. 코드의 엄정함이란, 일상에서는 편의를 위해 무시할 수 있을지언정, 갑자기 그것을 드러내고 요구함으로써 가장 평범한 일상의 편의도 수치로 가득한 불명예 인양 조작해 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것이다. 따라서, 사무라이 코드에 맞추어 일말의 하자없이 치지와를 자살로 몰고 간 이이가의 모든 정당한 절차들이, 츠구모에 의해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전혀 양심적이지 않은, 비열한 술수였던 것으로 재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이가의 모든 무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하라키리를 보조할 수 없는 상황으로 끝까지 몰고감으로써, 이이가의 명예를 박살내버린다.
7. 사회극 혹은 복수극
하지만, 감독인 고바야시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 영화에서 ‘복수’라는 주제를 언급하지 않듯이, 이 영화는 복수극이 아니다. 츠구모 한시로가 수행하는 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며,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사람이나 죽이고 한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기 위해 이이가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누차 말하듯이, 진심으로 할복하기를 원하기에 이이가를 찾아온 것이다. 동기와 사건은 복수극의 조건을 충족하지만, 영화 ‘하라키리’가 ‘만들어’내는 사실은 사회 전체와 코드 자체의 불명예이다. 심지어 그것은 츠구모에 의해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파괴되어 있고, 츠구모가 박살내는 것은 결국 이이가가 아니라 가문의 갑주, 그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츠구모가 말하듯이, 그것은 이미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다.
츠구모는 이이가를 대표하는 세 무사의 뛰어난 검술도 실전에서 검증되지 않은 이상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 이상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가 오랜 경험 끝에 무사도에서 보는 것도 그와 비슷한 사실이다. 가난한 일상을 살아보지 않은 이상주의자가 가장 편협하고 비인간적일 수 있는 것처럼 검증되지 않은 무사도 역시 기껏해야 악의로 이용될 수 밖에 없는 요란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참모장은 그의 불운을 의도적으로 조롱하거나 무시하지만, 츠구모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상이 아닌 실재를 꿰뚫어 보게 되었고, 츠구모가 밀어붙여 참모장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불운의 의미이며, 그 속에서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무사도의 의미 없음이다.
따라서, 이야기는 갈등과 계략으로 가득하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밝혀진다. 치지와의 요청도, 세 무사의 잔인함도, 참모장의 비웃음도,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만들어내는 츠구모의 교만함도, 코드에 따르자면, 불명예스러울 것이 없었던 것이 드러난다.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 모두 최대한 명예롭게, 혹은, 적어도 명예로운 이상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드러낸다. 하지만, 보는 각도를 살짝 비트는 순간 모든 사실은 조작되고, 그것이 불명예와 비웃음의 칼날으로 그들의 행동 자체를 재조명하기 위해 되돌아온다. 치지와는 돌이킬 수 없이 수치스러운 행동을 했고, 세 무사는 비열하며, 참모장은 편의주의로 가득하고, 츠구모는 교활하다. 시행하는 하수인, 대리자, 수행자는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도, 조작하는 힘과 도구와 이유는 사회 전체에 있다. 그리고 그 사회는 구체성을 상실해버린 텅 빈 표면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라키리는 뛰어난 사회극, 혹은 고전 그리스 비극과 유사한 영웅 이야기가 된다.
8. 그리스 비극
칸에서 누군가가 이 영화가 그리스 비극 같다고 했을 때 고바야시 감독은 작품의 미술적인 측면을 언급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기뻐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감독이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에 의한 오해라고 생각된다.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어떤 미술적인 요소가 아니라 영웅들이 파멸하고 복권되는 과정을 서사하는 방식, 혹은 그 구조의 특이성에 있기 때문이며, ‘하라키리’가 바로 그러한 특성을 공유하는 몇 안 되는 영화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인물이 바로 미쿠니 렌타로가 연기하는 참모장이다.
미쿠니는 그 표정만으로도, 귀찮은 일이라도 최대한 명예롭게 수행하고 인정보다도 규칙을 엄중히 여기는, 다분히 관료주의에 물든 참모장의 역할을 뛰어나게 소화해 낸다. 참모장은 처음에는 츠구모를 설득해 돌려보내려 하고, 다음에는 그의 명예에 부합하는 대우를 해주기 위해 노력하며, 츠구모가 끝없이 이야기를 지껄일 때에는 그를 경멸하고 조롱하지만, 점차 그 이야기 속의 칼날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정도의 날카로움으로 자기 가문의 명예를 베어오기 시작할 때에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끝까지 원칙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와 맞서게 되는 인물이다.
‘하라키리’는 츠구모와 참모장, 두 인물이 이렇게 각자 가장 신실한 방식으로 사회와 가치 전체를 존재 유무를 두고 대결한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과 구조적 동일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의 영웅과 그 영웅에 대결하는 자의 오만은 스스로의 능력과 교만에 의해서 월등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시대와 가치를 대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감상할 때 단순히 영웅이 반영웅과 싸우는 이야기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안티고네와 맞서는 크레온은 빛나는 안티고네라는 영웅에 맞서서 어쨌거나 죽음으로까지 몰고가는 막강한 힘으로 묘사된다. 그는 타협이나 인정이 전혀 통하지 않는 냉정한 원칙주의자이지만 훌륭한 왕이며, 안티고네가 죽은 후에는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멸해 버림으로써 인간성을 획득하는 인물이다. 반면 참모장은 크레온같이 권위주의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츠구모에 대결하면서 자신의 권위와 비어있는 무사도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재구축해 나간다.
그는 사회와 가치 전반의 의미를 결국 상실하게 되지만, 크레온과는 달리 무너지지않고 살아남으며, 놀랍게도 그 모든 빈껍데기를 끝까지 지켜낼 뿐만 아니라 다시 한번 모든 사실을 재조작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을 은폐하고 무로 돌린다. 불명예스러운 사건은 영광스러운 하라키리의 시행으로 각색되고, 무력충돌은 질병으로 대체된다. 이 과정에서 가문의 추문을 은폐하기 위해 모든 사실은 조작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참모장의 그 어떤 행동도 불명예스럽거나 비굴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일반적인 리얼리즘, 혹은 음모론에 관한 영화들과는 다른 부분이다) 오히려 그는 츠구모의 행동의 의도를 마침내 이해하고 그에 걸맞는 가장 명예로운 대우를 해줌으로써 사무라이 시대극의 효율적인 가신의 전형을 능가하는 통찰력있고 무게있는 인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의 조작을 통해서 만이 츠구모는 자신의 영광, 사무라이로서의 명예로운 하라키리를 행한 것으로 ‘복권’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직 참모장만이 츠구모 한시로를 영웅으로 만들어낸다. 마치 크레온이 다른 방식으로 안티고네를 영웅으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때 참모장이 츠구모에게 동정을 느끼거나 그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설득당한 것은 분명 아니다. 또, 그가 사건을 은폐하는 이유 역시 명백히 자기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는 츠구모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하라키리에 의미를 부여하며, 동시에 츠구모가 본 대로 그것의 의미없음을 꿰뚫어보게 된다. 영화 초반 가문의 갑주 앞에서 공정함을 기원하던 그의 믿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예로운 하라키리의 원칙을 지켜 수치를 행한 무사들에게 자결을 명한다. 자신의 신념이 깨져버린 지금, 그는 무엇을 지키려 하는 것인가? 그렇게 이 영화는 결국 ‘하라키리’, 셋푸쿠 , 혹은 ‘할복’으로 되돌아온다.
9. 길고 지루한 우회로: 사실의 시간성
이제 ‘하라키리’의 마지막 의미를 다루기 전에 또 다른 복귀를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불명예스럽게 목검을 든 채 혀를 깨물고 죽은 젊은 무사 치지와 모토메의 복권에 관한 것이다.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 되는 이 사건은 츠구모의 길고 긴 이야기 속에서는 허무한 결말에 불과하다 (츠구모의 긴 이야기는 영화로 직접 들어보시기를 바란다).
결국 이 영화는 치지와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대한 참모장의 짧고 강렬한 이야기와 츠구모의 길고 지루한 이야기의 대결 구조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의 시간차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가령 성공적인 오락영화의 효과적인 서사구조와 현실의 구조의 차이와도 비슷한 것이다. 참모장의 이야기는 그 진실과 거짓의 강렬한 뒤틀림과 명암 속에서 흡인력을 얻는 반면, 츠구모의 이야기는 평탄하고 지지부진하게도 일관성이 있어서 계속 중단되고 방해 받으면서도 결국에는 그 의미를 획득한다. 그 의미란 바로 치지와의 목검과도 같은 것이다. 이이가의 세 무사가 경멸했던 치지와의 목검이 츠구모에게는 평생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는 낭인이 된 순간 이미 무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자신보다 더 중요한 어떤 이상처럼 여기면서 지켜왔다. 반면 치지와는 순전히 필요에 의해 검을 팔아 치운다. 그것은 불명예이지만, 동시에 삶의 증거물이 된다. 목검은 치지와를 수치와 모멸 속의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츠구모에게는 그 죽음과 목검이 오히려 자기 자신의 기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무의미했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세 무사와 참모장과 이이가의 모든 사람들이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목검의 수치스러움은 츠구모의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통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재조명된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 속에서 이 목검의 의미가 현란한 서사 속에서 신속하게 드러났다면 같은 효과를 줄 수 있었을까?
아마 같은 의미를 전달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도는 온전히 관객의 역량과 각자가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 맡겨졌을 것이다. 잘 짜여진 현대 오락영화의 서사와 이미지는 거의 항상 준비된 목표 만을 명중시키고 또 효율적인 구성상 너무 짧은 시간 내에 관통해버리기 때문에 (이것이 상업영화의 치장된 도덕성(사실은 경제성)이다.) 관객들은 대체로 그 의미를 파악하기 보다는 서사와 미장센의 효과 자체에 열광할 수밖에 없고, 의미를 곱씹어보기 보다는 파악하는 자체에 급급하며 감동할 수밖에 없다. 사실, 사무라이의 목검 모티브 자체는 근래 일본의 시대극에서도 빈번하게 반복되는 소재 중 하나이다. 관객들은 감동하지만, 그 감동은 도식적이고, 또 경제적이다. 어두운 영화관을 빠져 나온 우리들은 잠깐이나마 그 느낌, 어떤 다른 사람(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는 듯한 환한 기분, 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바로 다음 순간부터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지루한 일상에는 과연 어떠한 작용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것일까?
츠구모가 시간성을 계속 강조하거나 (몇 년 동안은.. 몇 년에는.. 이런 삶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의 변화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거나 (싸움이나 할 줄 알던 자신이 홀로 자식을 길러내다니.. 이젠 우산 만드는 솜씨도 훌륭하구만.. ) 치지와의 마지막 날을 묘사하면서 한 순간이 영원과 같았다는 식으로 자꾸만 이야기를 늘려나가고, 이야기를 끝마치는 것을 계속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야기의 경제성에 대한 거부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런 방식으로 그가 자신의 이미 충분히 긴 이야기에 자꾸만 부여하려고 노려하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라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성, 시간의 지루한 무게, 혹은 삶의 무거운 실재성, 영화나 이미지나 이야기가 아닌 삶의 ‘시간성’ 이 아닐까?
어쨌건, 그렇게 목검을 찬 치지와는 복권되며, 이상이나 원칙이나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어떤 사람도 그를, 옹호할 수는 없다고 해도, 비난 할 수도 없게 된다.
10. 껍데기로서의 하라키리
이미 언급했듯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소요와 사살은 명예로운 하라키리로 조작된다. 영화는 사건이 있던 날 가문의 평화로운 일지로 시작해서 (한 가신이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선물로 가져왔다..) 사건이 완료되는 공식적 기록 (낭인 츠구모 한시로가 명예롭게 하라키리를 시행했다), 그리고 약간의 뒷이야기(가문의 명예로 치하되었다)로 끝난다. 하라키리와 무사도의 의미는 와해되었지만, 츠구모가 부숴버린 가문의 갑주가 다시 짜깁기되듯 무사도와 명예의 코드는 빈껍데기로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일어선다. 결국 사실은 은폐되는 것일까?
이 특별한 영화의 마지막에서 껍데기의 부활은 그렇게 부정적이지 만은 않아 보인다. 사실 영화 자체는 가문의 공식적인 기록을 읽는 것 외에 다른 어떤 해석이나 의미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가문이 수치스럽게도 장총 사수들을 투입하는 순간 갑자기 칼을 거둬 하라키리를 주저없이 시행해버리는 츠구모의 마지막과, 그 마지막에 갑자기 장면을 바꿔 텅 빈 방에서 허무한 표정으로 사격소리를 듣는 참모장을 교차해서 보여줌으로써 두 사람이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츠구모는 무사도의 빈 껍데기를 꿰뚫어보았지만, 그것을 버리지 않았고, 참모장은 그 빈 껍데기를 짜깁기해서 단순히 봉인한 것이 아니라, 그 만들어진 껍데기를 통해 츠구모의 명예를 복권시킨다. 마지막에 참모장이 살아남은 두 무사에게 하라키리를 명하(고 병사로 조작하)는 것은 그가 가문의 수치를 명예롭게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입막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굉장히 순정주의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한 사람은 부수고 다른 사람은 조각들을 다시 맞추어 이어 붙이지만, 하라키리의 의미는 결국 끝까지 변치 않고 살아남는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서 하라키리는 공허한 이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사도라는 사회적 이상을 뛰어넘는 어떤 개인(들)의 의지의 상징으로 변화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우뚝 서 있는 갑주는 그것이 빈 껍데기에 불과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빈 껍데기가 다시 설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치열한 과정이 그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 전체 이야기로서의 영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11. 여전히,
여전히, 이 영화의 마지막은 입막음과 은폐로 요약될 수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츠구모가 무사도의 허상을 때려부수었을 뿐, 참모장의 행동에는 어떤 명예로움도 없다고, 혹은 가짜인 명예만이 남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식의 이해에 반대해서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규율은 잘못되었으며,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참모장 역시 그 잘못된 지점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츠구모와) 참모장이 (둘 다) 그 잘못된 지점을 자신(들)의 의지로 봉인해서 새롭게 해석해 낸다. 사회적 규율으로서의 무사도가 여전히 비인간적이고 위선적이라면, 이 영화 속의 두 사람은 이 껍데기만의 무사도를 파괴해버리지만 동시에 자신들만의 더 이상적인 윤리로 다시 만들어낸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하라키리는 하나의 사건을 파괴해서 그 부조리를 밝히는 영화가 아니라 파괴된 부조리를 다시 조각조각 이어 붙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영화에 더 가깝다.
물론,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영화의 마지막은 비관적이거나 은폐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시대의식’이라는 고증에 충실한) 시대극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 배경상 도쿠가와 막부는 이제 막 건립된 것이다. 아무리 부패했다고 쳐도 시작하자마자 그 핵심 사상을 파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바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일 지도 모른다. 만약 영화의 배경이 막부 마지막 30여년 이었다면, 좀 더 쉽게, 밝은, 다른 결말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사도가 잘못된 것이라면 왜 그것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사회상 같은 것을 제시하지 않는가? (현대의 대다수의 영화들은 마지막에 이런 ‘희망’어린 휴머니즘이나 새 시대에 대한 기대, 혹은 주인공들의 반시대적인 개인적 각성 따위를 제시하려고 한다.) 반대로 이 영화에서 참모장에 의해 조작된 이야기는 영주에 의해 치하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런 가문은 앞으로도 영원히 번창할 것이다 라는 찬사까지 듣게 된다.
고바야시 감독은 그의 또 하나의 유명한 작품, 만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인간조건[人間の條件: The Human Condition]’ 연작에 대한 인터뷰에서 관객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괴뢰)만주군 역할을 하는 주인공 (나카다이 테츠야가 다시 주인공으로 나온다)을 굳이 죽는 것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그의 죽음이 자신에게는 부활과 같아서 그 죽음을 통해서만이 주인공이 가진 ‘희망’의 상징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각인될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또,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 ‘희망’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성취되거나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러한 불가능성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희망’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불가능성 속의 희망이라는 것은 어떤 눈에 보이는 변화나 가능한 상상 – 현실을 대체하는 미래의 비전 – 이 아닌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갈등을 통해서만 제기될 수 있는 종류의 비전없는 희망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주인공들은 변함없는 현실을 살게 되겠지만, 오직 그 똑같아 보이는 현실의 의미만은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극히 개인적일 수도 있고, 삶의 무게에서만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대체한다는 구실로 장밋빛 망상을 도입하지 않고 우리 의식의 빈껍데기들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계속 다시 정화하고 치열하게 재구성해낼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배경과 참조
1. 영화 ‘하라키리’는 복수라는 이야기 속에서 막부시대의 무사도가 가진 기만성을 폭로하는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도쿠가와 막부 수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세키가하라 전후 30여년, 낭인들이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했던 시점이며, 또한 갓 수립된 막부 정권이 강력한 힘으로 지방의 다이묘들을 통제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쇼군이 중앙집정하는 체제의 막부정권은 많은 문제를 야기하여 쇼군의 변덕으로 인해 다이묘가 축출되거나 하는 상황 또한 빈번했다. 유명한 예로는 염전이라는 재정적 문제로 인해 촉발된 충신장 사건 같은 것이 있고 (지방 가문의 수장으로 하여금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도발 한 후 할복시켜 불명예스럽게 가문을 와해시킨 것에 분노를 느낀 50여명의 낭인들이 몇 년 동안 숨어 지내다 모여 복수를 시행, 몰락한 가문과 주군의 명예를 복권시킨 후 전원 자결한 사건), 이 영화에서도 치지와와 츠구모가 속해있던 다이묘가 축출되는 이유가 비슷하게 사소한 예법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2. 츠구모와 상대하는 대상이 이이가의 주군이 아니라 참모장인 이유는 참모장은 주군과 같은 상징적 존재가 아닌 행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주군의 존재는 계속 각인된다. 1. 참모장은 어린 주군이 잠시 출타 중이라고 치지와와 츠구모에게 각각 설명해준다. 2. 어린 주군 대신 가문의 상징인 앉아있는 갑주가 등장하고, 참모장은 그 앞에서 가문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데, 나중에 츠구모는 그 갑주를 내던져 부숴버린다. 3. 츠구모가 가택으로 난입할 때 첫 번째로 들어가는 방에는 영화 속에서 단 한번 등장하는 어떤 요인이 앉아 있는데, 그는 수많은 사무라이들에 의해 겹겹이 호위되고 있으며, 사무라이들은 동요없이 체계적으로 그를 방어한다.
실재 역사에 기반하거나 영웅으로서의 주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이상, 전성기의 대표적인 일본 시대극에서 주군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가 흔치는 않다. 가령 구로자와 아키라의 ‘산주로[椿三十郎; (Tsubaki) Sanjuro]’나 오카모토 키하치의 ‘키루[キル;Kill]’, ‘사무라이[侍;Samurai Assassin]’ 그리고 시노다 마사히로의 ‘사무라이 스파이[異聞猿飛佐助;Samurai Spy]’같은 작품들이 모두 가문과 개인들의 갈등을 다루지만, 역시 주군이 아닌 참모장이나 시종장, 감독관 같은 인물들만 등장한다.
반면 주군의 위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추신구라(충신장)[ 忠臣蔵;Chuusingura]’ 영화들이나 구로자와의 ‘카게무샤 [影武者; Kagemusha]’같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강력한 상징성을 갖고 있어서, 그들이 가문 전체의 의미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고바야시의 또 다른 시대극인 ‘사무라이 반란[上意討ち 拝領妻始末;Samurai Rebellion]’같은 작품에서는 타락한 군주가 등장한다.
3. 이 영화에 관해 가장 재미있는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는 영화는 바로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키루[生きる: Ikiru]’일 것이다. 구로자와 감독은 잘 알다시피, 오락영화의 대가일 뿐만이 아니라, 도덕 영화의 거장이기도 하다. 전후 일본의 관료주의를 통렬하게 꼬집으면서도 그 ‘관료’가 어떻게 ‘천사’가 될 수 있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구로자와 감독의 삶에 대한 시선은 고바야시 감독의 그것과는 무척이나 다르다. 그것은 삶이 만약 투쟁이라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가 에 관한 감독들의 다른 대답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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