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의 불화, 죽음과 함께 사라지다 <태풍>과 <청연> (정성일, 2006. 1. 19, 씨네21 평론)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36076
2부 <청연>
ㄷ. 박경원의 추락
모드 = 각잡고 써보자!
사디스트적 자살과 마조키스트 적 자살의 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 자살이 보내는 메시지의 차이에 있다. 근본적으로 사디스트의 메시지는 소통하기위해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비웃음이나 조소 같은 것으로 전언, 즉 메시지가 의미체계를 파괴할 때 완성된다. 그 극단적인 예는 바로 사드의 유언에서 나타난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의 무덤을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 옆에 만들되 아무런 표식도 하지 않아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아리랑의 주인공처럼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라는 말인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사드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미를 절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가령 위대한 시인 예이츠(Y.B. Yeats -이니스프리의 호도 라는 시를 쓴 바로 그 사람)는 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 라는 묘비명을 썼고, 셰익스피어는 묘비도 건들지 말고 뼈도 옮기지 말라고, 안그러면 저주 받으리 라고 했으며, 오즈 야스지로는 간단하게 無 라고 썼다. 이건 또 뭔 소리냐.. 미안하다. 딴소리다...오늘 이상하게 각이 안잡힌다.
다시 각잡고, 사드의 유언은 메시지의 파괴를 의미한다. (새로운 윤리를 세우기 위해) 세상의 도덕을 파괴하려 하는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사드는 자신이 패퇴하고 죽음으로 돌아갈 그 순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길을 미리 준비해 둔다. 그 메시지가 바로 그의 찾을 수 없는 무덤이며, 만약 무덤이 한 사람의 인생의 증명이며 의미라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증명을 할수도 의미를 알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사드의 마지막 저항이며, 화해의 거절이며, 절단의 메시지이다. 여기에는 아리랑이나 배따라기 (김동인의 유명한 소설 배따라기의 마지막 장면은 갈대밭에서 죽은자를 찾아 헤메는, 그러나 대답없이 자신의 목소리만 되돌아오는 그런 장면이다) 의 낭만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이 없고, 또, '나의 죽음은 이런 의미를 지닌다!'라고 외치는 행동주의자나 노조원의 분신자살 같은 것과도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최명식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단순하지만, 고집불통으로 '싫어'라고 말하고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무엇이 싫은지, 왜 싫은지, 그 의미는 '남한'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디스트적인 죽음은 호소하거나 함치는 것이 아니라 고집스럽게 침묵한다. 이것이 바로 '상징계적인' 차원에서의 죽음이다. (그리고, 최명식을 죽음을 사디스트 적이라고 하면서도 세상과의 '타협'이라고 정의하는 정성일의 사디즘에 관한 시각은 결코 너그러운 것이 아니다)
반면, 마저키스트의 죽음은 바로 진달래꽃(서정주의 시)의 죽음과 동일한 것이다. 즈려밟고 가시라는 청은 역설적으로 당신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를 호소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즈려밟고 가는 당신이 이런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 행위는 아무 의미도 획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저키스트의 죽음을 '상상계적'이라고 칭한다. 상상계와 상징계는 정신분석 용어로, 상징계는 질서 그 자체를, 상상계는 질서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집합 같은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마저키스트의 행동 특성은 계약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가학을 할때, 상대방으로 하여금 채찍을 들고 자신을 때리게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마저키스트는 꼼꼼하게 계약서를 작성하고, 상대방의 동의를 얻은 후에야 채찍을 들려준다. 이러한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의미가 상대방과 동의한 체계 하에서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마저키스트는 자신이 처벌받는 이유를 상대방이 명명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만약 마저키스트가 자살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이 때 상황은 역전된다. 가령 진달래꽃의 화자는 상대방의 자신의 희생의 의미를 부여해 주기를 강요하는 셈이다. 자신의 죽음을 보고 의미를 찾고, 죄의식을 느껴라 라는 것이 이 행동의 메시지이다. 정성일이 분석하는 박경원의 추락도 비슷한 맥락을 지닌다. 그는 이 맥락을 이렇게 설정한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덮어버릴 때, 그래서 그 세상에서 나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릴 때, 나의 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의 무의미에 대해서 세상의 죄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살적 몸짓은 세상을 죄의식 안으로 몰아넣으려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삶을 포기해야 할 때 나는 세상의 잘못을 일깨워줘야 할 필요를 간절하게 느끼는 것이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상상적 착각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 죽음에 대해서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이 자살적 몸짓이 마주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전도된 형태의 만족감이다.
정성일의 분석은 여기서 마저키스트에 대해 전혀 우호적일 생각이 없는데, 그가 말하듯이, 박경원 같은 사람이 마저키스트일 경우, 세상은 그의 죽음에 대해 죄가 없다. '전도된 형태의 만족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 모든 계약이나 죄의식의 관계들이 (이 경우) 박경원 개인의 상상 속에서 충족되는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마저키스트는 이런 것이 아니라, 미리 계약을 통해 공유하려는 상계를 타자에게 인지시키게 되어 있다. 가령 고등학생들이 몸을 던질 때,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상황들이, 만약 그들도 마저키스트라면, 스스로에게 이미 위안을 주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 세상에 어떤 경종을 울리겠지 라고 말이다.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사디스트의 죽음이 마지막 선택인 반면, 마저키스트의 죽음은 선택이 아니다. 마저키스트의 가학의 요점은, 그것이 반복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마저키스트는 가학을 재현할 뿐 실행할 생각이 없다. (결정적으로, 바로 이런 이유로 상상계적이다) 만약, 진달래 꽃의 화자가 진짜로 죽어버린다면, 진달래꽃의 의미는 없어지거나, 혹은 너무 늦게 전달되게 될 것이다. 즉, 상상계의 유혹에 속아 실제로 자살을 감행하는 순진한 고등학생들과는 달리 골수 마저키스트는 죽을 생각이 전혀 없다. 마저키스트가 향유하는 순간은 그런 것들이 반복될 것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디스트의 경우 반복되어야 할것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학대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정성일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영화 <청연>에서) 박경원은 추호도 죽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몸짓을 보여준 다음 죽음이 성공적인 탈출에 대한 유일한 행위라는 순간과 만날 수밖에 없다. 최명식에게 자살은 세상과의 타협이지만, 박경원에게 자살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이다. 내 생각에 <청연>의 유일하게 훌륭한 점은 마지막 박경원의 죽음의 순간을 찍은 롱숏이다. 윤종찬은 이 죽음을 영웅적으로 그리는 대신 멀리서 보잘것없는 초라한 죽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상상적 도피의 몸짓을 바라보는 실재의 시선이다.
자, 이쯤 각작고 썼으면, 다음 부분은 해석이 좀 더 용이해진다. 박경원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해석)가 역사적 사건에 이런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박경원의 마저키스트적인 면모를 부여하기 위해서 영화 첫 부분에 추락 신을 넣었다는 해석이다. 즉, 추락에 의한 자살의 낭만이 어린 박경원에게 각인되어 그녀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해석이다. 그 다음에 '허구'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영화로 이야기화 된 박경원의 일대기이며, 그 정점을 정성일은 이 영화의 유일한 상상적 인물인 한지혁으로 보고 있다. (한지혁의 포기(ㄹ) 편은 정성일이 다루지 않으므로 나도 생략하겠다.) 그리고, 나머지 실존 인물들도, 박경원의 상상계를 공유하는 것으로, 악한 세상만이 실재계인 것으로 (상상계 (이미지) - 상징계 (질서) - 실재계 (실재)가 정신분석의 인식틀이다) 본다. 그는 강변한다. '이 영화에는 오직 세상만이 악이다. 그런데 그 세상만이 사실상 실재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박경원은 왜 이 비행(자살)을 취소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정성일의 대답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는 (잘못된 세상에의 호소) 알지만 무엇을 원하는지는 (올바른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자, 이제 태풍과 청연에 대한 일차적인 분석이 끝났다. 하지만 정성일은 자살의 의미를 더 파고든다. (ㄹ.) 한지혁의 포기는 포기되지만, 대신 두가지의 새로운 자살의 모드가 등장한다.
3. 자살
ㅁ. 희생양
정성일이 말하는 희생양은 상당히 한정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희생양이라고 명칭하기도 사실은 좀 뭣하다) 어쨌거나, 그의 의도는 희생양을 논하는 것이 아니니까. 여기서 희생양은 간단하게 집단과 다른 이질분자인 내가 집단의 통일성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 그러니까 강요되는 자살의 경우이다. (사실은 사형의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사회의 존속을 위해 이질분자를 제거하는 것 - 사형은 옳은 것인가? 라는 논쟁도 여기서 출발한다.)
ㅂ. 영광의 자살 - 안티고네
정성일은 여기서 논의를 끌지 않기 위해 간단하게 잘라버렸지만, 안티고네의 논의는 상당히 늘어질 수도 있다. 나도 간단히 설명하자면,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쳇..간단히 얘기할 수가 없잖아.. 이렇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알지 못한 채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바로 자신이 테베시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병균같은 존재였음을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자신을 유형에 처한다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3부작의 1부, 오이디푸스 왕 의 내용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3부작의 2부이다. 오이디푸스에게는 두 아들과 두 딸(또 다른 딸은 이스메네)이 있는데, 그가 사라진 이후 두 아들(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이 테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둘다 전사하게 된다. 그런데, 그중 한 아들(누군지 까먹었다)은 반역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반역자는 묻어주지 않는다는 그리스 문화의 규칙에 따라 장례를 지내지 못하게 된다. 이 때, 안티고네가 나가서 오빠의 시체를 묻어준다. 이스메네에게도 도와달라고 하지만 겁이난 그녀는 돕지 않는다. 이것 역시 그리스 문화의 장례 규칙에 따른 것이다. 가족의 시신을 묻어주는 것 -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가족'(오이코스)과 '사회'(폴리스)라는 두 묶음은 매우 중요한 규칙들의 장이었다. 시체가 묻혔다는 것을 알게 된 당시 테베의 왕 크레온은 격노하고 시체를 다시 파헤쳐내도록 한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또 다시 시체를 묻어주다가 잡혀온다. 국왕 크레온은 그녀를 처벌해야 하고 그제서야 이스메네는 언니와 함께 죄를 뒤집어쓰기를 자청하지만, 안티고네는 그것을 거부하고 홀로 유형에 처해지고자 한다. 결국 이 극은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념이 안티고네와 크레온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극단적으로 충돌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안티고네는 자살하고, 크레온은 자멸하게 된다. 1부에서는 무게 중심이 오이디푸스 개인에게 있었지만, 2부에서는 이렇게 극이 안티고네와 크레온이라는 두 영웅의 대결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 비극의 영웅의 정의는, 헤라클레스 같은 액션 어드벤쳐의 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의 오만함(휴브리스)로 운명에 거역하다가 파멸하는 자'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깡은 그의 유명한 논의인 '정신분석의 윤리'편(세미나 7권)에서 안티고네의 자살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그 자살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분석해낸다. 그 이유가 바로 정성일이 언급하듯, 그녀가 온 사회가 요구하는 희생의 요구를 거절하기 때문이며, 그 거절의 윤리적인 표현이 바로 자살이기 때문이다. 안티고네가 바로 그 순간 스스로가 판단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녀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가장 빛나는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 그것은 사회의 요구에 연연하지 않고 '주체'가 된 인간이다.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독일 비극 분석도 같은 궤도를 타고 있다. 비극의 주체를 집중조명하는 라깡과는 달리 벤야민은 비극의 사회분석을 하는데 그가 말하는 두 비극 (고대 그리스 비극과 근대 독일 비극)의 차이는 그리스 비극에서는 영웅의 죽음이 운명(역사)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는 반면, 독일 근대 비극에서 주인공은 역사의 알레고리로 운명을 보여줄 뿐이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알레고리는 타락했으며, 설명의 힘을 상실한채 잔해의 형상으로 운명과 역사를 불안정하게 매개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음..
그러나...
여기서 잠깐!
정성일의 논의는 여기서 일단 접어두겠다. 왜냐하면, 벤야민을 언급하는 부분의 그의 논의는 상당히 제한적이며 어떻게 보면 편파적이기 까지 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관한 논의 역시 다음 기회에...
단, 여기서 남기고 싶은 말은 벤야민은 궁극적으로 그리스 비극이 아니라 독일 근대극이 (비애극이라고 하는 일단의 장르) 예술로서 더 모던하다고 평가한다는 점이다. 타락한 알레고리, 잔해와 파국, 의미의 상실, 그로인한 멜랑콜리, 이런 것들은 벤야민에게 의미의 상실이 아니라, 의미의 진실에 접근하도록 하는 예술적 과정이다. 그 진실이란 단선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거나 총체적인 구성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문제적인 진실이다. 성좌 개념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모던 아트의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므로 함부로 다룰 수는 없는데, 정성일 선생님이 이상하게도 이 부분을 함부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최명식이나 박경원이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점, 이야기, 역사의 서사를 보지 못한다는 점, 도 벤야민이 분석하는 독일 비애극의 주인공들의 슬픔, 혹은 우스꽝스러움과 연결되는데, (벤야민은 이런 덧없음 (이야기의 의미가 없음)을 오히려 하나의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상징보다 더 현대적인 알레고리의 진실 인식 방식인 것으로 재구성해 낸다.) 정성일 선생님은 인식하지 못해 안타까움으로 해석하는 데서 그치고 있다. 왜 그러셨는지?
아니면, 내가 뭔가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건가???
4. 마무리와 두 영화 더.
어쨌거나, 영화 분석보다도 도착증의 개념과 정신분석의 윤리, 그리고 벤야민의 문예론으로 꽉 차버린 이 학교 수업같은 정성일 선생님의 글은 결론으로 최명식도 박경원도 안티고네같은 주체가 되지 못함을 이야기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은 사회(역사)에 대한 어떤 바램, 혹은 메시지를 안고 자살을 하는데, 이것이 각자 도착적인지라 (한명은 사디스트, 다른 한명은 마저키스트) 정상적인 사회(역사)와는 소통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그들 자신도 원치 않는 어쩔 수 없는 자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석에서는 세상이 실재계로 등장해서 그들의 죽음을 초라하게 개인적이었던 것으로 묻어버린다. 이것은 괜찮은 분석일까? 흠...
그리고 바로 여기서 왕의 남자가 언급되는 군! 왕의 남자와 함께 언급되는 김성수 감독의 '야수' 또한 매우 중요한 영화이므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청연'도.. 쿨럭쿨럭..
하여간,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문제의 지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영화는 예술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 만큼 권력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두 광대와 두 권력자는 모두 사실상 자살로 끝맺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권력과 역사를 동일화해 나쁜 타자로 밀어낸다. 사극의 무대 위에서 그들의 죽음을 응시할 인물조차 남겨두지 않고 주요 인물이 모두 죽는 이 설정은 과격하게 순진한 반역사주의다. 나쁜 역사의 반대편에 갖가지 방식으로 사멸한 남성들의 자기 연민이 있다. 남성들의 자기 연민과 자살은 한국영화의 변치 않는 유혹이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쳇.. 알고 봐도 하나도 모르겠네.
각잡고 봐도 모르겠는 걸 보니 이것도 일종의 알레고리적 글쓰기일라나???
*
다음으로는 자살에 대한 또 다른 논의를 담고 있는 영화 하라키리와 지금까지의 물밑작업을 마무리할 영화 왕의 남자에 관한 글들을 올릴 터인데, 두 글다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니 각 풀고 읽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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