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The King and the Clown - 4. 참고 평론 - 세상과의 불화, 죽음과 함께 사라지다

이박오 2012. 3. 6. 13:55

 

 

세상과의 불화, 죽음과 함께 사라지다 <태풍>과 <청연> (정성일, 2006.1. 19, 씨네21 평론)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36076

 

내가 정성일 빠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정성일의 평론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읽어본 그의 모든 평론들은 (기억나진 않지만.. ㅠ,.ㅠ) 평론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정성일은 황진미(싸랑해요~)와 더불어 내게 실망을 준 적이 없는 평론가이다.

 

자 그럼, 이제 정성일이 보는 태풍과 청연, 그 속의 네 명의 인물들의 '자살'을 정리해보자~

 

1. 태풍

 

ㄱ. 최명식의 자살 - 최명식은 복수를 위해 테러를 계획하지만, 결국 그 테러가 실재의 복수가 아닌 상징적

복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살을 택한다. 그런데, 이 자살은 지금까지 그의 행동(복수)를 무로 돌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자살의 의미는 자신의 무의미한 테러를 거두어들이고 더 이상 자신이 소통할 수 없는

세상을, 자신을 파괴시켜버림으로써 자기도 거부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최명식이 죽는 것은 남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완벽하게 부정해버리고 절멸시켜버리기 위한 행위이다. 물론 자기 스스로에게만이지만.

 

가령 이런 것과도 같다. 어떤 연쇄살인자나 악독한 중죄인이 있다. 사회가 그에게 사형은 하지 않을 테니 범법자로

법의 구속을 받으라고 명한다. 이에 중죄인은 싫어 라고 말하고 그냥 자살해버린다. 이 때 만약 이 범죄인이 그냥

감옥에 수감되는 것이 두려워서 죽는 것이라면 이는 최명식의 자살이 아니다. 최명식의 자살은 이런 메시지를 담는다.

사회여. 니들은 나를 절대로 길들일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획일화된 나약한 너, 사회를 경멸한다. 그 경멸을 완성시키기

위해, 나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일, 왜냐고? 정상적인 니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니까,을 해주지. 그건 바로 자살이야~..

 

이거 좀 얘기가 이상해지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자살은 근본적으로 도착적(변태적)이기 때문이다. 더 진지한 예는 이런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가 있다. 그가 행하는 악의 의미는 우리가 아는 선한 것들을 미워하고 파괴해서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진짜 그런가 라고 의문하기 때문에,

도덕의 의미를 뿌리채 흔들어버리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이런 것을 '과격한 악'이라고 불러보자)

가령, 어여쁜 꽃이 한송이 있는데, 어여쁜게 싫어서 꽃을 뽑아버릴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이 꽃을 어여쁘다고 해야만 하는 것이지?

다 썩어서 구데기가 들끓는 시체나 토사물 같은 것이 더 어여쁘면 안돼나?

이런 넘이 나타난다면, 사회는 당연히 야이 미친넘아 라고 대응할 터인데,

그 때 이넘이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싫어? 그럼 내가 보여주지. 하고 토를 한다음 배째고

내장을 꺼내서...   ... 면서 

아아.. 아름답지 않아? 라고 말하며 죽는다.

 

아니... 이것도 아니야..

그냥 최명식의 경우를 상상해서 이야기해보자.

최명식은 남한이라는 사회에게 거부당했다. 그리고 그 사회를 절멸시키려 한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진다.

그냥 포기하고 말아? 아니다. 그는 사회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죽겠다 라고 선언하고 자살을 택한다.

그에게 남한과 자신은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나중에 청연 부분에서 글쓴이가 언급하듯, 이것은 세상과의 '타협'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결국 남는 것이란 상징적인 메시지 뿐이기 때문이다.

 

ㄴ. 훨씬 더 문제적인 강세종의 자살 - 영웅적 자살. 범죄자를 잡는다면 죽어도 좋아 식의 자살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죽음 충동 (그렇다! 이런 것도 바로 죽음 충동이다)의 이데올로기적 발현. 가령 과격분자의 자폭 테러 같은 것도 같은 류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도대체 왜 굳이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그냥 치기어린 자살이라고까지 말해버릴 수 있겠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되는대로 말해버리다 테러당하는 수가 있다. 왜냐하면 본인들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완성,

혹은 윤리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굳이 살 수도 있는데 왜 죽음으로 뛰어들어 갈까?

이것은 단순한 죽음 충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도착적, (혹은 종교적인) 죽음 충동이라고 해야 겠다.

실제로, 아랍 테러리스트들은 폭사하는 것을 성전 (지하드) 최고의 영광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흠.. 이 영화 한번 볼까나~ (받아놓은 것 같은데 본적이 없어서..)

 

2. 청연

 

ㄷ. 박경원의 추락 - 어어.. 이 부분은 좀 복잡하다. 일단 글의 논지를 정리해 보자. 우선 이것은 세상의 죄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몸짓 (고등학생들의 추락) - 세상이 이에 대해 항상 냉정한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생들의 자살은 반복적인 메시지의 역할을

하기는 한다), 기본적으로 글쓴이의 말대로 이것은 상상적이며 마조히즘(피학 - 자기학대)적이다.

글쓴이가 이와 비교하는 사디즘(가학-타인학대)적 죽음이란 가령 ㄱ 같은 것이다. ㄱ이 가학적이며 상징적일 수 있는 이유는

예를 들어 최명식의 자살은 어떤 파괴적인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   

 

아아.. 시간이 없다.

뒷부분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