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The King and the Clown (2005) 1. 평론 - 남근과 율법의 세계, 승자는 누구인가?

이박오 2012. 3. 6. 11:00

 

 

 

남근과 율법의 세계, 승자는 누구인가? (허문영, 2006. 1.25. 씨네21 평론)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36175

 

밑의 글은 위의 전문가 평론에 관한 리뷰로

이전에 써 놓았던 왕의 남자에 대한 영문 원고를 번역하면서 다시 쓰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쓰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영화에 대한 글이 아니라 평론에 관한 글이다.

당연히, 위에 링크된 평론을 먼저 읽어보고 읽으시기를 권장하며,

위의 평론은 밑의 글보다 약간 더 불친절하기 때문에,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올리고 싶다.

 

왕의 남자 영화에 관한 글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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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통찰의 포인트들이 많이 있지만 전체적인 논점에는 수긍하기 힘든 글이다.

 

우선, 장점으로는 장생과 연산이라는 권력(남근)을 가진 남자들, 그리고 권력(남근)을 가지지 못한 남자들인 처선과 공길을 묶어 그들의 관계구도를 치밀하게 파고들어간다는 점이 있겠다. 여기서 장생이 풍자가가 아닌 광대라는 점, 연산이 놀고 싶어하는 이유, 그리고 연행을 어머니와의 조우라고 분석하는 것, 그리고 연산과 선왕의 대립관계를 부각시키는 것, 장생과 연산의 관계를 상호 존중이라고 분석하는 것 (장생이 왕에게 소중한 인물이라고까지 하는 것은 일견 과잉이라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확하게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에 이의를 달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처선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시도한 것도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네 남자들의 관계구도를 감싸는 틀로 실연과 권력, 예술과 정치(역사)로 묶은 것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그다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 하나하나씩 짚어가며 살펴보자. 우선 두 남자, 또는 대결자들부분이다.

 

1.     연산

글쓴이는 연산의 고통을 얘기하면서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의 율법을 폐기하면 자신도 폐기될 운명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되찾거나 복수를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건 좀 도식적인 분석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아버지(선왕)의 율법은 계속 갈등을 일으킨다. 실제적으로 왕과 갈등을 일으키는 중신들이 모두 아버지의 유령을 뒤집어 쓴 자들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궁궐에서 처선과 녹수, 그리고 광대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선왕의 유지를 자꾸 들먹거린다. 연산이 뭔가 하려 할 때마다 이 유지가 그의 행동을 제멋대로인 것으로 규정해 질책하려 든다.  또 그림자극에서 보여주듯, 연산 자신이 가진 선왕에 대한 기억도 엄한 아버지의 다그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왕의 유지, 그 핵심은 실제로 어떤 율법 따위는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머니를 부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 역사 속의 어린 연산에게는 중전이 새어머니가 되었지만 영화 속 연산은 아직도 어마마마를 찾고 있고, 선왕은 그 어마마마를 찾는 것을 금지한다)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선왕의 유령과 연산과의 궁극적인 갈등은 이 금지의 항목이지 무슨 법이나 제도 같은 것이 아니며, 연산이 공길에게 벼슬을 내리고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 때 부딪히는 법을 굳이 선왕의 율법이라고 칭할 이유는 없다. 대신, 그것은 신분 이동에 제한을 두는 단순한 법제도와, 선왕의 율법보다 더 심각한 진짜 아버지의 율법, 가령 같은 남자, 그것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을 요상한 놈,을 탐하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 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반면 글쓴이는 어머니라는 단어의 금지, 중신들이 들먹이는 예법 조항들, 그리고 남색에 대한 사회적인 금지,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아버지의 율법이라고 칭하고 동일하게 취급한다.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 자체는 괜찮을 지 몰라도, 그것이 밑에와 같은 주장으로 이어질때, 연산의 캐릭터는, 무슨 정치 투사 같은 과업을 갑자기 등에 짊어지게 된다.

중요한 점은 그가 아버지의 율법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대안의 법을 마련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법을 세우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율법 바깥에서 놀기를 원하다가 이제 그것을 폐기하려 뿐이다. 율법의 집행자가 율법을 폐기하고 광대가 되려는 순간 그에겐 자멸의 길만 남는다. 이게 <왕의 남자> 그려낸 불행한 왕의 이야기다

사실 연산은 선왕의 율법에 맞서 싸운다. 영화 전체가 그의 투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가 대안의 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아니, 그럴 이유 자체가 없다. 궁극적인 금지란 결국 어머니라는 단어 하나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는 법을 세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 그리고, 아마도 처선의 궁극적인 계획,은 이 금지된 단어를 다시 왕이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죽은 어미를 제대로 애도하게 해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연루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왕과 공모하여 아버지의 율법을 뒤엎고 아들의 법을 세우는 것이 처선의 의도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처선이야말로 혁신적인(? 아니, 사실은 망상증에 걸린) 개혁파 정치인일 것이다.

2.     처선

그리고, 어쩌면 글쓴이는 진짜로 처선을 그런 식으로 보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령 다음 부분인 또 다른 두 남자 또는 중개자들에서 그는 처선과 연산을 한데 묶어 분류하면서 왕의 가혹한 처단의 설계자였고, 왕의 절대적인 동지처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한번 왕에게 반항한다. 공길에게 4 벼슬을 내리자 처선은 왕에게광대 한명에게 정신이 빠졌다 불경한 진언을 올린다.심지어 중신들의 언어인죽어도 선왕을 낯이 없다 표현까지 동원한다.

처선이 단 한번 반항하는 것은 맞을지 몰라도, 그렇다면, 여기서 왕에게 반항하기 위해 선왕을 들먹인단 말인가? 아니다. 처선은 연산에게만이 아니라 그 선왕에게도 충신이었다. 처선의 말은 반항이나 도발이 아니라 충심을 드러낼 뿐이다. , 그의 의도는 글쓴이가 억지로 몰고 가려는 것처럼 연산으로 하여금 선왕의 율법을 부숴버리도록 배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중신들의 권력을 넘어서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다시 이 부분의 맨 앞으로 돌아와 처선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는 부분부터 보면, 글쓴이는 처선과 중신들의 적대관계에 대해 간단하고 탁월하게 분석하면서도 그 분석 자체를 외면하듯,그러나 처선이 두 남자의 이례적인 만남을 주선하고 중재하는 목적은 모호하다.’라고 토를 다는데, 여기서부터의 처선에 대한 분석에는 전체적으로 수긍할 수가 없다.  

처선은 부패한 중신에 대한 풍자극이 그들에 대한 단죄로 이어질 것임을, 풍자의 정치적 선동 효과뿐만 아니라 왕의 심리적 반응 패턴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많이 알고 있다. 그가 장생의 광대패에 내민 과제는 임금을 웃기라는 것이었다.궁중의 공연에서 광대패는 기생 출신 후궁과 음탕한 놀이에 열중한 왕을 풍자하는 것이었다. 처선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있는 불경한 풍자가 왕을 웃게 수도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처선의 가장 놀라운 지식은 그가 장생에게 경극을 주문할 드러난다. 연산군 모친의 비극적 죽음을 재현하려 한국 가면극의 희극성이 서사에 부적합하며 중국의 경극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임금을 웃기는 것은 처선이 내민 과제가 아니라 장생이 스스로 제안한 것이며 처선은 기회를 준 것뿐이다. 당연히 광대패가 실패한다고 해도 처선의 목이 달아날 이유는 없다. 물론 처선이 왕의 심리적 반응 패턴 따위를 알 리도 없다. 글쓴이는 마치 처선이 공모 뒤의 배후 조종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데, 그가 배후자인 것은 맞지만 그 이후 연산의 모든 행동은 그의 예상을 빗나가 버린다. 과연 글쓴이가 말한 것처럼 처선이 중신에 대한 풍자가 바로 단죄로 이어지기를 바랐을까? 아니다. 갑자기 연산이 난입해서 윤지상의 손가락을 자르라고 명하는 것은 왕의 광기이지 처선의 계획이 아니다. 처선의 계획은 중신들의 부패를 까발려서 보여주는 것일지는 몰라도 왕으로 하여금 흥분해서 그 자리에서 단죄하도록 사주하는 것은 아니다.

글쓴이는 또한 경극을 주문하는 것이 처선의 가장 놀라운 지식이라고 언급하는데, 그 이유는 글쓴이 자신이 지적하듯이 한국 가면극은 그런 내용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극이 나타나는 것이 좀 생뚱맞을 지는 몰라도, 그것이 굳이 처선이라는 캐릭터의 문제점으로 부각될 이유는 없다. 글쓴이는 이 난데없는 경극의 삽입에 대해 다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선은 뛰어난 예술학자, 어설픈 심리학자, 실패한 정치학자의 믿기 힘든 결합이다. 그의 지식은 자의적으로 조합된 지식이다. 실패한 중재자로서의 처선의 지식과 무지는 남자가 자멸의 길에 이르는 서사의 경로를 마련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동원된다. 처선은 하나의 주체라기보다, 예컨대 난데없이 경극을 등장시키려 , 개연성 없는 서사의 핑계로 동원되는 기능이다. 장항선이라는 뛰어난 배우의 존재감으로 웬만큼 가려지긴 하지만, 점이 <왕의 남자> 결함 가운데 하나다.

경극을 자연스럽게 끌어오는 캐릭터가 처선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처선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하나의 주체라기보다’ ‘개연성 없는 서사의 핑계로’ ‘서사의 경로를 마련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기능이라고 까지 폄하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글쓴이 자신이 조선조에 중국의 경극이 지식인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섣부르게 단정지었기 때문은 아닐까? , 처선이라는 캐릭터를 너무 공길의 기능에 연관지어 해석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처선에 대한 이 구절은, 미안하지만, 실소를 자아낸다.

세 명의 왕을 모셨으므로 그는 이미 절개를 지키는 신하가 아니다.

조선은 순장의 나라가 아니었다.

3.     장생

여기서 잠깐 공길에 대한 분석은 뒤로 미루고 글의 마지막 부분인 또 다른 대결 권력과 예술편을 먼저 살펴보자. 내가 읽은 것이 맞다면,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권력과 예술의 대결관계라는 틀에 영화를 올려 놓고 영화가 이 관계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그래서 반역사주의로 빠지며, 그 징후로서의 결과가 남성들의 자살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영화에는 장생의 호쾌한 선언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자의식이 보이지 않으며, 예술 양식에 대한 존중이나 매혹도 없다. 장생은 판에서 강한 대상을 놀려먹는 것이 광대의 길이라고 믿고 있지만, 광대패의 풍자는 공격적 선언이나 비웃음이기 이전에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는 양식이다. 영화의 이상한 가운데 하나는 뛰어난 광대를 그리면서도 수련과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생의 재능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으며 그는 자신의 재능을 한번도 회의하지 않고 변치 않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항상 최상의 공연을 만들어낸다.

도대체 영화의 어디에서 이런 주장을 끌어올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왕의 남자는 수련의 완성을 묘사하는 예술에 관한 영화가 전혀 아니다. 글쓴이가 광대패에 대한 어떤 낭만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광대패는 조선 시대 사대부의 순수 예술과는 달리 서민들이 놀잇거리로 시작한 장르이다. 광대놀이는 판소리와도 달라서, 명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명인들이 굳이 1인자나 2인자의 위치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조선 시대에는 없었다. (이런 관점이 생겨난 것은 근대 이후이다) 광대놀이에서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예술적인 성취가 아니라 골계라고 부르는 익살미였다. 당연히 고도의 숙련과는 조금 요점이 다르다. 생각해보라. 중국에는 전통적인 경극학교가 있지만, 조선에 전통적인 광대학교라는 것이 있었는지.

당연히 장생의 공연이 최상의 공연이라는 것도 글쓴이의 과장이다. 애당초, 장생은 1인자가 되기 위해 왕에게 도전한 것이 아니며 처선이 장생의 재능을 보고 뽑은 것도 아니고, 극중 어느 누구도 장생이 최상의 공연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노회한처선이라면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한낱 광대놀음일 뿐입니다. 무슨 예술이 있겠습니까?’  

경극 공연 대목은 지나치다. 언문도 겨우 익힌 조선의 지방 광대패가 중국 경극 교본만으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패왕별희> 경극 배우들은 어릴 때부터 가혹한 수련을 거친다) 발성은 촌스럽지만 거의 완벽한 분장과 세팅의 경극 공연, 그것도 그들이 이전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던 비극을 만들어낸다. <왕의 남자> 예술 양식의 고유성을 외면하면서 공연들의 인과론적 서사 기능에만 몰두한다. 노상 장님 공연은 장생이 정말 눈멀어 벌이는 최후의 공연을 위해 필요한 장치이고, 경극은 유희적인 광대패 놀이가 연산군 모친의 비극을 다룰 있는 그릇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에 혹은 색다른 구경거리로 선택된 것이다. 영화대로라면 경위는 없지만 장생 일행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연 예술가들이다.

당연히 이러한 반응 역시 글쓴이의 과잉반응이며 예술은 이러해야 한다는 경직된 사고의 발로이다. 글쓴이는 오락거리였던 광대극을 경연을 요구하는 예술로 격상시킴으로써 예술 양식의 고유성을 외면하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리는 예술과 권력의 대결구도라는 글의 논지를 완성시키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최고의 예술가가 한번도 자신의 예술을 결코 회의하지 않을 동안 권력자는 한번도 자신의 권력에 매혹되지 않는다. 대결은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진 싱거운 게임이다. 예술은 최고의 완성에 이르는데, 권력은 혐오와 불안과 광기와 균열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가는 공연장에서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할망정 사생활에선 한번도 자신의 성욕을 표현하지 않는 도덕주의자인 반면, 권력자는 욕망을 과잉 분사하는 악동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글쓴이는 이 영화를 예술과 권력을 대결구도로 보려고 하는가? 그 이유는 이 글이 캐릭터 분석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장생(예술)과 연산(권력)의 관계를 통해 영화를 분석하는데, 사극으로서 영화 왕의 남자가 역사의식을 반영해야 하며, 바로 이 두 캐릭터를 통해 그것이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장생이 글쓴이의 말대로 늘 최고의 완성에 이르는가? 단지 그가 공길과 동침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덕주의자인가? , 장생은 혐오와 불안과 광기와 균열이 전혀 없는 캐릭터인가? 연산은 권력에 매혹되지 않는가?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글쓴이의 대답에 수긍할 수가 없다.

영화는 예술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 만큼 권력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왕의 남자> 등장하는 광대와 권력자는 모두 사실상 자살로 끝맺는다. 마지막 장면은 권력과 역사를 동일화해 나쁜 타자로 밀어낸다. 사극의 무대 위에서 그들의 죽음을 응시할 인물조차 남겨두지 않고 주요 인물이 모두 죽는 설정은 과격하게 순진한 반역사주의다. 나쁜 역사의 반대편에 갖가지 방식으로 사멸한 남성들의 자기 연민이 있다. 남성들의 자기 연민과 자살은 한국영화의 변치 않는 유혹이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한 평론가가 문제시 삼았다는 한국영화에서의 주인공의 자살에 대해 왕의 남자라는 영화로 대답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이 마지막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많다. 우선, 진짜 자살일까? 영화 속의 장생이나, 특히, 연산은 죽고 싶었을까? 물론 그들의 상황이 극단으로 몰린 것도, 그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무력하게 쳐다보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무력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이 자살일까? , 이 영화에서 죽음을 응시할 인물이 없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도대체 글쓴이가 말하는 죽음을 응시해야 할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가령 장생과 공길의 죽음을 지켜보는 연산과 녹수는 어떤 주체인가? 주요 인물이 모두 죽는 설정이라 과격하게 순진한 반역사주의인가? (가령 왕의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처참하게 끝나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더 과격하게 순진한 반역사주의적인 작품인가?) 자살하면 반역사주의인가?

그리고, 애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국 이 글은 예술을 버리고 권력으로 집중한다. 어느새 장생을 연산과 한패로 권력자라고 명명하더니, 이 둘의 자살을 통해 역사를 끌어들여 나쁜 역사나쁜 타자로 퇴출시켜 버린다. 이 글의 동기가 되었다는 자살에 관한 글이 어떤 논리를 펼치는 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 글은 대가 정성일 선생님의 글이다!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나는, 그래 자살했다 치고, 왜 장생과 연산이 나쁜 타자가 되는지, 그것이 왜 자기연민인지, 또 그 나쁜 역사의 반대편에 나타나는 남성들의 자기연민이 한국 영화의 변치 않는 유혹인지 도시 이해할 수가 없다.

4.     공길

글의 결론이 이렇게 권력에 집중되다 보니 글쓴이는 처선과 마찬가지로 공길도 기능적인 캐릭터로 축소 해석하게 되는데, 그가 욕망을 보여주지 않고 리액션으로 반사하기만 한다는 금지 대상이라는 논점은 좋다. (‘카메라가 그의 시선을 담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남근이 없어서 역사 속의 조력자라는 분석은 그냥 넘어가 볼만도 하다. 그런데, 글쓴이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광대는 금지를 풍자하지 않고 자살한다. 혹은 왕은 금지를 교정하지 않고 옥쇄한다. 여기서 공길은 실패한 남자의 자기 연민이 투사된 존재, 혹은 실패의 알리바이로 존재한다. 왕은 정치에 실패했고 장생은 풍자에 실패했지만, 실패는 그들에게 책임이 없는 금지 때문이다.

도대체 왜 광대는 그 금지를 풍자해야만 하며 왕은 그 금지를 교정해야만 하는 걸까? 공길이 그 금지의 연원인가? 글쓴이 자신이 공길은 반사하기만 하는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가령, 연산이 축출되는 궁극적인 이유가 공길 때문인가?

<왕의 남자> 동성애 코드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영화에 속하기 힘든 이유는 영화의 동성애가 율법의 경계를 뚫고 혹은 그것과 긴장하며 생동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억눌리고 막힌 고정된금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글쓴이는 공길로 대변되는 동성애 코드가 권력과 연계해서 율법과 긴장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동성애 영화가 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선이 배후조종하고 연산이 꿈꿨다는 아들의 법이 동성애란 말인가? 가령, 처선이 장생 패거리를 궁에 들인 이유가 공길 때문인가? , 공길이 전면에 나서는 마지막 경극 공연에서 공길의 역할이 금지라서 실패한 역할인가? 또 동성애 영화는 사회의 율법이건 개인의 윤리건, 그런 것들을 바꾸어야만 된다는 것인가?

그리고 또 한가지, 가장 중요한 점은, 연산이 공길을 사랑했는가? 사랑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사랑했는가, 또 그것이 장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라는 점이 중요하다. 글쓴이는 공길과 녹수의 대결구도를 언급하면서 공길에게 자궁이 없기 때문에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연산과 공길의 관계는 이런 뻔한 도식으로 설명되는 표면적인 동성애의 관계가 아니다. 이 둘의 관계에서 공길은 연산의 액션에 반응하는 거울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는 녹수가 갖지 못한 무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연산이 사랑하는 공길은 무대 위의 공길이다) 무대 위의 공길은 과연 진짜로 입막히고 고정된 금지의 상징인가?

이 영화가 정말로 나쁜 역사에 관한 영화이며 실패한 동성애 영화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