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Radio Star (2006)

이박오 2012. 3. 5. 12:12

 

Radio Star

 왕의 남자직후 이준익 감독에게 연타석 홈런을 안겨준 라디오 스타(2006)’는 그가 표방하는 영화 예술의 존재 이유만큼이나 행복한 작품으로 우리 영화사에 남을 것 같다. 이 영화로 그는 전설적인 안성기-박중훈 콤비의 마법적 파워를 다시 한번 입증, 그 기념비적인 네 번째 작품으로 남게 만들었으며, 전작들, 사회풍자극인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개그물인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1993)’, 그리고, 이명세 감독의 느와르 인정사정 볼것없다(1999)’에서 와는 또 다른, 드라마 장르에서 두 대 배우들이 함께 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뽑아냈다.

                                          

, 이 영화는 한국 락 음악의 역사를 열거하는 데에도 크게 부족함이 없다. 신중현, 김추자, 전인권(들국화), 시나위, 그리고 이선희와 조용필, 유앤미 블루(방준석 이 작품의 음악 담당)에 더해 김장훈, 그리고 그룹 노브레인이 극중 영월밴드 동강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그럼 세계 락의 역사는 동강의 코스프레로...?) 이야기 자체는 자본주의와 락스타의 삶을 다루려 하지만, 결코 진지하거나 과격하지는 않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적인자본주의 세상에서 소외 당할 수밖에 없는 골수 락커가 소통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그럴듯한 방법을 깔끔하게 뽑아낸다. 

아니, 사실은 너무 깔끔해서, 이건 영화니까, 라고 넘겨버리며 기분 좋게 극장을 나서는 순간 이거 얘기가 너무 간단해지는데 라고 의심하게 만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많은 것을 놓치지는 않는다.

                                                         

 

가령, 매스컴의 단골메뉴였던 락스타들의 음주, 폭력, 마약사건들 (21세기 이후 락도 자본주의 오락 장르에 종속되면서 이런 범죄 문화는 차차 사라져간다.  철들어 갱생하든지, 조용히 사라지든지),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붕괴된 언더그라운드를 누볐던 성난 인디, 펑크문화 (역시 대중스타문화로 편입되어 사라져간다), 거기에 더해서, 문화산업의 주류에서 이탈한 지방 문화의 작은 삶들 (궁극적으로 포획되며 사라지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은 어떻게 우리와 소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혹은, 그런 것들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무엇을 상실하는가? 또는, 그런 것을 상실한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해버린 현재의 우리들의 삶과 주류 문화산업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그런 이슈들이 불쑥불쑥 던져지긴 하는데, 그런데 큰 이의나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려 들지는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영화의 어떤 인물들도, 가령 사고뭉치 동강 멤버들에게 숭배 받는 단순한 인간 최곤 자신도, 뭔가 의식이나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다. (사실, 생각이 많아서 범죄자가 되는 락스타는 없다. 동강 멤버들이 말하지 않는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세상과의 충돌!) 그렇다고 제멋대로인 퇴물스타가 어찌하다 보니 재기에 성공했네 라는 행복한 우연 일치의 성공 스토리도 아니다. 단지, 이 작품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그리고, 굳이 안성기-박중훈이라는 전설의 콤비가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게 된 이유 역시, 어떤 두 뒤틀리고 잊혀진 과거의 인물들을 데리고 와서 잠깐 보여주고 상기시키는 이 영화만의 특별한 방식 때문이다. 그 속에서는 앞서 말한 모든 문제들 역시 어떤 가능성으로 대답될 뿐 구체적인 방향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며, 주인공들이 선택하는 순간 그대로 정지해 다시 과거로 후퇴할 것이다. 감독은 현명하게도 그 이상은, 그들의 진짜저항이나 투쟁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한꺼풀은 순전히 사탕발림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령, 라디오 프로그램이 서울로, 전국으로 전파되는 순간 최곤 같은 자뻑 외톨이는 거대자본과 전문경영, 아이돌 스타, 매니지먼트, 광고 산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그가 영월에서 했던 것처럼 지역 주민들 개개인들과의 삶과 구체적으로 소통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바램을 무색하게 만들 전문 매니지먼트의 도움 없이 그가 더 이상 재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전문 매니지먼트의 관리 하에서 그 같은 인물이 자뻑 예술인으로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그것은 실제 밴드인 노브레인의 전력에 투사해볼 때 더욱 더 의미심장하게 부각된다. 90년대 말 전투 펑크 문화의 기수였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어떤가? 대부분 사람들은 그룹의 브레인이었던 리더(차승우)의 부재 (이제 진정한 노 브레인인가? )때문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 부재한다는 리더 마저도 이젠 더 이상 90년대와 같은 펑크를 하지는 않는다. 386 세대만 해도 과거의 순수한 열정이나 이상을 갈망한다고 했지만, 시대는 변화해서, 90년 이후의 세대에게 이미 과거의 순수 따위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문화란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이고, 그 변화하고 흘러가는 것은 단순히 어떤 정서나 유행 뿐만이 아니라, 문화가 소통하는 방식 그 자체도 포함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붕괴하는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조바심이 있었지만, 곧이어 매우 빠르게 그런 이야기 자체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니까, 인디는 언더가 아니며, 인재 선발대회는 인디와 아무 상관도 없다.) 그리고, 21세기 초, 우리는 막강하게 통합되어버린 거대 자본주의 문화에 종속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상의 죽음 같은 것을 서럽게 애도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흥미거리로서의 복고라면 또 모를까,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386 세대만 해도 되찾아야 할 무언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386세대가 꼭 그랬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영화 라디오스타는 잊혀진 80년대 락스타의 사정을 일견 해묵은 서사를 통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떤 비장한 투쟁이나 복고 취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지금도 가능하지만, 동시에 이미 사라져버린 어떤 가능성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보여주고 그냥 뒤돌아서는 그런 구조를 갖고 있다. 그를 통해 우리에게 깔끔하고 좋은한류 대중 스타가 아닌 문제만 많았던, 그렇게들 막살고 사라졌던, ‘라디오 스타가 있었던 시대를 아직도 기억하니? 라고 넌지시 물어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락의 현재가 아닌 이후를, 그리고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표피를 덮고 있는 지역문화에 기반한 저항은 여전히 유효한 방식이긴 하지만 (영월에 걸린 플래카드엔 미래의 땅Young World’라고 써있다), 어떻게 보면 진부할 수도 있고 (가령 훌라걸스같은 영화도 있었다.), 또 내용 그대로, 결국은 주류 문화에 흡수될 수밖에 없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에 반대하려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에 그룹 동강은 훌쩍 여행을 떠난다). 아니, 사실은 지역 라이브 카페를 전전하다 주류 방송의 라디오 디제이로 편입되는 순간 이미 최곤은 주류 문화로 복귀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룹 동강과 그의 관계도 여기서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동강 멤버들은 뭘 해먹고 살았을까? 혹시, 그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지방 무대를 전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사실 감독은 자생하는 지역문화를 아직은다루지 않는다 심지어 영월 기지국마저 곧 통폐합될 예정이라고 했다.)

 반면에 이 표피의 지역주의를 감싸 안는 또 하나의 지역문화는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영화 속 대자본 마케팅회사 사장이 제시하는 기획, 88년 가수왕의 좋았던 비와 당신들을 재기시키자, 또는, 가령 나는 가수다같은 방송의 컨셉 같은 복고나 팔아먹기 위한 ‘Oldies but Goodies’가 아니라, 한 가수와 매니저의 특별한 관계, 전혀 바람직해 보이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양의, 바로 그 이상하고 돈 안 되는관계에 있다. 피곤해 보이는 만능 엔터테이너 임백천이 말하듯이,

그래서, 곤이가 영월 촌에서 디제이로 떳다고 칩시다. 돈 돼?

여기서 부각되는 것이 매니저와 가수의 이상한 관계이다. 매니저 민수는 왜 제멋대로이며 한물 간 밉상 최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일까? 그가 꿈꾸는 최곤의 부활서울 ()입성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스타 기획사 사장이 민수에게 20년 동안 최곤씨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어린 강피디가 당신들처럼 될까봐라며 전설로남지 못하고 추해진그들을 지목할 때, 최곤과 박민수의 짧은 성공에 가리워진 그 수렁에 빠진 삶의 실재는 여지없이 돌아온다. 민수가 여기서 노래나 틀으면서 그렇게 살자라고 권하자 곤마저도 형이나 순영이 데려다가 그렇게 평생 살어라고 말한다. 2000년대의 서울은 80년대의 매니저가 생각하는 만큼 단순한 곳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성공과 발전이 대두되는 순간 버려야 할 것 역시 명백해진다.

그런데, 민수가 사라진 후에야 모두들 그가 얼굴에 똥칠 해가며최곤의 가오를 살려주었음을, 잊혀진 스타로 살게 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누구도 곤이 재기했을 때 민수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최곤의 일그러진 삶의 원인이자 그 불만의 뒤치닥거리를 해주기도 하는 민수는 마치 한때 영광스러웠으나 이제는 청산할 수 없는 과거와 같이 곤의 삶에 매달려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혹은, 성장하기를 거부하고 과거에서 빠져 나오려 들지 않는 버릇없는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는 능력 없는 애비처럼 그를 떠나지 못한다. 당연히 최곤이라는 돈벌이 도구가 성장하고 서울에서 재기에 성공하려면 이런 못난 아비를 어서 빨리 떨쳐버리고 뭔가 더 크고 현대적인 시스템으로 편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성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민수가 없는 최곤의 성장이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아니, 이 둘의 관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성공의 의미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강피디가 말하듯, 오직 민수와 같이 있을 때만이, 곤은 잊혀진 지역스타로 살 수 있었다. 그들은 발전하지 못했고, 그렇게 추하게 늙어갔지만, 그렇게 서로를 통해서만이 어느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으로 남을 수 있었다. 멱살을 잡힌 매니지먼트 사장은 그 버릇 아직도 못고쳤어라고 고함을 지르고, 곤은 갑자기 그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자신만의 자기 중심적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가수왕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린 지금도 자랑스러워 하는, 그런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가 반사하고 싶은 별빛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라는 것을. 너무 빨리 변화하는 시대에 맞서 그를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깨달았을때 비로소 그는 성장한다. 그리고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제 모습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 그런데 지금은 제 방송을 듣는 여러분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라디오 스타의 이준익 감독은 지역 소도시 영월에서 전설적인 두 배우의 콤비플레이를 부활시킨다. 그가 자꾸 보여주는 부감법으로 바라본 손바닥만한영월의 모습은 셋트가 아니라 현재이며 실재이다. 그런데, 이 한산한 거리를 지닌 낮은 건물들의 도시는 마치 80년대와 90년대 서울의 변두리 모습과도 닮아 있다. 영월을 사는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같이 바쁘게 스타들의 콘서트를 인터넷으로 예약하는 게 아니라, 소 여물을 먹이거나 가게를 지키며 담배를 피거나, 손님 없는 병원을 지키고 다방에 가며 고스톱을 치고 팬도 아니면서 방송국에 전화를 하며 우물쭈물 연애를 한다. 오직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흘러나올 때에서야 카메라는 그 따스한 시선을 전국으로, 그리고 인파로 넘쳐나는 서울으로 점차 확장시켜나간다 

                   

 

영화 속 라디오 방송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사라졌던 아버지의 행복한 귀향이듯 (술집 소년의 아버지의 귀환), 영화 자체의 움직임도 또 다른 아버지의 귀향과 함께 서울의 거대문화와 영월의 지역문화 사이에서 그대로 멈추어 서게 된다. 전국으로 방송한다고 해도 영월 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안고, 그들의 얼굴을 궁금해 할 최곤. 그는 이제 잊혀진 80년대의 빅 스타가 아닌 지역기지국의 라디오 스타이며, 오직 영월 사람들의 일상을 반사함으로써만 자신의 삶에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거울 같은 존재가 된다. 그렇게 그는 상업자본주의의 중심인 서울과 잊혀지는 향수를 안고 있는 지역, 그리고, 미래 (를 가장한 현재)의 발전과 과거 (혹은 또 다른 현재)의 담지 사이에서 멈추어선 현재 속의 지역인이 된다.

80년대 비정한 현실 속에서 엄마 없는 칠수를 고군분투하는 일상의 삶으로 되던져올리기 위해 아버지의 원죄를 뒤집어쓰고 추락했던 만수. 그를 이제는 살아남은 칠수가 다시 기억하며 잃어버린 반 쪽 꿈으로 소환한다. 그렇게,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 했던 일생의 파트너쉽을 되찾아 그들만의 뒤틀린 주인/노예의 관계가 다시 시작될 때, 이 영화는 마치 이미 오래된 사진처럼 그대로 멈추어 선다.

                       

 

영화 '라디오스타' 트레일러 찾기가 귀찮아서

그냥 올려보는 뮤직 비디오

한국어로는 다른 티비 프로가, 영어로는 이 노래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http://www.youtube.com/watch?v=hiJ9AnNz47Y

근데, 재밌는 것은 이 노래가 MTV 가 최초로 방송한 뮤직비디오 (1981년) 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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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이 연출해낸 안성기-박중훈의 네 번째 콤비 플레이의 유효성은 두 배우의 관계에서 입증된다.  칠수와 만수에서 만수는 아버지의 사상문제 때문에 발목이 잡힌 예술가로, 칠수는 누나에게 버림받고 사랑을 갈구하는 청년으로 등장하지만, 투캅스에선 부패한 선배경찰과 야심만만한 새내기로, 인정사정 볼것없다에서는 그림자 같은 범죄자와 그 범죄자를 삶의 목적으로 놓고 쫓아가는 우직한 형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작품들에서 안성기는 박중훈이 동경하거나 반복하고 싶은 대상이 전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놓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원동력을 주는 존재로서의 타락한, 죄를 짊어진, 그러나 성장해서 따라잡아야 하기도 하는, 도망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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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음악으로 시작한다 해도 라디오로 끝나는 이 영화를 굳이 공간보다도 시간의 지역주의로 본 이유는 간단히 말해 그 서사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아이돌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 아닌가? 원주만 해도 아이돌 스타들이 방송에 나오는데, 영월 방송인 정오의 희망곡에는 아이돌 스타의 노래가 없고, 영월 시민들도 유행곡을 신청하지 않는다. 물론 영화에서 보여지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설정하는 영월이라는 공간은 그래서 유배지이며 과거에 침잠해 있는 장소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영월의 캐치프레이즈는 미래의 땅, Young World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를 배제해버린 채 미래를 상정해 버리는 이런 뻔뻔스러운 설정이 이 영화를 한없이 매력적으로 만든다. 아이돌 스타가 없고 대규모 매니지먼트가 없는 대신 최곤과 박민수같이 멋지지도 않고 꼬인 사람들이 행세하는 마을. 보기 좋고 듣기 좋은 성공한 사람들의 문화가 아닌 그냥 별거 아닌 사람들의 문화. 더 나아가, 보기도 듣기에도 좋지는 않은 사람들의 뒤떨어진 문화. 우리의 문화(인디)가 아닌 아버지들의 문화(언더그라운드). 억압적인 파쇼 아버지들이 아니라 늙고 힘이 빠져 떠벌이기나 하고 도망치기나 하는 그런 아버지들의 문화, 혹은 아무 이유도 모른채 반항하고 쥐어 터져야 하는 아들들을 감싸는 아버지들의 문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시간의 지역주의란 일차적으로는 영월이라는 곳의 침잠된 시간, 다음으로는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로 대변되는 낡아빠진 문화의 경영 방식으로 대변되는데, 이것은 다시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한 소통의 방식을 통해 (여기에 보는 라디오같은 쇼는 없다) 영월 시민들에게로 확장되어 나간다. 처음엔 영월이라는 도시가 최곤과 박민수를 비추지만, 반항하는 아들 최곤이 민수라는 거울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스스로 거울이 되어 이젠 이 도시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꾸미거나 선도하려 하지 않고, 비출 수 있게 된다. 혹시, 이게 바로 미래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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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스스로를 위해서는 노래부를 수 없었던 최곤은 마지막에 자신이 아닌 영월 사람들을 위한 비와 당신을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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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수의 가족이 출연하고, 추한 아빠들에 일침을 놓는 딸 역할을 하는 강피디(최윤영)가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남자들에 관한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관계 속에 오롯이 들어가 있는 인물이 또 다른 딸 역할을 하는 다방 김양(한여운)이다. (다방은 이 영화 속 아버지들의 가벼운 일탈 공간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김양이 소환해내는 엄마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바꾸게 된다. 방송 부스를 다방으로 완전히 타락시킨 순간 (이제 아주 막가는 구만 이라고 강피디가 말한다) (이에 욱한) 최곤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김양은 손님들 외상값이야기로 시작해서 점차 자기의 삶과 그 삶에 비친 엄마의 모습을 마이크에 비추게 된다. 처음으로 우리는 그녀가 자기만의 이름을 가진, 누군가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 그거 알어? 나 엄마 미워서 집나온 거 아니거든.

그때는 내가 엄마 미워하는지 알고 있었는데,

집 나와서 생각해보니까 세상사람들은 다 밉고 엄마만 안밉더라. 그래서 내가 미웠어.

나 내가 너무 미워가지구 막 살았다. 나 미쳤나봐.

그리고, 울먹이는 김양의 마음을 따라 카메라는 한산하게 비오는 거리와 깜빡이는 신호등과 거리에 앉아있는, 담배 피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비추며 점차 그 시야를 넓혀간다.  하지만, 돌아오는 아버지들과는 달리 김양의 어머니는 영화 속에서 돌아오지 않고 김양 역시 기분 좋게 한턱 쏘는 걸로 이야기를 갈무리하는데, 영화가 이렇게 김양의 이야기를 발전시키지 않고 우리 마음 속에 묻어주는 방식은 참으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