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OST - 耳をすませば (Whisper of the Heart, 1995) a film by 近藤 喜文 (Yoshifumi Kondo)

이박오 2012. 2. 26. 08:39

 

 

耳をすませば (1995) OST by Yuji Nomi

합창 버전 '컨트리 로드'가 삽입된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YvMn8H9tgjU

 

 

 

그러니까,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의 만화들을 접하게 된건 대학 1학년 때부터 였는데, 그땐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거의 모든 지브리 작품들을 대학 때 이미 한 번씩은 본 셈이다. 미야자키의 가장 유명한 세 작품들 나우시카, 토토로, 그리고 라퓨타는 물론이고, 붉은 돼지도 보았고, 다카하타 이사오의 헤이세이 너구리 전쟁(폼포코)과 추억은 방울방울도 보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온 미야자키의 작품 중에는 마녀의 택급편만 못 본 셈이고,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으로는 반디의 묘만 못 본 것이다. (나는 반디의 묘가 가장 늦게 나온 줄 알고 있었다. 어쨌건, 이 작품들이 ‘지브리’라는 데서 나온 작품은 줄은 몰랐었고, 단순히 미야자키나 다카하타의 다른 수많은 작품들 중 유명한 몇 편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 편 본 것이 바로 이 '귀를 기울이면' 인데,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몇 가지 점에서 지브리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사랑한다.

 

아니, 만약 기회가 된다면, 지브리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귀를 기울이면과 추억은 방울방울은 내가 가장 다시 보고 싶은 두 작품이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작품들에서 주제의식이 너무 드러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또 항상 일본 내부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종종 2인자처럼 거론되지만, 나는 그의 작품들을 무지 좋아한다. 미야자키는 드라마적 구성에 있어서 언제나 정공법을 쓰지만, 다카하타는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드러내는 메시지가 얼마나 명백한지를 알기 때문에 드라마를 더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감독이다. 마치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의 메시지도 설득력을 잃는다’라는 것을 알듯이, 그의 이야기의 모든 소재는 미야자키의 것처럼 모험이나 환상, 이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온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소재를 택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종종 노골적일정도로 명백한 주제의식을 드러낸 채 비이상적인 현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는 이러한 갈등을 어떤 사건이나 전개를 통해 실제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우리가 아닌 그들, 세상의 주인공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부터 다시 펼쳐서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너구리 전쟁과 추억은 방울방울을 무척 좋아했다. 이 작품들은 현실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주인공들도 그 속에서 걸어 나온다. 그들은 이상적이지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으며 사실 뚜렷한 의식 같은 것도 갖고 있지 않다. 다카하타 작품의 보석같은 지점은 이런 주인공들이 어느날 갑자기 밀려오는 현실과 과거 속에서 잠깐 자신을 다시 찾는, 물론 거듭나거나 뭔가를 깨닫거나, 변화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런 순간들에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그러니까, 그 속에서 사라져간다. 그의 상상력은 미야자키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과에서 효과를 빚어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답게 그의 작품들은 무척이나 따뜻하다. 나는 너구리 전쟁과 추억은 방울방울의 몇 장면들을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는데 (혹은 그렇다고 믿고 있는데), 너구리 전쟁에서는 역시 귀신들이 나오는 클라이막스 장면과 너구리들이 배를 타고 이상향으로 떠나는 장면,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시를 숲으로 만드는 장면들 (그 바로 다음에 그들은 다시 말없는 진짜 너구리들로 돌아간다) 이 있고 (사실 이 작품은 쉴새 없이 매력적이어서 볼 때 좀 정신이 없었다) 추억은 방울방울은 역시 유명한 장면, 어린 시절에 고백을 하는(혹은 못하는) 장면 (다카하타가 만들어낸 어린 아이들 캐릭터는 정말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는 캐릭터를 미야자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만화적으로 창조해내는데, 이건 너구리 전쟁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명한 그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 누가 이 장면을 잊을 수 있을까?

 

어쨌건, 추억은 방울방울에 대해 안타까운 점은 그때 음반을 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작품 음악이 참 좋았었는데. 디즈니에서 지브리의 모든 판권을 샀으니, 이것도 미국에서 몇 년 내로 다시 볼 수 있겠지만, 음반을 다시 구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귀를 기울이면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너무 감동을 먹어서 (그땐 정말 그랬다..) 덜컥 음반을 사버렸는데, 역시 음악이 좋았다. 콘도 요시후미가 감독이었는데, 지브리에서는 왜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만든 사람이 다시 작품을 만들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다카하타나 콘도 같은 사람들이 작품을 더 만든다면 지브리도 단순히 상상과 모험을 위주로 한 작품들에서 보다 우리와 닮은 현실로 나오는 작품들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재패니메이션은 이런 현실성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물론, 가사가 일본어라 싫어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서너가지 버전의 컨트리 로드를 나는 원곡보다 훨씬 더 좋아한다. 지브리 감독들의 특징 중 하나는 노래를 비중 있게 쓰는 데에도 있는데, 가령 추억은 방울방울의 예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노래나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서 나오는 노래들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생각해 보면 포르코 로소에서도 돼지의 연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던 것 같다. (붉은 돼지는 하야오가 힘을 빼고 만든, 엄청 상투적인 것 같지만, 묘하게 매력적인 작품이다) 내가 본 지브리의 작품들 중에서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반디의 묘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노래 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게 ‘아멜리아 갈리 쿠르치’의 음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갈리 쿠르치를 모르신다면 인터넷을 뒤져 보시길. 명망있던 소프라노 갈리 쿠르치의 음반들은 90년대 초에 소니-컬럼비아를 통해(이엠아이던가?) 대대적으로 복각이 되었던 적이 있다. 처음 반디의 묘를 보고 자막에서 갈리 쿠르치의 이름이 커다랗게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갑자기 그 모든 영화의 비정한 현실성이 복각음반 애호가들의 고상한 취미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 같아서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었다.[i] 나는 어쩌면 다카하타 감독 역시 복각음반 애호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자신이 어떻든 간에 그것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게 감독의 의도였던 것도 같다. 그 시대라도, 그런 노래를 즐기는 사람들은 교양있는 사람들이었을 테니까.

 

귀를 기울이면은 역시 상상력을 활용하는 방식이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다. 내용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가령 나는 이 컨트리 로드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잊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마리는 뚱뚱하고 퉁명스럽게 생겼는데 소녀가 처음 만난 이 고양이를 따라 지하철을 타고 언덕길을 뛰어가며 굴 같은 좁은 길을 지나 처음 보는 동네로 들어서는 장면, 그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어두운 좁은 통로로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소녀의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아른아른하다) 지루한 일상, 더디 가는 시간, 변함 없는 풍경, 무언가 현실 속에서 튀어나와서 자신을 사로잡았으면 좋겠다 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혔을 때, 바람처럼 살짝 나타나는, 유혹없이도 은근히 끌어 당기는 그 대상처럼, 혹은, 그냥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서 정처 없이 한가롭게 돌아다니던 중, 수수하고 멀기만 했던 현실이 갑자기 선명하게, 그래서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고양이는 어느 새 소녀 옆에 앉아 있다. (이런 것들을 마음대로 따라가 볼 수 있었던 쨍쨍했던 어린 시절은 얼마나 좋았던가!)

 

물론 두 번째 고양이가 사실은 더 유명하다. 전체적으로 고등학생들의 (중학생인가?) 이야기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단 한 마리의 상상 속의 고양이는 처음 뚱뚱한 고양이의 분신처럼 소녀를 현실에서 상상으로 이끌어 내지만, 그 방식은 매우 다르다. 소녀와 고양이가 손을 잡고 현실 속으로 갑자기 솟아난 푸른 탑들과 성들을 넘어 하늘로 날아오를 때, 밑으로는 자신 만의 상상, 그 이야기를 발견한 것에 기뻐하는 소녀가 계단을 뛰어내려 간다. 이 장면 하나 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멋지다. 이 고양이가 바로 음반 표지에 있는 고양이로 사실 이것은 첫번째 고양이를 따라가던 그 소녀가 그 대신 만나게 되는 길고 긴 이름을 가진 신비로운 장난감 인형이다.

 

나에게 이 작품은 '현실 속 도쿄의 평범한 한 소녀가 별다른 극적인 이유없이 일상 속 환상을 놓치지 않고 쫓아가 상상의 이야기를 펼쳐내 자신을 다시 이끄는' 방식으로 무척이나 신선했고, 지금 생각해도 신선하다. 귀를 기울이면은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러나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이 잃어버리기 쉬운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에 관한 영화이다.

 

* 원래는 다른 버전으로 올리려 했지만 (주인공이 반주에 맞추어 노래부르는 버전), 왠지 마지막 크레딧 버전이 더 맘에 들어서 바꾸었음..

 

 

 

 




 
 


[i] 일본의 오타쿠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배척하는 오타쿠의 이면에는 유럽 문물에 대한 최대의 골동품 수집광인 대부분의 일본 호사가들의 관습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아시아 최대의, 아니면 아시아에선 유일한, 게다가, 자신이 정복한 국가가 아닌 자신을 정복한 국가들의 문물을 탐식해버린, 역사상 가장 야심만만했던 제국주의 국가이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무턱대고 비판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 자신도 모르게 일본인의 욕망으로 문화의 거대한 자산으로 녹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대자본의 단순한 문화제국주의의 논리에 속박되어 버린 다른 모든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그러한 면에서 일본의 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독창적이고 깊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거의 모든 영화들, 다카하타의 이 작품,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 에서도 물론, 그러한 일본의 욕망은 고스란히, 어떤 때는 동경에 찬 모습으로, 어떤 때는 유럽인들보다 더 전문가적인 열정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광기어린 제국의 꿈을 박탈당한 (물론 현재에도 전혀 사라지지 않은, 뿌리깊고 끈질긴, 그 끔찍한 군사 ‘제국’ 일본의 모습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겠지만) 20세기 후반의 일본 문화, 가령, 미야자키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그렇게 ‘전략적’이거나, 혹은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문명의 유일한 주인이라고 언제나, 단 한 순간도 어김이 없이, 믿어왔고 그렇게 자기만을 고집하고 다른 문화에 대한 우월감, 혹은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거대하고 신화적인, 뿌리깊어 변하지 않는 진정한 제국 중국보다 (소련이 아닌 중국 본토가 갈라지는 그날을 소망해 보자), 혹은, 국가 지역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채 이리 저리 치이는 와중에 진정 아무것도 아닌 자본주의 식민지로 전락해가고 있는 대한민국보다, 약간 더 복잡하고 다원적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