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三十郞 Sanjuro (1962) a film by Akira Kurosawa (黑澤明)
‘첫사랑’과는 별개로 ‘대유괴’의 할머니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생각나는 거장의 영화로는 역시 구로자와 아키라의 '산주로'가 있다. 이 영화에는 할머니 대신 납치되었다가 구조되는 마나님과 그 딸 캐릭터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산주로는 그들이 어리버리하다고 투덜대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자기보다 더 대단한 힘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1. 죽이는 건 안 좋아요. – 뻘줌한 영웅들
뒷조사를 좀만 하면 알 수 있듯이, 산주로는 후속작을 만들기를 싫어했던 감독이 어쩔 수 없이 만든 드문 2편에 속한다 (단 하나는 아닌데 그의 최 초기 흥행작이며 내일은 유도왕 류의 스포츠(를 표방한 결투) 영화였던 스가타 산시로 2편도 있기 때문이다) 스가타 산시로의 경우도 그랬듯이, 1편에 해당하는 요짐보(用心棒, Yojimbo)가 워낙 국내(외)에서 폭발적 인기를 기록했기 때문에 영화사의 부탁도 있고, 마침 그도 어떤 사무라이 영화를 구상하고 있던 터라 주인공 캐릭터를 약간 바꾸어 산주로를 만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어떤 영화 속 사무라이는 칼 솜씨가 2류여서 순전히 재치로 승부해야 하는 그런 캐릭터였다는 점이다. 요짐보의 주인공인 산주로 캐릭터는 워낙 출중한 칼잡이였기 때문에 2편에서도 결국 전투나 결투 씬이 여럿 들어가게 되었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그가 머리를 써 9명의 젊고 혈기왕성하며 정의롭지만 수시로 바보가 되는 젊은이들을 구해주는 내용이다.
물론 두 영화가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산주로 캐릭터의 특성은 외톨이에 떠돌이 검객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일단 자신이 홀로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조성한 후에 칼을 뽑거나 일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즉, 요짐보 역시 칼싸움 위주가 아닌, 그의 현란한 두뇌플레이가 전면에 돌출된 영화이다. (요짐보는 숨은 요새의 세 악인(隱し砦の三惡人, Three Bad Men in Hidden Fortress) 과 더불어 오락 영화의 피와 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이 탄탄한 걸작으로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총잡이’(Fistfull of Dollars)의 원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영화는 확실히 다른데, 다른 것은 주인공에게서 드러나는 세계관이다. 두 영화 속 계략들은 사실 비교가 가능할 정도로 비슷한 수순을 따라가지만, 첫 번째 영화에서 그의 목표는 명백하게 자신이 경계에 있는 양 편 모두를 몰살해버리는 것이다. 그는 악인들이 이루고 있는 균형을 계속해서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이 서로를 죽이게 만든다. 그 영화에서 그가 가진 세계관은 일종의 ‘죽기 아니면 살기’로, 최적기까지 기다리되 일단 기회가 오면 깔끔하게 없애버리는 것이다. (따로 뒤처리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일을 한 번에 처리해야 한다)
반면, 산주로에서는 모든 상황이 좀 달라져 있다. 일단, 그는 외톨이가 아니라, 스스로 9명의 젊은이들에 붙어 10번째 멤버가 된다. 떠돌이도 아니어서 양편을 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한 편에 종속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서는 그가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 마치 감독이 원래 구상했던 2류 칼잡이 캐릭터를 살려내기 위한 듯, 산주로는 여기서 칼을 뽑기 싫어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칼을 쓸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캐릭터의 수정이 단순히 절충안 같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 영화와 어울린다. 이 영화에서 계속 멍청한 짓을 해서 산주로에게 과업을 부과하는 9명의 젊은이들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데도 그가 칼을 뽑는 쾌감을 퇴색시켜버린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젊은이들은 적이 오면 칼부터 뽑고, 위험에 처하면 칼부터 뽑고, 못미더우면 칼부터 뽑아보는 식이다. 이들이 이렇게 멍청한 행동만 했기 때문에, 그도 결국에는 쓸데없이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데, 그건 자신이 가진 경제성의 문제에 위배된다.
요짐보에서야 누가 잘못할 것도 없이 모두가 자기 책임이고, 또 모두가 적이라 이 경제성의 문제가 크게 드러날 것도 없지만, 이 영화에서는 실제의 적, 그가 죽여야 할 대상이 단 한 명도 없다. (그의 맞수 무로토마저 – 그를 능가하는 뛰어난 무사이기 때문에 - 그는 죽이고 싶지가 않다) 그는 단지 순수한 젊은이들이 바보처럼 죽어갈 것이 안타까워서 그들을 도우려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자꾸 원치 않는 살생을 하게 된다는 점이 미치도록 짜증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전면으로 드러나게 하며, 동시에 이 영화를 요짐보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캐릭터들 – 그래서 나중에 이 영화의 숨은 축 무츠타의 등장을 준비하는 이들 - 이 바로 마나님과 그 딸 캐릭터이다. 산주로 역시 쓸데없는 살생을 할 때마다 화가 나지만, 어쨌거나 필요하면 사람을 죽이고 보는데 반해, 마나님은 산주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절하게도 우리를 구해주신 분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주저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습관이에요.
즉, 모르고 보면 감명 깊게 볼 수도 있는 터미네이터 2편의 약속(사람을 죽이지 않는다)은 사실 구로자와 감독에게는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과도 같은 전제였다. (하지만, 그의 사무라이 영화들에서는 물론 항상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아예 의사가 주인공인 붉은 수염(Red Beard)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도 그는 제임스 카메룬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장이다.) 뭐 어쨌건, 다시 영화 속 두 명의 여성 캐릭터로 돌아와 보면, 그들은 심지어 사람을 죽이지 말아요 라고 애원하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쫓기고 있는 심각하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마치 어린애를 구슬르듯, 그건 나쁜 습관이에요 라고 간단하게 말하는 이들이 피 튀기는 이 사무라이 영화를 무지 귀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결론을 규정해 버리고, 또 세계관 마저 바꾸어 버린다.
산주로는 이러한 귀여운 여성캐릭터들이 부각되는 예외적인 영화로 보인다. 지저분하고 무례한 산주로는 이 귀부인과 숙녀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긁적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장면들이 이 영화를 전형적인 구로자와 감독의 남성적인 영화들과 구분 지어 준다. 사실 그는 단순히 남성적인 세계를 그리는 감독이 전혀 아닌데, 그가 가진 문제의식은 세 개의 셰익스피어 번안극(나쁜 놈이 더 잘잔다, 거미집의 성, 란, - 특히 란에서 그는 리어 왕의 세 딸을 세 아들로 바꾸어 버린다)에서 효과적으로 표출된다. 또, 추문, 조용한 결투, 백치, 들개, 이키루 같은 영화들에서는 여성 캐릭터들이 물밑에서 영화의 균형추 역할을 하며, 초기 걸작인 우리 청춘 후회 없다 에서는 아예 여성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오직 산주로에서만이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영화에 ‘의미 있는 웃음’을 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산주로와 두 여성의 대작장면은 매우 중요하고 또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다. 감독은 작정하고 이 장면을 웃기게 만들었고, 그래서 영화 전체에서 가장 멋진 장면으로 남게 했다. 예를 들어 건초더미를 사이에 두고 모녀가 고개를 꼬고 산주로를 쳐다보는 장면이라든지,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갑자기 건초더미에 파묻혀 사촌오빠와 함께 세상 모르고 잠든 경험을 나른하게 얘기하고 있다든지,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숙녀가 어떻게 월담을.. 하는 장면들은 경제적이고 전술적인 인간 산주로를 대책없이 뻘줌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산주로에게는 낭만에 빠질 시간 따위가 없기 때문에, 순간순간 이 모녀의 백일몽 같은 태도들은 위험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마나님이 다시 말한다.
당신은 뽑은 칼 같군요.
뽑은 칼?
그래요. 뽑은 칼이요.
당신은 칼집에서 나와 있어 뭐든 잘 베어요. 하지만 가장 좋은 칼은 칼집 속에 머무르는 법이지요.
해서, 사실 알고 보면 모녀는 산주로 자신의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요짐보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자신의 문제를 2편에서 산주로는 맞닥뜨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역시 모녀와 마찬가지로 교활하고 현명하지만, 모든 사건이 다 해결되었을 때 뻘줌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요짐보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는 갑자기 뻘줌해진 적이 있다)가 이제 그들에 의해 명확하게 인식된다.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단순히 경제적이냐 멍청하냐 정도로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실은 언제나 그런 위기 순간까지 몰고 갈 필요도 없다. 예외 없이 멍청한 9명의 실수로 구금되어 버렸고, 영화 속에서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되는 무츠타가 바로 그 방법을 행할 수 있는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터미네이터 2편의 여정이 모든 이야기의 원인 자체인 프로그래머(와 칩)을 찾기 위한 여행이듯, 여기서도 목적은 모든 살육의 원인 자체를 무화할 수 있는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터미네이터에서는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살육, 혹은 그것을 금하는 것에 어떤 낭만성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살육의 오락성이 주는 죄의식을 허구적으로 위안하려 한다. (애초 터미네이터가 살인병기라는 점, 즉, 그가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낭만성을 더욱더 부각시킨다. 터미네이터는 그래서 원치 않지만 동시에 대량 살육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만적인 영웅의 변태적 낭만성(살육은 하지 않되 모두 저격해버린다)을 극대화시킨다)
또, 이것은 요짐보와 황야의 무법자의 숨은 차이점이기도 하다. 마을을 초토화 시킨 후에 그는 뻘줌해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정의의 영웅으로 멋있게 마을을 떠난다. 그렇다면, 이 영화 산주로에서는? 낭만은 고사하고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여지도 아예 사라진다. 살육은 낭만적이지 않고, 멋있지도 않을뿐더러, 경제적이지도 않다. 1편에서와는 달리 2편에서 산주로는 자신이 결코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최선이라고 믿었던 임기응변의 무용담이 어떤 방식을 통하면 전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감독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구로자와 아키라는 2편을 통해 1편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2편을 또 하나의 걸작으로 만들어낸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보면 모녀 캐릭터의 영리함, 혹은 현명함은 그들이 계획을 짜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무츠타를 구하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젊은이들은 할 말을 잃는데, 산주로가 그 후에는 더 이상 무엇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즉, 그는 일을 어디서 끝내야 할 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동시에 같은 이유로 그를 구하지 못하면 이쪽에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되었을 때 마나님은 그래요 라는 맞장구 같은 것도 없이 바로 ‘그럼 잘 부탁합니다’ 라고 말하고 화제를 돌려버린다.
2. 당신은 바보군요! – 상대방의 헛점 드러내기
이런 식으로 영화 산주로는 1편 요짐보를 부정하는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1편에서 드러나지 않는 많은 빈자리들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령 요짐보에서는 그 혼자 계획을 짜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 묘미가 사건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지만, 2편에서는 계획의 과정이 계속 논의되고 가능한 결론들이 먼저 드러나기 때문에 관객들도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영화에 접근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런 과정은 계획의 임기응변적인 성격도 명확하게 드러낸다. 요짐보에서도 산주로에서도 계획이란 확실한 결론을 보장하지도 않을뿐더러 언제나 우연의 도움을 받는다. 그런 단점에 대한 자의식이 요짐보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산주로에서는 고묘 절의 속임수로 드러난다. 산주로는 적들을 속이기 위해 자신이 ‘고묘 절간 대문 2층에서 자고 있을 때’ 라고 말하게 되는데, 젊은이들은 막상 고묘 절 대문에는 2층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모두가 경악한 그 순간 누군가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꾀에) 속았듯이 적들도 속을 수도 있어.
실제로 적들도 속아서 대군을 고묘 절으로 급파하는데, 여기서의 핵심은 속임수란 그 자체의 완성도 보다도 상황이 갖는 긴박감에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감독관 기쿠이가 그 상황을 의심하려 하자, 겁에 질린 공모자들이 빨리 군대를 파견하라고 재촉을 해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뒤늦게야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들의 캐릭터도 결국에는 같은 방식으로 쓰인다. 요짐보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두 명의 여성은 영화에 꼭 들어맞지만 이야기의 필요에 의한 인물들인 반면, 산주로에서의 모녀는 한 이야기의 껍데기를 벗겨내는 역할을 해낸다. 그 일례가 되는, 영화 속에서 중요한 또 다른 장면이 바로 딸 치도리와 9명의 사무라이들의 리더인 사촌 오빠 로리의 대화 장면이다. 산주로가 무로토를 이용해 정보를 캐러 나간 후 젊은이들은, 역시 바보들인지라, 또 다시 그를 믿어야 하나 아닌가의 문제로 언성을 높이게 된다. 이 때 치도리가 등장, 왜 이렇게 시끄럽죠? 그 이유를 묻는데, 로리가 버럭 화를 내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소리치고, 그녀는 그냥 돌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버럭 화를 내는 로리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셈이 된다. 그래서, 치도리가 돌아가고 난 한 순간, 산주로와 마찬가지로, 로리 역시 마치 쓸데없는 바보짓을 하다가 엄마에게 들켜버린 아이처럼 뻘줌한 채 서있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젊은이들의 헛된 정의감의 문제 또한 갑자기 극명해진다. 산주로가 계속 바보들이라고 놀려대지만, 젊은이들은 계속해서, 마치 멍청한 황소같이, 사무라이로서, 귀족으로서의 가치관을 밀어붙이는데, 이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그들을 놀리지 않지만, 그는 이유 없이 폭발해버려 자신의 문제점, 바로, 바보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이렇게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헛점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전략이다. 애초에 산주로도 9명의 이야기를 흘려 듣던 중 사건에 끼어들게 되고, 그들이 사로잡은 적들의 경호원도 그런 방식으로 젊은이들의 언성에 끼어들게 되는데, 두 사람이 똑같이 하는 말은, ‘제 삼자의 입장에 설 때 사건이 더 명료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모녀 역시 주인공 산주로와 영화 전체의 빈자리를 지목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경호원이 다시 말하듯이 산주로는 이미 모녀를 존경하고 있었고, 그의 빈정대는 태도는 그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태도였을 뿐이다. 여기서 젊은이들과 산주로의 또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산주로는 자의식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래서 항상 표면을 꽤뚤어 볼 준비가 되어 있는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믿기 때문에 아무리 멍청한 원칙이라도 끝까지 고집하려 한다.
결국 영화는 산주로를 통해 젊은이들의 원리원칙의 헛점을 드러내고, 다시 모녀 캐릭터를 통해 산주로의 헛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감독은 이런 헛점 드러내기의 전략을 순전히 영화를 부정해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주로라는 캐릭터를 완성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그래서 2편을 통해서만이 1편의 기계적일 정도로 효율적인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하나의 윤리의식이 전면에 부상할 수 있고, 그것이 영화의 마지막이 갖는 자기 살해의 장면에서 완성된다.
3. 니가 뭘 알아! – 헛점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바보는 분노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산주로가 무로토와 대결한 후, 로리는 무사로서, ‘축하한다’라고 치하하는데, 이때, 산주로는 ‘바보 같은 녀석! 니가 뭘 알아!’라고 불같이 화를 낸다. 그는 왜 화를 내는 것인가? 그 이유는 단순히 죽이고 싶지 않았던 또 한 사람을 죽여야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산주로는 무로토가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기민하고 똑같이 교활하며, 똑같이 칼집에서 나와있던 칼이었다. 둘 다 낭인 (주인 없는 사무라이) 으로서의 고초를 느낄 만큼 느껴온 중년의 무사였고, 둘 다 세상이 잿빛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무로토를 베어 버린 후 기분이 더러운 것은, 그래서 요짐보의 마지막 장면과는 달리, 단순히 뻘줌할 뿐만 아니라, 메울 길 없는 어떤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죽은 무로토에게서는 아주 명백하게 자기 자신의 이러한 한 면모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짐보에서 무로토 같은 맞수였지만 비교가 안되게 더 저열한 역할을 했던 혈기왕성한 야쿠자 우노스케가 죽을 때, 산주로는 그를 자신과 동일시 할 필요가 거의 없었지만, 무로토는 분명히 자신의 분신과도 같다. (참고로, 두 영화에서 우노스케와 무로토는 같은 배우 – 나카다이 테츠야 – 가 연기했다) 그것이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더욱이 무로토는 자신의 모든 것(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산주로를 신임했지만, 산주로는 그를 철저히 배신한다. 그 둘의 관계에서는 사실 산주로가 더 기만적이다. 그 자신과 똑같은 악당인 무로토에게 스스로 더 나쁜 놈 역할을 했고, 마지막 대결에서는, 마치 무로토가 더 순정주의자 인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무로토는 이 순간, 어떤 경제성을 초월해, 자신의 신의를 져버린 산주로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이미 산주로는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어쩔 수 없이 무로토를 죽이는 순간 그가 깨닫는 것은 끝까지 그의 방식은 틀렸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의 방식대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는 결국 그와 똑같은 이들을 죽여야 하거나, 혹은 그 자신마저 죽여야 하는 악당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4. 현자와 바보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 바보가 되어 떠나는 영웅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무츠타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이 잘못되었음을 넌지시 지적하고, 바로 우스개로 넘어가 버린다. 동시에, 그는 산주로와 자신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까지 본다.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무츠타는 이 영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현명함을 가진 인물이다. 무츠타가 있는 곳에서 산주로는 할 일이 없어지고, 산주로가 활약하는 곳에는 무츠타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속 무츠타의 위치나 역할은 모녀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무츠타는 이 영화의 숨은 주인공으로써, 칼을 쓰지 못하지만, 지혜롭게 사태를 해결해 나가는 2류 칼잡이, 바로 감독이 원래 구상했던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 산주로에서, 그는 이야기의 숨은 의미로, 사건이 끝날 때 까지 구금되어 있는 존재가 된다. 무츠타와 산주로는 이렇게 서로를 빗겨나간다.
다시, 모녀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그들과 무츠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자리잡는 영화 속의 공간에 있다. 무츠타와 산주로가 사건의 중심에 존재한다면, 모녀는 항상 핵심에서 빗겨나가 그 헛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각지대에 위치한다. 그래서, 무츠타가 산주로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때 마나님은 그건 너무 심해요 라고 말할 수 있고, 산주로가 공격 신호로 집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할 때 딸은 불태우는 대신 동백꽃을 떠내려 보내는 건 어때요? 라고 말할 수 있다. 사건을 아예 없애버리는 무츠타와는 달리, 모녀는 사건의 의미를 바꾸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이 영화의 모녀는 ‘대유괴’의 할머니 같이 어떤 빈자리를 바라볼 수 있는 순수함과 현명함을 보여준다. 잡혀온 경호원을 입히고 먹여주며 그가 도망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들을 젊은이들은 너무 순진하다고 불평하지만, 실제로 모녀가 생각하는 것은 그가 도망칠 이유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호원이 9명의 젊은이들같이 헛된 원칙에만 얽매인 바보였다면 결국 눈 앞에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산주로는 그를 죽여버렸을 것이고 무츠타라면 그를 설득하거나 그냥 가두어 버렸을 것이다. 마나님의 행동은 순진할 지언정 멍청한 것은 아니다. 산주로는 이렇게 모녀가 가진 현명함을 볼 수 있었고, 또 그것이 자신의 방식보다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요짐보에서는 공백상태로 남았던 공간(악당들이 사라져버린 초토화된 마을)에 무츠타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 산주로는 자신이 더이상 돌아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일종의 영웅이지만 동시에 악당이며 낭인(로닌)이기 때문에 무츠타의 질서에 의해 재편성될 사회에 발붙일 수는 없다. 따라서, 산주로는 요짐보의 적자이지만, 동시에 종말을 고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산주로는 7인의 사무라이, 숨은 요새의 세 악인, 그리고, 요짐보로 이어지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시대 오락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산주로와는 달리 앞의 세 작품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새로운 갈등이 도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7인의 사무라이와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이 각각 계급과 국가에 관한 정치적 오락 영화라면 요짐보는 사회 전체를 오염된 것으로 보는 문제작이었고, 산주로에서는 그 모든 문제를 질서체계가 더 발달한 도시 공간으로 끌고 와서 갈무리 한다. 당연히, 산주로는 그의 마지막 찬바라 영화가 되었다. 2년 후, 그의 전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할 시대극 붉은 수염에서 이미 그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이었고, 후기에 만들어질 또 다른 시대극들인 카게무샤와 란은 다시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다룰 것이었다.
산주로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ZHIRcbAMF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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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썸머워즈(サマーウォーズ - 호소다 마모루) – 첫사랑 (初戀 – 하나와 유키나리) – 대유괴 (大誘拐 - 오카모토 키하치)의 여성 (주로 할머니 – 근데 왠 첫사랑??) 캐릭터 분석에 이어지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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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재미있는 문제는 외모에 관한 것이다. 영화 자체가 겉과 속의 차이를 다루다 보니 외모에 대한 성찰이 영화를 시작하는 큰 주제가 되는데, 말하자면 못생긴 무츠타가 결국 옳고 잘 생긴 키쿠이가 거짓말을 하는 반역자라는 식이다. 이것이 이 영화 속에서는 악한이면서도 도움을 주는 산주로 자신의 정체성과 합쳐져서 젊은이들을 교란하는 큰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에서 젊은이들이 얻게 되는 교훈은 단순히 못생긴 놈이 더 낫다 라는 식의 바보 같은 결론이 아니라 좋은 칼은 칼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떻게 보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 그리고 영화적으로는 산주로 같은 캐릭터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산주로는 좋고 무로토는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선택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감독의 다른 많은 걸작들처럼 문제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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