犬神家の一族 (The Inugami Family, Inugamike no Ichizoku, 1976, 2006) by 市川崑 Kon Ichikawa
1. 한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두 편의 같은 영화
이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물론 일본 추리 소설계의 엘큘 포와로 같은 존재인 킨다이치 코스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처음이자 (사실 그 전에도 몇 편 있었다고는 하나, 이 영화를 기점으로 동일배우(이시자카 코지) 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시리즈처럼 제작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세일러복과 기관총’ 같은 스타 영화들과 많은 뒷이야기를 지닌 카도가와 영화사의 출발작이자 미디머믹스 마케팅을 통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며 (1976년 판), 또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미묘한 마스크를 쓴 이누가미의 모습을 부각시킨 포스터 (2006년 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오노 유지의 음악이 너무 멋졌다. 2006년 리메이크 작을 볼 때에도 같은 음악이 흘러나와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영화의 내용은 거대 제약회사의 설립자 이누가미 사헤이가 죽으면서 가족들에게 남긴 정말로 이상한 유언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킨다이치 코스케와 변호사, 그리고 경찰들이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며, 여기서 정말 이상한 유언장이라는 것은 그가 자신의 세 딸과 손자, 손녀들이 아니라 자신의 은인이었던 노모미야의 손녀에게 전 재산을 남기되 오직 세 딸의 손자들 중 하나와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는 점, 그리고 등등이다. 킨다이치 코스케는 마지막에 명쾌하게 사건을 해결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죽을 사람은 다 죽었다는 킨다이치 시리즈의 전형적인 특색 (킨다이치 코스케의 (외?!) 손자라는 설정을 지닌 소년탐정 김전일 (金田一)은 사실 킨다이치라는 성을 우리 식으로 읽은 것이며, 김전일의 일본판 본명은 킨다이치 하지메이다)을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은 거장 이치카와 곤 감독에 의해 영화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 작품은 아마도 이치카와 감독에게 특별하게 개인적인 영화(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영화를 1976년(카도가와 영화사 창립작) 과 2006년 (30주년 기념작) 두 번 만들었으며, 의도했건 않했건 두 번째 작품은 그가 완성시킨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그런데, 30년 차를 두고 만들어진 두 영화는 놀랍게도 거의 정확하게 동일한 미장센을 지닌다. 마치 같은 콘티를 이용한 듯 매 장면과 시퀀스가 거의 들어맞는 데다가, 스타일과 배경, 음악도 같고, 킨다이치 코스케나 나스 경찰서장 다치바나 등의 캐릭터를 동일 배우들이 연기하기 때문에 30년 세월이 무색하게 같은 영화가 되었다. 두 영화는 서로 장면들을 뒤섞어 놓아도 크게 문제는 없을 정도로 거의 동일한 한 작품이다.
2. 아니면
물론 두 영화가 배우들만 바꿔치기한 동일 작품일 리는 없다. 잘 보면 미묘하게 다른 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야기가 달라진 것은 거의 없이 세부적인 수정이나, 주로 1976년 판에는 있는 내용들이나 장면들, 혹은 기법들이 2006년 판에는 없어진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 왜 그럴까?
이것은 이치카와 같이 스타일을 중시하는 감독으로서는 특히나 유별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버마의 하프[ビルマの竪琴: Burmese Harp]’도 두 번 만들었지만 (1956년작을 1985년에 리메이크), 흑백 로케이션 작품을 칼라로, 더 중요하게는 동반자이자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였던 와다 나토를 기념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반면, 이누가미가의 일족은 오로지 그 자신만을 위한 작품이다. 초기에서 그의 전성기까지 함께 했던 와다 나토는 83년 서거했지만, 이미 65년 절필을 선언했고 (그녀는 65년 이후의 영화 기법에서 더 이상 진실을 탐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치카와 감독 자신은 1963년 ‘유키노조 변화[雪之丞變化: Revenge of a Kabuki Actor]’ 같은 작품에서 이미 그의 후기작들을 대표하는 다채롭고 화려한 표현주의적 기법을 완성한 바 있었다.
아내 와다와 함께 했으며 그를 거장의 자리에 앉힌 그의 초 중기 대표작들은 보다 사실적이고 인간적이면서도 날카롭게 풍자적인 경향도 있었으나, 유키노조 변화 같이 사실성보다 이야기의 성격이 더 강한 60-70년대 작품들에서 이치카와 감독은 빛과 어둠, 칼라 대비를 사용한 연극적인 장면들과 편집기법들을 포진해서 이미지에 포인트를 주고, 프레임을 겹치거나 사라지게 함으로써 현실과 환상, 혹은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뒤섞이게 하는 마술적인 효과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와다의 영화매체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이때부터 그의 영화들은 사회적인 힘을 잃어 갔으며, 동시에 당시 일본 영화는 이미 매우 풍부한 스타일과 실험적인 편집기법, 그리고 화려한 색감의 전통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전회 자체가 대단히 성공적인 것이었다고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후기 이치카와 곤만의 장점은 이야기와 스타일의 두 축 사이에서 긴 호흡으로 무게를 잘 잡는다는 점에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그는 여전히 거장이라 불릴 만 했다. 90년대 이후 그의 영화들은 확실히 힘을 잃어갔지만(가령 ‘도라 헤이타[どら平太: Tora-Heita](2000)’ 같은 경우는 별다른 특징이나 재미가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80년대 중반, 후반기 경력의 절정(세설[細雪: Fine Snow aka. The Makioka Sisters](1983))에 이르렀을 때, 그의 영상은 더 이상 눈에 띄는 테크닉을 구사하지 않으면서도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용해시킬 수 있는 섬세한 힘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거의 당연히 76년 판이 더 흥미로울 거라는 생각이 들 텐데, 내 생각으로는 사실이 그렇다. 76년 판은 30년 후 그대로 리메이크 해도 될 만큼 긴박한 구성을 지닌 동시에 다양한 편집기법과 음향적 효과들이 사용된 작품이었다. 오히려 실험적인 효과들을 거의 전부 삭제하거나 톤을 낮춤으로써 훨씬 더 통속적이고 은근한 작품이 된 리메이크 작은, 그럼에도 동시에 이미 언급했듯 콘티를 그대로 살리고 대체로 동일한 장면을 재연함으로써 전 작품에 대한 자부심, 혹은 존경심 같은 것도 보여준다. 즉, 감독의 30년간의 기법 변화(과감한 기교를 자연스러운 이미지(이야기)의 흐름으로 대체)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동시에 그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도 보여주는 것이다.
3. 두 영화의 차이점 - 1 사소한 차이들
두 영화는 시작 부분의 근소한 차이와 (76년 작은 더 친절하게 이누가미 사헤이의 경력을 흑백사진들로 설명하면서 시작하는 부분이 삽입되어 있다) 몇 장면에서의 특기할만한 편집방식을 제외하면, 사헤이의 임종장면이나 은인의 딸 타마요, 세 딸들과 손자들이 소개되는 장면, 그리고 베일과 가면을 쓴 첫째 손자 스케키요의 등장, 그리고 전반부의 기선을 제압하는 격렬한 유언장 발표장면까지 동일하게 이어진다.
여기서 잠깐, 유언장 발표장면은 여러모로 매우 중요한 시퀀스로, 1. 스케키요가 두 개의 가면 (검은 베일과 하얀 마스크)를 벗고 추하게 변형된 얼굴을 드러내는 것, 2. 곧이어 발표된 유언장의 전혀 이해도 수긍도 할 수 없는 내용, 3. 발표를 중단시키며 끼어드는 가족들의 격렬한 언쟁, 이 세 가지가 모두 이 작품의 핵심을 응축한다. 다시 말하면, 1. 스케키요의 가면은 영화가 공포를 조성하는 방식 – 얼굴이 지니는 공포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2. 유언장의 내용은 사헤이의 숨겨진 비밀과 그 감정적인 무게를 파악해야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열쇠 역할을 한다. 3. 언쟁 장면의 특징은 각각 인물들이 서로 대사를 기다리지 않고 모두 맞물리게 내뱉는다는 점에 있는데 (자막처리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겹쳐지는 이 장면은 콜라주같이 컷 전환도 무척 빠르다) 그것이 이 작품의 들끓는 감정을 대변한다. 특히 사헤이의 유일한 손녀 사요코가 자신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고 울며 뛰쳐나가는 장면은 그 모든 비밀과 숨은 사연에도 불구하고 사헤이라는 인물이 결국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가족들의 이기심도 보여준다.
유언장 발표 이후 영화는 그 가장 큰 떡밥인 하인 사루조의 이상한 행동들과 마스크를 쓴 두 번째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본격적인 추리의 궤도를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쯤에서 슬슬 76년 작과 리메이크 작의 사소한 차이들이 나타난다. 우선 셋째 딸 우메코가 방에 앉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미닫이문이 넘어지면서 그녀의 경악하는 얼굴을 덮치는 장면 - 76년 작에는 있지만, 리메이크 작에는 없다. 하지만, 넘어진 미닫이문 뒤에는 그녀의 남편이 서 있는 별 의미는 없는 장면이다. 76년 작에는 계속해서 수수께끼의 두 번째 마스크가 묵는 여관 주인이 계단을 내려오다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서있는 부인을 보고 흠칫 놀라는 장면이 바로 연결되는데, 이 장면은 리메이크 작에도 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우메코와 미닫이문 장면은 사건 전개상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에 리메이크 작에서 잘려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이미지를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도적이고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영화의 이미지 흐름을 파악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전 장면들에서의 스케키요의 얼굴, 마스크를 쓴 두 번째 사내의 가려진 얼굴이 환기시키는 공포나 미스터리의 정서를 확대하는 장면들이 바로 미닫이문과 여관 주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미닫이 문 뒤에는 남편이 서 있을 뿐이지만, 그 얼굴은 마치 유령처럼 푸른 색을 발한다. 또한 여관 주인이 발견하는 아내는 산발 노파의 얼굴이다. 이 장면들은 또 곧이어 연결될 스케타케의 일그러진 얼굴이 꽂힌 마네킹을 보고 경악하는 킨다이치의 얼굴 - 그리고 아들의 살해 소식에 발광하는 둘째 딸 타케코의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사루조의 알 수 없는 얼굴, 더해서, 거기에 대비되는 무표정의 마츠코와 스케키요- 라는 지속되는 얼굴 시퀀스로 이어지면서 영화의 ‘얼굴’ 이미지의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리메이크 작에서는 이런 흐름이 잘려나가고 여관주인이 아내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마치 코미디 같이 바뀌어 오히려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더욱이, 76년 작에서는 그 이후 사라지는 여관 부인이 리메이크 작에서는 단정히 머리를 좀매고 심지어 여관을 조사하는 킨다이치와 대화까지 나누면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완전히 상실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두 영화는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가령 떡밥의 연장인 타마요와 사루조의 관계를 76년 작에서는 경찰들이 이야기하는 반면 리메이크 작에서는 후루다테 변호사가 설명한다든지, 76년 작에서는 경찰과 별개로 킨다이치가 자체 조사를 통해 여관에 접근하는 것과는 달리 리메이크 작에서는 제보를 받은 경찰을 따라 여관을 방문하는 것으로 조금씩 달라진다. 이런 변화들은 인물들의 동선을 바꾼다는 점에서 나름 중요하긴 하지만, 영화에서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단지 76년 작에서 킨다이치가 조금 더 능동적으로 보인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는 한동안 두 영화의 다른 점이 없다. 단, 둘째 딸의 아들인 스케타케에 이어 셋째 딸의 아들 스케토모마저 살해당한 후 서서히 사건의 윤곽이 잡혀가는 과정에서 76년 작은 킨다이치의 추리의 움직임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사들이 있다. (영화에서 킨다이치의 추리과정은 마지막에 그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할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킨다이치는 처음 사건을 의뢰한 변호사 조수가 살해당했을 때 이미 범인의 특성을 제한해서, 처음에는 타마요를 의심했고, 그 다음에는 담배를 피는 여성 (세 딸들)을 의심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이미 범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담배와 관련한 증거를 얻기 전까지는 확신을 유보하는데, 그래서, 자신만의 확증을 얻은 이후 도움을 준 고하루에게 ‘의뢰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후루다테 변호사는 살인사건과 무관한 담배나 사헤이의 과거에 집착하는 그의 수사 방향이 틀린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면들이 76년 작에는 있는 반면 리메이크 작에는 없다. (리메이크 작에서 킨다이치는 단순히 조사를 도와준 고하루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밥값을 내겠다고 한다)
계속되는 탐문에서 경찰은 세 딸이 밝히는 이야기에 따라 숨겨진 사헤이의 아들 아오누마 시즈마가 수수께끼의 두 번째 마스크이자 범인일 것이라 가정하고 검거에 집중하는 반면, 킨다이치는 유언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신관을 찾아가는데, 이 장면 역시 76년 작에서는 은인 노모미야와 사헤이의 관계가 동성연애가 아니었냐고 그가 먼저 물어보는 반면 리메이크 작에서는 신관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지금까지 나열한 것들을 정리하면, 76년작에만 있는 장면들은 1. 우메코가 놀라는 장면, 2. 킨다이치와 고하루, 후루다테 변호사와의 짧은 대화, 그리고 3. 킨다이치가 신관에게 묻는 한 장면인데, 첫 번째를 제외하고는 단지 몇 줄 대사 차이에 불과해서 특기할 사항이 못 된다. 단지, 그 과정에서 동선이 좀 달라지면서 76년 작에서는 확실히 킨다이치의 능동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리메이크 작에서는 반대로 그의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76년 작에는 정지 컷이 다양하게 쓰이며, 다른 몇몇 장면에서 인물들의 동선 같은 것들이 조금씩 차이 나고 (가령 타마요가 습격 당한 직후 76년 작에서는 제일 먼저 사요코가 달려오고 뒤이어 사루조가 들어오지만, 06년 작에서는 사루조만 나타난다), 세세하지만 중요하게는, 비슷한 장면에서도 대사들은 많이 다르다. 가령 76년 작에서 타에코의 이야기를 들은 경찰 서장은 욕망의 무서움 만을 언급하지만, 06년 작에서는 여자들의 원한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고, 76년 작에서 후루다테 변호사는 시즈마의 어머니가 공습에 의해 사망했다고 하여 이야기의 배경에 전쟁이 있음을 상기시키지만, 06년 작에서는 단순히 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는 식이다. 76년 작의 후반부에는 스케키요의 마스크를 제조하는 장면도 잠깐 들어가 있다.
4. 두 영화의 차이점 – 2 결정적 차이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고, 사실은 가장 중요한 차이를 결정하는 네 개의 장면이 더 있다. 그 중 셋은 1. 신관의 이야기에서 사헤이와 노모미야의 아내 하루요와의 정사를 보여주는 장면 , 2. 세 딸들의 이야기에서 아오누마 시즈코를 폭행하는 장면, 그리고, 3. 킨다이치가 사헤이의 원혼을 언급할 때 끼어드는 마츠코의 유년기 회상장면 이다. 이 세 장면은 모두 76년 작에만 있으며, 각각 다른 방식으로 편집되어 실험적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이다. 1번 장면은 사헤이의 숨겨진 감정과 은인의 엇갈린 관계, 그리고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되는 뒤틀린 사랑의 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2번은 아오누마 시즈마의 원한과 세 자매의 그로테스크하게 비뚤어진 욕망을 단번에 표출하는 장면이라서 중요하다. 감독은 1번 장면은 정사 장면을 흑백으로, 그것을 훔쳐보는 은인의 얼굴은 칼라로 보여줌으로써 관음증의 시점을 강조하며, 2번 장면에서는 다양한 기법을 동원해서 세 자매의 폭행장면을 마치 가부키 무용같이 바꾸고 기괴한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장면은 06년 작에서 완전히 삭제된 것은 아니고 아주 잠깐 등장하는데, 세 딸이 하얗게 분칠한 얼굴로 나타나는 76년 작과 다른 점은 그들이 그 위에 흰 마스크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76년 작과 리메이크 작을 다른 작품으로 구분지어주는 한 장면은 단연 마지막 3번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아니고 단지 킨다이치의 이야기 속에 갑자기 끼어드는 마츠코의 과거이다. 감독은 이것을 빛 바랜 옛날 TV화면처럼 푸르게 탈색된 필터링을 통해 보여주는데, 미적인 의도성을 강조해서 왜곡된 이미지를 사용하는 앞의 두 장면들과는 달리 이 장면은 별다른 기교 없이 현실적으로, TV비디오 화면의 질감을 통해 재현된다. 마치 마츠코의 마음 속 빗장을 열고, 갑자기 그 밑바닥에 숨어있는 (어쩌면 마츠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상실감을 꺼내 보여주는 것 같은 장면이라고 해 볼 수도 있다.
5. 이누가미 가의 일족 – 1950년
이제 이누가미가의 일족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유명한 것이며, 왜 요코미조 세이시의 대표작이 되었을까? 또, 이치카와 곤이 만든 두 편의 영화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작품의 스케일은 의외로 크지만 동시에 그 근본은 결국 한 사람의 유산이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이다.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이누가미 사헤이는 떠돌이 고아로 시작해서 동성연애자의 연애상대가 되었다가 그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사랑을 잊지 못한 채 욕망을 남용하며 살아간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성공의 배경에는 전쟁이 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은인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딸은 은인의 딸로, 그의 손녀(타마요)는 은인의 손녀로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그의 세 딸은 사랑 없이 욕망 만으로 얻어진 배다른 딸들이기 때문에 그 손자들(스케키요, 스케타케, 스케토모)도 버려진 자식들이었으며 오로지 유산 상속을 위한 소모품이 된다. 말년에 그가 얻은 단 하나의 아들(시즈마)은 직공의 아들로 역시 버려진 채 살아야 했다. 오직 시즈마만이 가문의 세 개의 가보(국화,고토(현금), 도끼)를 물려받았으나 다시 세 딸들에 의해 뺏기고 추방당한다. 놀랍게도, 사헤이의 욕망의 자식인 (손자) 스케키요와 추방된 자식인 (아들) 시즈마는 거의 동일한 외모를 갖고 있었고, 사헤이의 성공의 발판이 된 전쟁이 두 아들들에게는 그 모든 비극과 저주의 원인이 된다. 반면 스케키요와 타마요는 서로 연인관계가 됨으로써 일말의 구원의 희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렇게 복잡한 멜로드라마적 관계는 동성애와 불륜, 근친상간을 통해 더 강화된다. 모든 사건의 원인은 은인인 노모미야가 동성애자였다는 점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헤이는 노모미야의 묵인 아래 하루요와 불륜을 나누지만 밀회 이상의 관계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반면, 이렇게 좌절된 욕망을 지녔던 그의 손자 손녀들은 근친상간의 늪으로 빠져든다. 예를 들어 가장 잔인하게 버림받는 희생자인 손녀 사요코는 사촌 스케토모와 불륜관계이며, 그에게서 버려지고, 그럼에도 그의 죽음을 목격하곤 미쳐버린다. 스케키요와 타마요의 관계 역시 사헤이에게는 희망일지 몰라도 (숨겨진) 근친상간을 통한 구원이 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스케키요와 바꿔치기되는 아오누마 시즈마의 경우는 사실 스케키요의 어머니 마츠코와 이복남매 지간이므로 두 사람이 어머니와 아들을 연기하는 장면은 무척 음울하고 경악스러울 수 밖에 없다. (즉, 마츠코와 시즈마의 (남매)관계는 스케키요와의 (모자)관계와는 전혀 다른 근친상간의 관계를 성립시킨다. 그래서, 나중에 마츠코와 시즈마의 대결 장면이 가진 힘은 더욱더 강력해진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세 가족이 얽혀 있지만 (노모미야가문의 타마요, 이누가미 가문의 세 아들들, 그리고 아오누마 가문의 시즈마), 결국 드러나는 것은 세 가문 모두 이누가미 사헤이라는 한 사람의 씨를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다. (킨다이치는 이 가족의 가계도를 그린다) 이렇게 복잡해 보이면서도 단일성을 지닌 가계도가 인물들을 사헤이의 원한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연결고리 속에 가두어 버린다. (킨다이치는 사헤이의 욕망과 그 힘을 느낀다) 인물들은 각각의 의도를 향해 잔인하게 나아가지만, 결국 킨다이치가 말하는 대로 이미 7개월 전 사망한 사헤이의 의도를 실현시키는 꼭두각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헤이는 사루조가 만드는 국화 인형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밀실 살인 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답답하게 갇힌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가령, 시즈마가 연출해내는 국화, 현금의 살해는 마치 우메코의 국화, 타케코의 현금 같은 식으로 세 딸들에게 연결되어 결국 마츠코의 도끼로 끝나게 되며, 희생자들은 세 아들들이다. 연쇄 살해의 마지막 희생자는 바꿔치기 된 자라는 점에서 더욱 더 숙명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거기에는 가장 올바른 아들과 가장 저주받은 아들이 같은 신체조건을 지니고 있었다는 역설과 그들이 뒤틀린 근친상간(모자, 혹은 남매)으로 얽힌다는 점들이 모두 연관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시즈마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미친 듯이 웃을 때 마츠코가 느끼는 공포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동시에 이 모든 욕망의 그물을 헤쳐버릴 출구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물론 스케키요이다. 마치 ‘버마의 하프’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 ‘스스로 버려진 자식’은 버마 전선에서 자신의 부대를 전멸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밖으로 떠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그의 잘못이 아니다 (전쟁 윤리는 일상의 윤리와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 상정한 죄책감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방랑자가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바로 그런 ‘모든 것을 버리는 태도’에 의해서만 사헤이의 분출되지 못한 욕망의 저주는 해소될 수 있다 (혹은 그러한 믿음이 전후 일본을 지배했다).
스케키요는 집에 돌아오지 않음으로 해서 이번에는 그의 가족을 전멸시키고, 죄책감에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만,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사헤이가 뿌린 악의 씨앗을 거두는 역할도 하게 되는 것이다(가족 윤리는 욕망의 윤리와 또 다르다). 그리고, 그가 대속하려던 죄를 킨다이치가 바로잡아 시즈마와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줌으로써 모든 사건은 마침내 올바르게 해결된다.
하지만, 친족의 욕심에 의해 살해당한 아들들과 연속해서 버려지고 미쳐버리는 딸, 그리고, 그 자식들의 어머니들이 품게 될 그 깊고도 큰 원한들이 이런 식의 구원으로 묻힐 수 있을까?
6. 이누가미 가의 일족 - 1976년
따라서, 이치카와 곤이 이 작품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그 방향을 약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가장 탐욕스러운 세 인물들을 모두 부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76년 작에만 있는 것이 바로 중요한 세 장면들이다. 1번은 사헤이의 단 하나의 진정한 사랑이 뒤틀리는 과정을 노모미야의 시점을 통해 비틀어서 보여주며, 2번에서는 시즈마의 공포와 원한을 오히려 가해자인 세 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시 비틀어진 각도로 보여준다. (세 딸은 자신들의 악행을 고백하지만, 하얗게 분칠한 그들의 얼굴은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연극의 부품들이었던 양, 변명하는 듯한 느낌도 주게 된다. 물론 시즈마의 입장에서 그런 것은 단지 변명일 뿐이지만). 3번에서는 어린 마츠코가 느낀 상실감을 간단하게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3번이 중요한 이유는 마츠코의 행동의 동기가 영화의 액션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아마 원작 소설에서 그것은 결국 사헤이의 원혼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반복해서 바라보고 기도하는 이누가미의 신단과, 유령처럼 겹쳐지는 사헤이의 데드마스크, 마지막에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박살나는 액자 같은 것들이 마츠코를 단순히 사헤이의 욕망의 피해자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가령 법적 용어로 하자면 마츠코는 일시적으로 미쳤다 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치카와 감독은 3번 장면을 통해 마츠코에게 사헤이의 원혼만이 아닌 그녀만의 동기를 첨가한다. 그리고, 그것은 원작에 특별히 위배되지도 않는다. 이미 그녀와 어머니와의 특이한 관계가 이런 동기부여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특별히 그녀가 버림받는 비정한 추억을 숨겨진 과거 속에서 도려내 직접 꺼내 보여주는 것은 그녀의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광기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장면은 마츠코의 이야기가 아닌 킨다이치의 추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즉, 이 장면 역시, 결국은 1번이나 2번처럼 뒤틀어진 장면이다. 이 장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마츠코가 아니라 킨다이치이다. 마츠코 자신은 결코 자신의 유년의 슬픔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비밀의 핵심을 킨다이치의 추리 속에서 튀어나오게 했기 때문에 이 장면은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 (가령 ‘지구를 지켜라’의 마지막에서 죽은 신하균의 과거(기억)이 우주(TV 모니터 속)을 떠다니는 장면이 영화 전체에 주는 효과나 ‘My Own Private Idaho’에서 리버 피닉스의 기억이 캠코더 비디오 장면으로 반복되는 것들을 생각해 보라) 리메이크 작에서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 마츠코는 인형이나 피해자라기 보다는 더 복잡하고, 매력적이다.
7. 이누가미 가의 일족 – 2006년
그렇다면, 리메이크 작은 비교적 더 재미나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감독이 원하는 것은 인물 중심에서 이야기 중심으로 작품을 돌려 놓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밀하게 축소되는 킨다이치의 역할과도 연관된다. 3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감독은 최대한 많은 감정들을 숨기려고 작정한 것 같다. 그래서, 사헤이의 욕망만 남고 다른 인물들의 욕망은 이미지나 효과의 단절과 파격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관성과 흐름으로 승화된다. 물론,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결코 눈에 띄게 큰 차이들을 만들지는 않는다. 킨다이치는 여전히 독립적으로 수사하고, 인물들의 행동에도 변함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두 영화는 정말 거의 같다. 하지만, 작품의 미묘한 감정들은 분명히 이런 식으로 조금씩 절제된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사실 후기로 갈수록 실험보다는 이야기의 흐름 그 자체가 가진 힘에 충실하게 집중하려는 감독의 작품 성향의 변화와 일치하는 바가 있다.
더 중요한 점은 두 버전의 영화들이 가진 미묘한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 두 영화가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감독은 왜 같은 방식으로 리메이크 작을 만들었을까? 아무리 구성이 괜찮았다고 해도, 2006년과 1976년의 영화 제작 방식은 하나부터 열까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는 데도 말이다. 결국, 그것은 76년 작,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한 향수에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두 영화가 다른 마지막 장면은 그 엔딩으로, 오직 이 장면에서만 2006년 작품이 더 길게 각색되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길을 떠나는 킨다이치 코스케의 모습이다. 76년 작에서는 변호사에게 수고비를 받고 사람들이 환송하러 올 거라는 말에 도망치듯 나서는 킨다이치가 나스 역에 도착해서 막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떠날 때 갑자기 영화가 끝난다. 하지만, 2006년 작품에서는 변호사가 환송회를 준비했다고 하고는 잠시 집안으로 들어간 사이 킨다이치가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곧이어 사람들이 선물들을 들고 도착하면, 카메라는 다시 시골 길을 걸어가는 킨다이치의 뒷모습을 보여주는데, 하염없이 쭉 뻗은 길 중간에서 멈춰선 그가 돌아서서 관객들에게 목례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면 암전된다.
그러고 보면 76년 작의 마지막은 정말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강하다. 변호사는 정해진 비용 외에 자기 돈으로 성의를 표시하려 하는데, 킨다이치는 좀 더 빨리 범인을 찾아내지 못해서 다섯 명이나 죽었다고 사과하면서 돈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역에서 떠날 때는 아무 음악도 없이 기차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우에노 행 열차가 곧 출발한다는 방송이 들리고, 급하게 플랫폼으로 뛰어든 킨다이치가 프레임 밖에서 막 출발하는 열차에 서둘러 올라타면서 역시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고 화면이 정지한 채 그대로 끝난다.
그러니까, 첫 번째 영화에서 그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케키요와 마츠코를 구원해서 사건을 완전히 해결하고, 후에 스케키요와 타마요가 맺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 도망치듯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히트함으로써 역량이 쇠퇴하고 있다고 여겨지던 감독의 대중적 명성은 어느 정도 회복되고, 그는 같은 배우들을 써서 연이어 네 편의 킨다이치 코스케 영화들 (악마의 공놀이 노래[悪魔の手毬唄](1977), 옥문도 [獄門島](1978), 여왕봉 [女王蜂](1978), 병원 비탈의 목매는 집[病院坂の首縊りの家](1979))을 더 만들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그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장면은 어쩌면 앞으로 지속될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반면, 2006년의 리메이크 작품은 감독이 이러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작품과 작품 속 인물들을 추억하고 다시 환기시키는 의미를 지닌다. 아닌 게 아니라, 76년 작을 아는 사람들은 리메이크 작에서 같은 향수 어린 음악을 배경으로 같은 거리를 똑같은 차림으로 걸어오는 킨다이치 의 기적 같은 모습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며, 그가 고하루를 따라 들어가는 나스 호텔에서 역시 같은 노래 ‘도쿄 부기우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면 반갑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히 뭔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지난 날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리메이크 작은 시작할 때부터 킨다이치가 돌아보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오프닝에서 그는 자꾸 걸어가다 말고 멈춰서서 카메라를 향해 돌아선다.
76년 작에서 프레임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젊은 킨다이치와는 달리 (76년 작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텅 비다시피 한 나스 역의 플랫폼 장면이다) 2006년 현재의 그는 마치 이 영화가 ‘50년 전 전후 세대의 이야기를 30년 전 영화로 보여준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듯, 잠시 걸어 나왔다가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그만의 이야기들 속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 결국 아리송해 하는 사람들 앞에서 변호사가 중얼거리는 말은 ‘그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군 (그 사람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이 되었군)’이다.
1976 년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GeGzDDwcHk0
2006 년 트레일러
http://www.nipponcinema.com/trailers/the-inugamis-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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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06년 작이 지닌 의미는 캐릭터에서 이야기로의 회귀로, 캐릭터에 중점을 둘 경우 이야기의 흐름이 캐릭터들이 가진 진실들에 의해 흔들리는 반면, 이야기에 중점을 둘 경우 캐릭터들이 이야기의 요소들로 작아지면서,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회귀가 바로 와다 나토와의 공조체제 이후의 이치카와 곤이 찾아낸 자신만의 색깔이다. 그래서, 그의 후기작들은 날카로운 사회성 대신 멜로드라마적 통속성을 얻었고, 더 이상 걸작은 없었지만, 큰 호흡을 가진 느리고 유장한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다. ‘세설’은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설’ 이외에 이러한 그의 경향이 영화의 핵심을 결정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는 ‘47인의 자객 [四十七人の刺客: 47 Ronin](1994)’이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상당히 놀라운 방식으로 일본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를 그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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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개인적으로 76년 작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기교적 측면 때문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캐스트와 연기가 더 좋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볼 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결국 주인공이 타마요나 스케키요, 혹은 시즈마가 아니라 바로 마츠코 라는 점이다. 그리고, 76년 작은 이 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76년 작에서 마츠코를 연기하는 다카미네 미에코의 외모 (얼굴과 눈이 크고 육중한 중년 부인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다) 와 연기는 마츠코가 가진 탐욕스러움과 삶에 대한 욕망, 그리고 상실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을 강조해 보여주듯 무게있고 활력이 넘친다. 반면 2006년 작에서 마츠코를 연기하는 후지 스미코의 연기는 훨씬 더 지적이고 절제된 위엄이 있으며 섬세하다.
또, 76년 작의 인물들이 아무래도 오리지날이라고 할 수 있다. 킨다이치 코스케를 연기하는 이시자카 코지와 경찰 서장을 연기하는 카토 타케시는 리메이크 작에서도 다시 등장하지만, 역시70년대에 계속 이어지는 시리즈의 주역들이기도 하고, 역시 같은 역할로 재등장 하는 신관 역할의 오타키 히데지 같은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단 동일한 연기자라도 30년 후에는 너무 늙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가령, 카토 타케시의 특유의 각진 얼굴은 늙으면서 많이 둥글둥글해져서 리메이크 작에서는 76년 작에서 그가 갖고 있는 경찰 서장 특유의 나사빠진 히틀러 같은 (?) 이미지가 거의 없어졌다. 또, 그렇게까지 늙어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환갑을 넘긴 배우 이시자카가 킨다이치 역으로 후루다케 변호사의 임시 조수로 소개된다든지 타마요의 미모를 강조하는 장면 같은 것들 역시 왠지 좀 나이에 안 맞는 감이 있다.. )
그 밖에도 76년 작의 캐스트는 전체적으로 매우 좋다고 여겨진다. 아니면, 감독은 이 작품에서 모든 배우들이 절제 없이 연기하도록 허락한 것 같다. 가령 리메이크 작에는 ‘링’의 마츠시마 나나코(타마요 역)나 ‘불량공주 모모코’의 후카다 교코(고하루 역)등이 출연하지만, 둘 다 76년 작의 배우들이 가진 매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대체로 딱딱한 연기로 일관한다. 그리고, 이 점은 타케코와 우메코 역을 맡은 배우들도 마찬가지이다(재미있는 점은 76년 작에서 타케코 역을 맡았던 산조 미키가 06년 작에서는 마츠코의 어머니로, 우메코 역을 맡았던 쿠사부에 미츠코가 06년 작에서는 고토 선생 역으로 다시 나온다는 점이다). 76년 작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난입해서 난장판이 되는 유언 발표장의 격렬한 느낌이 2006년 작에서는 왠지 정리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마 비슷한 연유일 것 같다.
단, 2006년 작에서 마스크를 쓴 스케키요 역은 76년 작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이 역시 단순한 연기의 차이라기 보다는 연출에 의한 변화일 텐데 (흰 마스크를 쓴 얼굴은 06년 영화 포스터에도 대대적으로 이용된다), 그의 얼굴형과 입을 씰룩거리는 특유의 움직임 (마스크를 얼굴 피부와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 하는 행동) 들이 06년 작에서 특히나 괴물같거나 수수께끼 같은 무표정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만은 06년 작이 가진 확실한 장점인 것 같다. 그 밖에, 06년 작의 의미란, 역시 추억의 배우들이 다시 나오는 하나의 이벤트로서, 엔딩 장면에서의 킨다이치의 움직임 같은 것들은 이 영화를 하나의 아련한 추억으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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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숨은 카메오로는 76년 작에서 나스 호텔 주인 역으로 나오는 원작 소설작가 요코미조 세이시가 있고, 06년 작에서는 같은 역할을 ‘라디오의 시간’의 감독 미타니 코기가 맡아서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한다.
76년 작에서 후루다테 변호사 역을 맡은 오자와 에이타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비열한 악역으로 자주 나왔던 배우로, 이 영화에서는 일종의 연기 변신을 했는데, 역시 매우 성공적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경찰서장 역할의 카토 타케시 역시 원래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감초 배우 중 하나였다.
2006년 까지 변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이시자카 코지는 킨다이치 코스케를 연기한 대표적인 배우가 되었지만, 이치카와 감독의 단골 배우였던 그의 다른 매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은 역시 감독의 섬세함이 극에 달한 ‘세설’일 것이다.
76년 작에서 단역 고토 선생 역으로 키시다 교코 가 출연하는데, 이 배우는 오즈의 ‘꽁치의 맛’에도 등장하고, 더 중요하게는 히로시 테시가하라의 ‘모래의 여인’이나 ‘타인의 얼굴’ 같은 작품들과 다른 많은 영화들에서의 여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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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중독성이 강한 음악으로 더 인상 깊은데, 이는 음악을 맡은 오노 유지가 ‘루팡 3세’ 같은 작품들의 음악을 맡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히사이시 조나 가와이 겐지의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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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이 영화는 일본의 아가사 크리스티라고 할 수 있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을 가장 성공적으로 옮긴 사례가 되었는데, 이런 정통 추리소설 장르 영화(혹은 소설)이 우리나라에는 부재하는 것 같다. 뭐 대강 생각해보면, 없다기 보다는 영화계에서 활성화 되지 못했다고 할 수 도 있을 터이다. (김기영의 ‘하녀’나 이만희의 ‘마의 계단’ 같이 그 시대의 최첨단 스릴러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특히 아쉬운 일이다) 근래 작품에는 조선 명탐정이라든지, 그림자 살인 따위들이 있기는 한데, 제대로 된 추리물 이라기엔 추리는 빈약하고 잡것들만 다량으로 섞여 있다.
반면,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로는 추리물 보다는 앞서 말한 스릴러 계열이나 (가령 ‘해피 엔드’ 같이 치정 살인을 다룬 영화나 ‘범죄의 재구성’같은 범죄 오락물들) 경찰이 무력하거나 부패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이나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마더’ 같은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되었다. 나름 특이한 수사물로는 장진의 ‘박수칠 때 떠나라’ 같은 것이 있는데, 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몇몇 장면들이 대체적으로 김빠지는 어정쩡한 설정 속에 배치된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거나, 정통 추리물의 부재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을 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영화이다. 원신연의 ‘세븐데이즈’ 같은 경우는 좋은 구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정통’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수 없는, 여러 가지 선정적인 (관객의 흥미유발을 목적으로 하는 과도한 이야기 뒤틀기) 설정이 많은 근래의 스릴러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오히려 잘 만들어진 정통 수사, 추리물로는 시대극인 김대승의 ‘혈의 누’와 김미정의 ‘궁녀’같은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황당한 설정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궁녀는 추리물이라기 보다 공포물에 가깝다), 그 이야기의 정서를 이해한다면 오히려 요코미조나 크리스티 같은 작가들이 갖고 있는 밀실이나 원한의 정서와 비슷한 감성을 지니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누가미가의 일족에서 경찰 서장의 대사 중에는 ‘인간이란 좋은 놈하고 나쁜 놈 밖에 없는 거죠’ 라는 대사가 있는데, 킨다이치의 역할은 바로 그런 관점이 지닌 맹점을 파헤치는 것이며, 이러한 작품들에서 탐정의 역할 역시 단순히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야 끝난다). 가령,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을 영화화한 대표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같은 작품은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작품들에 결여된 군더더기 없이 복잡하면서도 완벽한 구성의 대가적 오락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치콕의 가장 복잡한 작품들이 지닌 정서와도 또 다른 어떤 특이한 원한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작가들의 추리물들은 언제나 깊이 있는 공포물과의 경계선상에 얹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1980년대에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 같은 작품은 근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힘이 있는 정통 수사물의 색채를 띠고 있었지만 이 작품은 세계에 알려지기는커녕 검열에 난도질 당하고 원본이 아예 소실될 뻔 했으며 아직도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사실 이 영화는 근래에 복원되었다)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대단한 작품들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난도질하고 모욕하곤 했던 당시 정부의 엄정한 위엄 앞에는 아직도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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