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The Day of the Jackal

이박오 2012. 2. 21. 09:49

 

The Day of the Jackal (1973): A Fred Zinnemann film

 

 

              

 

1.     자칼의 도덕성

알제리 독립과 드골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오스트리아, 이태리, 프랑스와 영국을 넘나드는 범유럽적 배경, 영국신사의 모델 같은 귀족적인 이미지의 주연 배우 에드워드 폭스와 흰색 알파 로메오 스포츠 스파이더, 프랑스 내무부와 경찰들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숨가쁘게 끈질긴 추적의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프랑스 해방일의 스펙타클한 클라이맥스까지,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프레드 진네만의 영화 자칼[The Day of the Jackal]’은 매우 스케일이 크면서도 꼼꼼하게 만들어졌으며, 동시에 우아할 정도로 섬세하고, 또 고독한 영화이다.

영화의 내용은 내용 만은 - 간단하다. 영화는 자칼의 고용으로 시작해서 드골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순간까지 그대로 일직선으로 내달린다. 물론, 거기에는 OAS(드골 암살을 계획한 극우조직)의 첩보전과 스코틀랜드 야드, 그리고 프랑스 경시청의 추적전이 흥미진진하게 병치되지만, 이 영화를 규정하는 인물은 분명히 자칼이다. 그리고, 자칼을 규정하는 특성은 그의 세심하고 치밀한 암살 및 신분위조의 준비과정에 있다.

사실 이 준비는 너무나 치밀하게, 그리고 계획적으로 구성되어서 영화를 처음 보면서 그 준비과정을 유기적으로 모두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정도이다. 왜냐하면, 자칼의 모든 행동들은 이미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이상의 한계상황이나 변수에 대비한 모든 가능성을 사전에 계산한 후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칼을 좇는 형사들의 뛰어난 수완이 아니었다면 사실 그는 변장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는 고지식할 정도로 꼼꼼하고 완벽하게 2, 3차 변장을 준비한다. (그는 프랑스 경찰의 정보력을 높이 산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꼼꼼한 신분위조에는 하나의 분명한 원칙이 있다. 절대 임기응변으로 사람을 만들어내지 말 것. 가령, 그는 호텔 방명록에 아무 이름이나 써 넣지 않는다. 그의 본명은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남기는 이름들은 죽었건 살아있건 존재하지 않았던 간에 그 시각 그가 변장한 어떤 대상의 정직한 이름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당연한 것으로 규정하는 어떤 규칙 같은 것이며, 자칼의 꼼꼼함은 그런 배경 속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가령 미국 모텔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방명록에 아무 이름이나 끄적거리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사회라면, 또는 아예 여권 자체를 위조해버리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자칼의 꼼꼼함이나 경시청의 수색작전은 처음부터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자칼은 예정에 없는 변칙 같은 것은 허락하지 않기 위해 모든 상황을 사전에 고려한다. 그리고, 단순히 숨어 다닐 것이 아니라 위조한 신원을 최대한 이용할 것. , 변장자의 정체성을 감추거나 버리지 말 것. 자칼은, 혹은 이 영화는, 이런 점에서 도덕적이다.

가령, 그가 처음 위조한 영국인 폴 올리버 더간은 유아사망자이며, 덴마크인 펄 린퀴스트는 실재하는 교사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장하는 프랑스 참전 용사는 경찰 저지선너머에 위치한 암살장소에 사는 (것으로 꾸민) 거주자이다. 그는 이 개개의 인물들로 완벽하게 변신하기 위한 준비를 이미 끝내고 나서 프랑스로 이동한다. 여행 중에 만나는 현지인들을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며, 필요할 때는 간단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죽인 사람들 중 둘(몽펠리에 부인과 줄 버나드)은 특히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이용했는데, 거기에는 로맨틱한 요소가 있다. 

                        

                                  

2.     자칼의 로맨스

자칼의 로맨스는 사실적이지만 그래서 더 특이한 구석도 있다. 가령 우리는 자칼과 제임스 본드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제임스 본드는 대체로 자칼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상한 영국 신사의 외모(요새 제임스 본드는 그렇지도 않다) 를 하고 있겠지만, 그의 매너는 좀 더 헐리웃 스타에 가까워서, 능숙하고 편안하게 여자를 낚아채는 선수 기질이 있고 (요새 제임스 본드는 그렇지도 않다), 로맨스는 그를 위험에 빠뜨리면서도 그와 관객 모두를 달콤한 유혹과 상상으로 달아오르게 하는 양념 혹은 샴페인의 역할을 한다(요새.. 알지?). 반면, 자칼이 몽펠리에 부인(델핀 시릭)을 유혹하는 과정은 누가 보아도 쉽지가 않다. 목격자 모두가 그렇게 증언하고, 심지어 자칼 자신도 전혀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한다. 몽펠리에 부인은 결국 자칼과 동침하지만, 그 관계는 달콤한 상상이나 언변이 아니라 그냥 육체적 필요에 의해 성립된다.

줄 버나드와도 이런 관계는 마찬가지이다. 신분이 노출되었고 경찰의 추격이 있다는 것을 안 이후에 그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로 보아 (1. 차를 도색하고 번호판을 바꾼다 2. 교통사고를 당해 부상당함 à 몽펠리에 부인을 이용한다 à 열차를 타고 파리로 이동3. 터키탕으로 간다 4. 줄 버나드로 하여금 접근하도록 한다) 그가 덴마크 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묘사되지는 않지만, 또 미스터 본드에게는 기분 나쁠 정도로 불경스러운 일이겠지만, 줄 버나드의 초대 또한 로맨틱한 의도를 갖고 있고 두 남자가 동침했다는 것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 다시 로맨스 혹은 불륜이나 연애 는 필요에 의해 성립된다.

자칼의 두 로맨스 이외에 이 영화에 있는 또 하나의 불륜관계는 OAS에 속한 여인과 내무부 각료와의 관계인데, 이것 역시 필요와 계획에 의해 성립된다. 처음 여인에게 임무를 하달하는OAS 인사는 여인의 임무위험하고 혐오스러운 종류라고 경고한다. 제임스 본드의 경우와는 달리, 이 모든 로맨스들은 세련되기보다는 직설적이며 연애의 낭만이 배제된 채 소모적인 육체적 욕구가 더 강조된다.

이렇게 필요에 의해 성립된 로맨스는 비극으로 끝난다. 여인에게 이용된 내무부 각료는 자살하고, 여인은 체포된다. 몽펠리에 부인은 더간이 추격당하는 이유만 말해준다면 지켜줄 것이라고 맹세하지만, 자칼은 그녀를 살려둘 수가 없고, 줄 버나드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린퀴스트의 얼굴이 티브이에 나왔다고 알려주지만, 그것이 역시 그의 치명적 실수가 된다. 하지만, 자칼이 이 두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은 그가 다른 두 사람 (사진사와 건물관리인 아주머니)을 죽일 때와는 달리 냉정하거나 신속하지 않다. 대신 조용하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행해진다. 이것이 자칼의 로맨스이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상대방의 차 안에서 맹렬히 짖어대는 개, 수작을 부리려는 이태리 주택가의 사진사를 살해하고 인적 없는 어스름한 뒷골목을 빠져나올 때 그를 보곤 등을 움츠리며 짐짓 위협하듯 울어보는 새끼고양이가 암시하듯이, 자칼은 경계 대상이며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이며, 오직 몽펠리에 부인 옆에서 보낸 호텔에서의 하룻밤만 우리는 깊은 잠에 빠진 그를 볼 수 있다. 매력남 본드씨와는 달리 자칼은 딱 이만큼 고독하다.

                       

 

 

3.     술래잡기

이제 잠시 자칼에 대한 이야기를 접어두고 자칼과 대립구도로 등장하는 르벨 경감 (마이클 론스데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이 영화에서 자칼 만큼이나 특별하게 취급되는 인물이다. 프랑스 정보부는 매우 훌륭한 방식으로 자칼이라는 암살자의 존재를 파악하지만, 그 신원을 확보할 수가 없어 르벨 경감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처음에는 새똥이 묻은 옷을 입고 어수룩하게 내무회의에 불려오지만 점차 내무부장관과 동등한 위치로 주도권을 장악하는 뛰어난 경찰인 르벨이 요구하는 것은 젊은카론(무려 데릭 자코비!), 독립수사, 그리고 내무부 모두가 그의 방식을 존중하고 따라주는 것이다.

르벨을 규정짓는 특성 역시 치밀함과 꼼꼼함, 그리고 신속함이다. 그는 수사를 위탁 받자마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럽 각국 경찰에 요청해 결국 스코틀랜드 야드로부터 그가 폴 올리버 더간의 위조 여권을 지닌 찰스 해롤드 칼쓰롭이라는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늦지 않게 얻어내며, 끈질긴 정보수집과 신분확인을 통해 변장하며 이동하는 자칼을 마지막에는 불과 몇 시간 차를 두고 추적해낸다. (참고로 이 영화의 주요한 시간적 배경은 810일경에서 25일까지 대략 2 주 정도이며 프랑스 내무부와 자칼의 술래잡기가 벌어지는 시간은 대략 일주일 정도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그가 감지하는 것은, 자칼이라는 인물이 그 자신만큼이나 신속하고 치밀하다는 점이다.

자칼의 신원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하나 둘 얻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을 파악할 수 없어 아마 도주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 제기될 때마다 르벨은 자칼이 그런 타입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자신은 점차 자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르벨의 뛰어난 점 중 하나는 자칼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가 이해하는 자칼이란 항상 한 걸음 앞에 있는 자이다. 그 자신이 파악해서 브리핑하는 정보를 자칼은 언제나 한 걸음 차로 앞서간다. , 자칼은 하나의 큰 움직임으로 잠적하거나 행동하기로 결정하는 타입이 아니라, 조직의 움직임을 매 순간 시간차를 두고 계속해서 따돌리는 술래와도 같다. 따라서, 모든 내무부 요인들이 자칼도 겁을 먹고 도망간 것 아니냐고 떠들어 댈 때 르벨은 그가 한 국가의 내무부와 경찰 전체를 감히 홀로 맞서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4.     면 대 점

오히려 르벨이 신뢰하지 않는 것은 조직의 결속력이다.  (그는 기밀이 새어나간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내무부 요인 모두를 도청한다). 애초 르벨의 상급자인 경찰총감이 말하듯, 조직은 목표인물의 신원과 외모가 확보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르벨이 불려온 이유가 바로 그런 조직의 한계를 개인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가 강조해서 보여주듯, OAS라는 반정부조직의 내부는 프랑스 정보부가 은밀히 심어놓은 첩자들로 가득하며, 내무부라는 조직의 기밀 역시 항상 새어나간다. 두 조직은 외면적으로는 상반된 목표(드골의 암살 대 대통령의 경호)를 가지고 있으므로 뚜렷하며 견고하게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듯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비밀을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조직간의 투쟁은 언제나 겉과 속이 뒤집힌 양상을 지닌다. 외면의 일관된 목표나 투쟁보다 내부의 은밀한 삼투적 교류와 그 정치적 형세가 전세의 역전에 더 중요하다. 그래서 병법의 기초 중의 기초는 면이나 선이 아닌 점을 활용하는 것이다. 면이나 선으로 움직이는 두 세력의 균형은 논리적으로 언제나 절대적이며 소모적인 섬멸전 (destruction war: 한 쪽의 완전한 소멸을 목표로 하는 전면전)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라면 고르게 퍼진 힘을 하나의 점으로 집중해 반대 세력의 약한 곳을 모색, 조장, 조작해서 빠른 시간 내에 집중 공략하는 것이 클라우제비츠나 손자 같은 병법의 대가들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전술의 정석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스파이, 혹은 용간술이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시 매력남 본드씨 되겠다. 007은 스파이로써 단순히 어떤 조직의 탄탄한 면에 구멍을 내는 암살자적 존재뿐만이 아니라 두 개, 혹은 다수의 조직들간을 왕래하는 교두보, 속고 속이는 이중간첩,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거래자의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스파이의 역할이자 모든 뛰어난 첩보전 영화에서도 반복되는 양상이다.

5.     파괴점

하지만, 자칼에서는 그 모든 스파이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OAS의 지도부가 조직 전체를 기만하고 내부 기밀유출을 방지한다 (자칼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자는 OAS 내에 아무도 없다) 스파이를 통해 내각의 움직임을 알아내면서도 자칼의 움직임, 자칼이라는 하나의 점의 위치는 OAS전체에도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이렇게 자칼은 OAS와 프랑스 내무부 두 조직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은 순수하고 전문적이며 심지어 철두철미하게 원칙주의적인, 마치 이미 날아가는 총알과도 같은 극단적인 파괴자 , ‘암살자이며, 파괴점이 된다. 이렇게 움직이는 총탄 앞에서는 면도 점도 쓸모가 없게 된다. 또한, 일반적인 암살자에게 선과 악의 문제도, 민족의 문제도 중요하지 않고, 단지 누가 더 많은 돈을 내느냐 하는 계약의 문제만이 있다면, 자칼의 경우에는 이미 그러한 이윤 계산이나 타협의 여지마저 없어진다. 그는 아예 위치 파악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칼과의 술래잡기에는 정치도, 경제도 없다. 당연히, 이것은 전쟁도 아니다. 

                        

 

6.     술래잡기는 이렇게 놀이가 아닌 강박증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자칼의 고독함과 도덕성 그의 편집증적일 정도로 정밀한 신분위조와 변장 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자칼이 완벽한 신분위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단순히 병적인 완벽주의나 원칙주의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공을 보장하는 가장 비정치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이다. 자칼은 철저히 홀로 행동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계속 다른 사람의 신원을 이용해 사회에 발붙이는 행동이 어쩌면 모순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야말로 그의 독립을 위해 필수적인 행동이다. 그에게는 완벽한 신분 위조야말로 조직에서 의심받지 않고 정체를 숨길 수 있는 (,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발판인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자칼이 편집증적이라면, 그 편집증을 조장하는 것은 사회와 사회의 신분통제 시스템이다.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싶다면, 자신의 신분을 말소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분이 없다는 자체가 결국에는 자신을 노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사라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을 완전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신시킬 것.

7.     타인 되기

이제 자칼과 본드의 차이는 명백해진다. 본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반면, 자칼은 비정치적이고 반사회적이다. 본드는 혼란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계속 수정하는 반면 자칼은 그 좌표 자체를 사라지게 만든다. 본드는 계속 자신의 정체성을 분산시키고 남용하며 빌려주고 도용하지만, 그런 행위들은 자신의 우월한 정치적 협상 능력을 입증하는 방식일 뿐이고, 그래서 그의 좌표는 언제나 피아의 레이다에 포착되도록 은밀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반면 자칼은 마치 유령과 같아서, 그의 좌표는 다른 좌표를 덮어 씌운 채 움직이기만을 반복하며,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존재는 오직 빙의된 좌표의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해 입증될 뿐이다. 자칼의 변신은 놀이가 아니라 그의 존재 방식 전부이며, 그의 치밀함은 철저한 고독함으로 귀결된다.

자칼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르벨이 집중하는 것이 바로 이런 치밀함이다. 그것이, 마지막 순간, 자칼이 다시 수사망에서 사라졌을 때 르벨이 자칼을 추적하는 방식이다. 르벨이 아는 것은, 조직이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더라도, 자칼은 항상 그 틈새만을 노린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르벨은 자칼에게 다가간다. 달리 말해, 르벨이 자칼을 잡으려면, 자칼의 도움이 필요하다. 르벨은 자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자칼을 상상한다. 르벨 역시 조직 외의 사람이 되어 홀로 떠돌아 다니며, 조직의 틈새만을 생각한다. 자칼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자칼이 되어 볼 것.

이런 방식은 물론 공식적인 수사방법으로 공개될 수는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테크닉이라고 할 수 있다. 필요에 의해 불려왔던 르벨은 자칼의 가짜 신원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 내무부 회의에서 사실상 추방된다. 하지만, 자칼은 물론 다시 사라지고, 르벨을 다시 소환한 내무부장관은 그에게 자칼이 도대체 어떤 자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8.     타인되기의 하드보일드

영화 자칼은 하드보일드 장르의 형사물로 실존 인물들과 정치상황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애국이나 평화, 선과 악, 휴머니즘 같은 일반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도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명한 첩보물 스마일리시리즈 ([Tinker, Tailor, Soldier, Spy] [Smiley’s People]이 알렉 기네스를 주연으로한BBC TV시리즈로 각각 제작되어 유명해졌다)같은 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며, 저돌적인 스타일과 음악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초반부는 같은 해에 제작된 후카사쿠 킨지의 인의없는 전쟁’ [仁義なき; Battles without Honor and Humanity; Yakuza papers] 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미 언급했지만, 이런 작품들은 007류의 모험물보다 훨씬 건조하고 사실적이며 여타 헐리웃의 더 진지해 보이는 스파이물들이 가진 일말의 감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알프레드 히치콕의 토파즈’[Topaz]나 시드니 폴락의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 같은 영화들은 하드보일드의 스타일을 모방하지만, 사실은 냉전을 배경으로 한 모험물의 근본을 벗어나지 않고, 단지 느와르 장르를 넘겨다볼 뿐이다.)

토파즈나 콘돌 같은 첩보, 형사물에는 자칼이나 르벨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토파즈나 콘돌의 주인공들은 항상 조직을 염두에 두고, 어느 신분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되찾을 것인가 같은 문제들을 고민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떨쳐버릴 수 없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이며, 그것이 영화의 투쟁의 이유가 된다. (이러한 작품의 최고봉으로는 역시 히치콕의 뛰어난 오락영화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혹은 조금 더 가볍고 재치있는 스탠리 도넌의 샤레이드’[Charade] 와 같은 작품들이 있다.) 반면 스마일리 시리즈에서는 선택이나 복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이미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며, 인의없는 전쟁에서는 그것이 근본부터 완전히 타락해버렸다는 것이 문제이다. 깊이 있는 하드보일드는 언제나 이러한 문제 의식을 향해 나아간다.

자칼이나 르벨 에 왠지 근접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작품은 오히려 장 피에르 멜빌의 느와르물들이다. 가령 서클 루즈’ [Le Cercle Rouge]형사’[Un Flic; Dirty Money]같은 작품들에서 장 피에르 멜빌은 그러한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했고, 그것이 그의 스타일을 창조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서 형사와 갱스터의 마음의 건조함과 일상의 황폐한, 혹은 유리같이 매끄럽지만 차가운 풍경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멜빌의 인물상은 오우삼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오우삼은 자신의 홍콩 느와르에서 그들의 동성 로맨스 요소를 극대화 시켰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첩혈쌍웅[牒血雙雄; The Killer]’에서 형사(이수현)가 킬러(주윤발)와 동일시 하는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멜빌도, 오우삼도 엄밀한 의미에서 하드보일드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장 피에르 멜빌이 주목한 것은 선과 악의 편에서 대결하는 자들이 어쩔 수 없이 공유하게 되는 동질성의 문제였고, 오우삼은 그것을 낭만적인 로맨스로 격상시켰다. 반면, 하드보일드에서는 동질성은 있어도 공유되지 않고, 로맨스는 항상 실패한다. 하드보일드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고독은 격상될만한 어떤 풍경을 지니지 않는다 

                        

 

9.     자칼의 고독함

가령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Sympathy for Mr. Vengeance]같은 영화는 하드보일드와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쫓고 쫓기는 자들은 모두 소통불구자들이며, 서로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타인 혹은 괴물이 되지만, 그 목표는 오직 살해와 죽음, 그 뿐이다. (박찬욱의 삼부작은 그 관계의 변화로 살펴볼 수도 있다. 가령 올드보이’[Oldboy]에서 악당들은 서로의 끊임없고 다양한 이야기하기를 통해 서로 소통을 시도하고 어느 정도 성공한다. ‘친절한 금자씨’[Lady Vengeance]에서는 소통의 장을 넓혀 수직, 수평 관계를 통한 피해자들(혹은 여성, 또는 가족)간의 이해를 모색하지만, 동시에 악당들과 괴물들을 그 관계에서 격리시키거나 추방시켜 버린다. , 삼부작은 모두 다른 장르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래서 송은 류를 살해할 때 너 착한 놈인 거 내가 알아.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라고 묻는다.)

자칼과 르벨도 마찬가지이다. 르벨은 오직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만 자칼과 대면할 수 있는데, 그 순간이 그들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 된다. 장 피에르 멜빌의 주인공들이라면 어떤 인연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을지라도 서로의 동질성을 충분히 느끼면서 이미 공존해 왔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르벨이 자칼을 이해하려 하거나 존경했던 것은 오로지 그를 체포하거나 살해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의 대면은 서로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자칼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h6xMnTPEzPo

자칼 수박장면 - 영점 맞추는 장면

http://www.youtube.com/watch?v=enBM3SQwryE&feature=related 

 

 

 

결국 자칼은 잡히지만, 그는 애초 모두가 생각했던 찰스 해롤드 칼쓰롭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그 모든 탁월함, 귀족적인 스타일, 동물적인 신속함과 치밀함 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의 신원도, 마음도 알 수는 없다. 자칼의 시체가 도로변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을 르벨 경감 홀로 지켜보고 돌아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들이 자칼이 영국인이었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대화하는 소리가 오버랩된다. 결국 르벨에게도 역시 자칼은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이런 것이 하드보일드가 지닌 동질성의 한계이다. 자칼이 자신이 접근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는 과정, 그리고, 그 자신을 이 사회에서 말소하는 방식, 이 모두가 철저한 고립과 소통 불가능성을 보여줄 뿐이며, 이 영화가 보여주는 타인되기의 결론이다.

                        

  

10.   동질성의 두 배반

타인되기에 대한 이러한 배반은 사실 이 영화에서 두 번 더 반복된다. 첫 번째는 영화 초반OAS리더 바스티앙 틸리가 겪는 배반이다. OAS는 극우 정치 집단이고, 바스티앙 틸리는 사형 선고가 난 후에도 프랑스를 사랑하는 어떤 군인도 나를 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장담하지만, 그는 가차없이 총살당한다. 아마 그것은 허세이거나 헛됨 신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OAS의 실제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바스티앙 틸리는 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들과 프랑스를 동일화 시키고, 배신당한다.

또 하나는 바로 자칼이 겪는 배반이다. 이 영화에서 자칼을 추격하는 형사들의 발목을 죄는 것은 사실 다름아닌 드골 대통령이다. 자칼은 처음 일을 맡을 때 그것이 자기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드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프랑스 정부와 경찰의 첩보능력을 무색하게 하는 드골의 특성, 그는 개인신변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 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 드골은 자신의 일정을 하나도 바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칼에 대한 모든 조사를 드러내지 않고 할 것을 명함으로써 형사들을 곤란에 빠뜨린다.  자칼이 드골을 저격하는 순간은 참전용사에게 메달을 수여할 때이며, 자칼은 사전 조사를 통해 그 순간 드골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믿고 정확하게 그 순간을 골랐다. 하지만, 막상 저격 순간에 드골이 참전용사에게 키스하기 위해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자칼은 어이없게도 그 한 발을 놓치고 만다. 

이 두 배반의 에피소드는 영화 전체의 내용과 비교해서 거의 상관이나 비중이 없어 보이지만, 르벨과 자칼을 좇던 모든 사람들이 자칼의 정체에 대해서 느낄 것과 비슷한 모종의 허무함을 느끼게 해준다. 가령, 그것은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혹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기는 어떤 것이 사실은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에 오는 허무감이다. 바스티앙 틸리의 허세섞인 믿음이 깨질 때에 OAS 의 목표 자체에 대한 믿음도 깨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프랑스 국민? 르벨과 추격자들의 확실해 보였던 믿음이 깨질 때 그들은 한 뛰어난 맞수에 대한 존경이나 경탄을 넘어선 허무함에 직면하게 된다. 도대체 자칼은 누구인가? 그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었는가? 드골은 시종일관 자칼이 예견한대로의 태도를 견지했지만, 막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시 예측불허의 행동을 해버린다. 도대체..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자칼은 생각할 시간이 없다.  대신, 끝까지 자기의 신원을 완벽하게 숨긴 채 빗나간 하나의 총알처럼 의미 없이 사라진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인부들을 뒤로하고 휑한 거리로 돌아서는 르벨 경감의 황량한 뒷모습마저 사라지면 우리는 드골의 상징과도 같은 엘리제 궁의 위풍당당한 사자상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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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이드의 원작을 거의 충실하게 따라가는 이 영화의 내용은 허구이다. OAS가 바스티앙 틸리의 지휘아래 드골을 암살하려 했던 사건은 사실이지만 (영화 초반에 이 유명한 OAS의 암살기도 사건이 충실하게 재연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허구이며, 자칼이라는 암살범의 존재 역시 허구이다. 같은 별명을 가진 남미계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은 이 소설의 암살자와 아무 상관도 없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 포사이드의 소설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를로스에 대해서는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제작한 뛰어난 3부작 TV시리즈 카를로스[Carlos]’가 있는데, 사실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라는 명목을 지닌 한 용병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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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칼은 엄청난 뒷배를 지니고 있다. 바로 알제리 전쟁과 독립이 그것인데, 이 정치적 사건은 단순히 프랑스라는 서유럽 선진 공화국(제국)과 제 3세계 (아프리카 알제리)의 식민관계 청산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OAS나 드골의 정치적 위치와 입장 역시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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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또 한가지 흥미거리로는 다양한 명차들의 등장에 있다. 가령, 영화 시작부분의 드골 암살모의 사건에서 등장하는 차는 시트로엥 DS19로 베네통이 디자인한 아름다운 외형, 특징적인 유압샤시등으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이 암살모의사건 이후로는 더욱 유명해진다.

그 밖에 자칼이 타는 첫 번째 차는 이탈리아의 명차인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1300, 중간에 번호판을 훔치는 차와 사고가 난 직후에 바꿔 타고 가는 차들은 프랑스 국민차들인 푸조 203 과 404, 몽펠리에 부인의 집에서 타고 나오는 차는 르노 플로리드 (카라벨) 등으로 모두 유명한 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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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에 대한 이 글 속의 정의는 문학적, 문화적 장르로서의 일반적인 하드보일드와는 무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오해나 비판이 없기를.. 바란다. 참고로, 이 영화와 비슷한 작품들 중 특이한 경우로는 가령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같은 것이 있다. 두 영화의 세계관은 전혀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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