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越愛
시월애는 시간에 관한 영화이다. 사랑의 시간. 사랑의 시간에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지만, 현재의 연인에게 중요한 시간은 어쩌면 오직 미래일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성취되어야 할 약속이거나 혹은 되찾아야 할 기억, 기억나지 않지만 예감할 수 있는 그 흔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시월애에서 이 사랑의 시간은 변화하는 네 연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 네 명은 모두 기다린다. 이 영화에서는 2년의 시간을 초월해 성현과 은주라는 두 연인이 편지를 나누는 것이 주 내용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이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의 사랑의 순환, 혹은 과거로부터 그리고 미래로부터 양방향으로의 환상적인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 이러한 연결과 순환의 고리는 실재적인 시간을 초월하는 동일한 두 연인의 것이라기 보다는 한 방향을 보면서 다른 시간대를 걸어가는 다른 두 사람의 것이다. 제주도 산호사 해변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은주가 말하듯. 자기에겐 일주일의 기다림이 성현에게는 2년의 기다림이 되겠다고, 그들은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에서 같은 방향으로 -미래를 향해- 기다리는 것이다.
한참을 기다렸어요. 2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요? 그냥 잊어버린 거면 좋겠어요.
내과 왜 이곳에서의 약속을 잊습니까. 약속도 은주씨도 시간에 밀려 잊혀질 기억은 아닐텐데.
산호사에서 은주는 성현대신 그가 그녀를 위해 설계한 집을 만난다. 마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지은 것처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외딴 집. 이 영화의 환상적인 구조 중 하나는 그렇게 부모의 사랑과 연인의 사랑이 겹쳐지는 지점에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지은 집을 통해 아들은 아버지 대신 미래의 연인을 만나게 되며, 그 아들은 언젠가 만날 수 없게 될 연인을 위해 또 다른 집을 짓는다. 반대로, 2년 전의 성현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은주의 빌라를 보며 미소 짓기도 한다. 시멘트와 철근의 공간이 사랑하는 이가 거하는 보금자리가 되는 것. 그렇게, 집이라는 것은 만날 수 없는 연인들을 감싸안는 하나의 따스한 공간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공간은 따뜻하게 다시 태어나며, 마치 조수가 교차하는 바다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작품, 일 마레 (바다) – 라고 아들이 이름 붙인다 -,처럼 건축물은 사랑의 절대적인 시간인 ‘기다림’의 순환을 예감하게 한다. 은주의 집을 설계하는 성현과 그를 위해 마지막으로 일 마레를 설계하는 그의 아버지의 교차는 사실상 똑같이 ‘기다림’이라는 하나의 진실 속으로 수렴되어 간다.
그리고, 이 영화가 관객에게만, 그리고, 사랑을 잃은 경험이 있는 연인에게만 살짝 보여주는 것은 같은 공간이 변화하는 모습, 그것도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비워지는 모습이다. 텅 빈 건물, 사랑을 잃은 또 하나의 공간, 예전과 똑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차가운 공간이다. 산호사를 위한 기다림의 2년이 시작된지 일주일 만에 성현은 2년 후에 그가 거기에 없음을 알게 되며, 영화가 끝날 때쯤, 그는 ‘2년이 지난 후에도 제가 은주씨 곁에 없는 걸 보면 우린 만날 인연은 아닌가봐요’ 라고 이야기한다. 연인을 잃은 은주도, 아버지를 잃은 성현도, 일 마레에서 느끼는 것은 그 허무한 외로움이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다에서 그들은 공을 차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며 같은 강아지를 데리고 걷고 있지만, 영화의 시간 속에서 일 마레는 그 두 명의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다. 한 명이 없음으로 해서 모두가 사라지는, 바다같은 공간. 아버지를 잃은 성현과 성현을 잃은 은주가 대면해야 하는 두 채의 빈 집. 그 끝없는 외로움.
쓸쓸히 홀로 서있는 것처럼 보이던 일 마레가 그토록 따뜻하게 느껴졌던 건 그 사랑이 담긴 곳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사랑의 방식은 다르지만 사랑은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또 하나의 환상,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희망찬 환상은, 두 연인이 이 텅 빈 시간을 꾸며나가는 방식에 있다. 이 영화의 가장 기억할만한 모티브는 이들이 단순히 시간을 거슬러 만나려고 하고 결국 만나게 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만남이라는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위해서 기다리는 방식, 그 방식의 특별함에 있다. 그들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각자의 방식을 알려주고 서로의 방식을 연습한다. 따로 따로.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들이 연출된다. 바이킹과 롤러 코스터의 다른 쪽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은주와 성현, 그리고, 같은 길을 2년의 차이를 두고 걷는 두 사람. 이 영화에서 이렇게 하나의 공간은 기다림의 예감과 외로움의 무게, 그 모두를 상징하며 바다처럼 변화한다. 영화라는 매체는 공간이 갖는 특별한 힘,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힘, – 추억을 통해서건 예감을 통해서건 – 을 드러낸다.
물론, 이렇게 순환하는 시간이라고 해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은주와 성현에게도 시간은 닫혀 있다. 성현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과거의 한 성현에게 이 시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성현의 시간에서 그는 애인이 있는 은주를 사랑할 수 없으며, 은주의 시간에서 그녀는 이미 사라진 성현을 사랑할 수 없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 공간은 그 세 번째 의미를 획득한다. 기억을 안은 동시에 기다림을 예감하는, 과거와 미래를 한 공간에 수렴하는, 그러나 절대로, 절대로 한 시간에 수용할 수는 없는, 오직 예감으로써만 그 역할을 다하는 하나의 건축물.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항상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더 그리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의 궁극적인 기적은 이렇게 만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연인들이 만나기 위해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을 통해 달려감으로써 이루어진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시 일 마레라는 하나의 건물이다. 마치 현재에서 지어지고 있는 산호사의 집이 사라진 미래에서 은주에게 성현의 부재와 전달되지 못한 사랑의 무게를 전달하듯이. 일 마레는 미래의 은주를 통해 과거의 성현에게 전달되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전달하게 만든다. 일 마레는 부재를 통해 사랑을 증명한다. 은주는 그 속에서 기다리는 성현의 아버지와 성현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 뛰어가다 사고를 당하고, 다시, 자신과 미래의 성현을 만나게 하기 위해 울면서 달려간다.
반면, 성현의 아버지가 언제나 일 마레까지 와서도 성현을 차마 만나지 못했듯이 (혹은 성현이 거부했듯이), 성현은 은주를 위해 (은주를 놓아주기 위해) 달려가다 사고를 당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아버지)을 이미 잃어버리고 그 절망의 공허를 맛본 경험이 있는 아들은 그렇게 붙박힌 듯 아버지의 장소에서 떠나지 못한다.
하지만, 연인인 동시에 이방인이기도 한 은주에게는 이 성현이라는 남자는 새로운 가능성을 담지한 사람이지 아직 아픈 이별의 대상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단 한 명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그것은, 나에게는, 은주인데, 결국 아버지라는 하나의 장소에 사로잡혀 있는 성현이 살았던 일 마레에 들어가서 성현의 가족사가 하나의 건축물로 승화할 수 있게 이야기로 만들어주고, 성현의 연인이 되어줌으로써 궁극적으로 일 마레에 새로운 의미를, 삶의 체취를 남기듯,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 한 순간, 영화의 맨 마지막에 이러한 은주와 성현의 관계는 역전되는데 -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멋지다고 기억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 여기서 은주는 역동적인, 하나의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 달리는 과거의 연인이 아니라, 이제 자기만의 시간을 달려 올라온 성현이 구애하게 될, 완전히 새로운, 아무 것도 모르는 낯선 연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은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 그리고 대부분의 연인들은 은주의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닐까? – 오랜 기다림의 환상적인 성취가 아니라 새로운 기다림과 예감을 향한 ‘새로운 첫 발걸음을 불안하게 내디딤’일 뿐이다. 일 마레를 이제 막 떠나려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단지 일 마레를 통해 찾아온, 자신의 강아지를 들고 빙긋 웃고 있는 이 성현이라는 남자는, 마치 모든 이들의 사랑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천사처럼, 혹은 그들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호머처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기적적인 존재가 된다. - 그는 한 번 은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지만, 다음에 은주라는 천사를 통해 자기가 희생했던 삶을 선물로 돌려받았다 - 물론 성현이 해 줄 이야기 역시 이제는 그 다른 은주라는 사람에 얽힌 하나의 과거, 혹은 연기처럼 사라진 미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랑의 시간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서 언제나 새출발이듯. 영화 시월애와 일 마레라는 건물은 앞으로 다가올 이 새로운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그것을 쓰는 것은, 극장 밖에서, 혹은 빈 공간에서, 다시 관객, 혹은 모든 연인의 몫으로 남는다.
언젠가 한 친구가 시월애가 공간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면서 내러티브 구조와 연결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옳은 이야기인 것 같다. 이야기가 있는 하나의 공간이 또 다른 이야기를 예감한다는 점에서.
시월애 메인 테마
http://www.youtube.com/watch?v=zwu_RtK8S1w&feature=related
화질은 별로지만, 누군지, 편집 참 잘했다. 게다가 스포 방지까지. ㅋㅋㅋ 센스 굿~!
결국 이 글에서 네 연인은 한성현의 아버지와 성현, 그리고 영화 속의 김은주(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천사)와 영화 마지막의 은주(아무것도 모르는 연인)를 가리킨다. 성현 역시 한 번은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화 마지막의 그는 여전히 과거의 그이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 보았다.
이 글에서 ‘시간을 달려간다’는 표현은 물론 일본 아니메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온 것이며, 이 계보를 따라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차용하는 원작(??)인 ‘엘 하자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엘 하자드’와 이 영화가 연결되는 고리는 오히려 ‘(공간을 통해) 기억을 나눔’에 있다. ‘엘 하자드’는 물론 이 점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환상적이지만.
천사와 호머는 역시 ‘베를린 천사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또한, 성현의 아버지와 성현, 그리고 은주의 삼각관계는 ‘올드보이’에서는 아버지와 딸(연인)으로 상당히 문제적으로 왜곡, 축약되는데, 이 영화와 ‘올드보이’ 모두가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이라는 시간을 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두 영화에서 새천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물론, 이 모든 문제와 관련해 애초에 성현의 아버지를 또 다른 연인으로 보는 게 잘못이다라고 지적한다면, 그 지적을 수용할 준비는 되어 있다. (예를 들어 굳이 사각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성현의 아버지를 과거 은주의 연인으로 대체해 볼 수도 있다) 내가 성현의 아버지를 연인의 축에 놓은 이유는 ‘일 마레’라는 공간의 문제 외에도 역시 ‘올드보이’와 연관해서인데, 이 영화에서 가족, 혹은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인 것이 ‘올드보이’에서는 연인(어머니를 사랑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찌른다)의 문제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시 아주 많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또 한 가지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관객이 보고 있는 현재의 영화 속 시점에서 ‘은주는 일 마레에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할 때 은주는 일 마레에서 빌라로 이사를 가며, 은주와 2년 전의 성현이 만나는 것은 은주가 ‘새로 이사올 분’을 위해 우체통 속에 카드를 남기고 가면서 이루어진다. 2년 후에 은주는 이미 일 마레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2년 전의 성현과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주인이 없는 빈 집이 된 그 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며, 어느 순간엔가 거기에서 오래된 성현의 조감도(산호사의 집)를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영화가 전개되는 시점을 은주의 현재로 본다면 일 마레는 사실상 빈 집이며, 영화는 이 빈 공간을 통해 내러티브를 끌어낸다. 마찬가지로,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은주에게 과거로부터 기다려온 성현이 나타났을 때,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는 더 이상 영화 속의 내러티브가 아니며, 그들의 공간은 이제 다른 어딘가(혹은 일 마레의 다른 시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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