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군들은 이것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어떤 개자식도 조국을 위해 죽음으로써 승리한 적은 없다는 것을. 다른 불쌍한 머저리들을 자기 나라를 위해 죽게 함으로써 이기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조지 패튼은 악질 제국주의자이며 시대착오적 영웅주의자에 과대망상적이고 호전적인 전쟁광이다. 어떻게 이런 영화가 7개의 오스카를 받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오로지 냉전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제국으로서 미국은 단순히 수사나 정치로서가 아니라, 사명 아니면 숙명으로, 온갖 악으로부터 평화를 지키고 “세계”를 지켜 악자를 응징하는 것이 신이 그들에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해왔다. 미국을 말 그대로 초인적 영웅이나 지구의 수호자로 숭배하는 과대망상적 애국자건, 인류가 평등하다고 믿고 미국이 박애 넘치는 하나님의 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건, 지루한 매일매일과 투쟁하며 다이어트에 열중하고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야심만만한 개인주의자건, 그것도 아니면, 쓰레기 같은 정부와 거짓된 언론, 외계인의 음모에 시달린다고 믿는 피해망상증 환자건, 그것은 모든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환상이다. 그들이 모국인 영국으로부터 탄압 받을 때부터, 인디언들, 왕정 치하의 멕시칸들과 싸울 때, 변방 개척 시대에도, 남북 전쟁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며, 우리가 존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예를 들면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 같은 것도 그런 것이다. 미국의 정신은 그들이 항상 의식하는 상대적 역사의 부재와 전통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바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강력한 선악의 도덕에 기반해 왔다. 그것은 20세기 전반 대부분의 세계를 휩쓸었던 전체주의와 그 속의 프로파간다와는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며, 오직 미국만이 태생적으로 가지게 된 특이한 광기와 열정이다.
물론, 이제 뚜렷한 대립의 시대는 지나갔다. 미국은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같이 전혀 다른 개체에 대해 힘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승리했으며, 살아 남았다. 20세기의 다른 모든 나라들처럼 미국은 언제나 변해왔고, 아직도 변화는 진행 중이며, 물론 그 변화에 대한 저항도 진행 중이다. 미국의 자유와 도덕은 그들의 자부심이자 헛된 위안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남의 땅을 차지하고 앉은 위선적이고 오만한 백인들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들이 쫓겨나온 고향을 꿈꾼다. 유럽이라는 이 고향은 고전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숨은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 태생적 자유, 자본가적 열정은 항상 전통에의 염원과 고전주의에 의해 제지되어 왔다. 미국인들이라면 대개 평등과 자유와 다원주의라는 이상을 갖고있지만, 그것이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 경멸이나 열등의식, 혹은 이질감을 삭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항상 자유와 전통, 평등과 계급주의의 갈등과 적대감이 있어서, 이것이 남과 북으로, 주인과 노예로, 엘리트와 스컴으로 미국을 내파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알게 모르게 공유하는 모순적인 이상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 물론 이는 언제나 끝없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지만.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유럽에서는 역사적인 전통이 새로운 개념인 자유에 의해 도전 받고 재정립되어 왔지만, 미국에서는 반대로 그 정체성의 핵심에 있는 자유가 전통에의 염원에 의해 끝없이 변경 되어 왔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인들은 본능적으로 전통과 권위, 타고난 귀족성 등등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 마음 한 구석에는 그런 것들, 고전주의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자유와 박애의 개념에도 사실은 이렇게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질시가 뒤섞여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모순된 무의식이 자본가와 노동자, 혹은 인종 문제와 같이 눈에 드러나는 계급으로 표출될 때는 오히려 역사적 투쟁으로 외부화되어 자유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미국이라는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이 투쟁들의 뒤에는 아직도 종교와 선악 같은 ‘절대적’인 기준들에 열광하는 의외로 보수적인 미국의 도덕성이 있다. 그래서, 미국은 평등을 가장할 때 가장 편협한 정치개체가 된다. 반면, 유럽에는 그러한 이상들에 대한 환멸과 안도감이 뒤섞여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닥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영화들 중 하나인 “별들의 전쟁”(Star Wars) 같은 것에는 평등과 자유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과대망상적 환상이 선악의 뚜렷한 구분과 강자 중심의 논리에 결합된 채 유치한 전 우주적 영웅주의로 표출된다. 이 영화는 처음 3부작에서의 훌륭한 기술적 성취(메카닉 디자인과 특촬기법)와 오락성을 제외하고는, 유명한 ‘내가 니 애비다’를 포함해서 ‘반파시스트-반공’ 헐리우드 모험담의 자기 만족적 발현이라고 밖에는 볼 수없다.[1] 더 나쁜 점은 그들이 거기에 사무라이나 기사도, 혹은 기 같은 각기 다른 무도 개념들을 자기들 멋대로 뒤섞어 놓았다는 점이다. (포스가 함께 하길…) 가령, 내가 보기에 별들의 전쟁은 기사도와 전혀 상관이 없다. 물론 기사도 역시 위선적이며 자족적인 환상에 불과했었지만, 그럼에도, 유럽의 어떤 기사도에도 한 솔로나 루크 스카이워커, 혹은 다스 베이더 같은 순전한 실용주의, 아니면 선에 대한 맹목적 믿음 따위는 없다.[2] 별들의 전쟁은 각국의 무도를 겉만 그럴싸하게 베낀 미국식 키치이거나, 아니면 키치라고 하기도 뭐한 유치한 프로파간다이다. 게다가, 적어도 키치라면 자신이 키치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적어도 80년대 말까지는 미국 정부마저도 별들의 전쟁을 허구만으로 치부하지는 않았었다.
대부분의 전쟁 영화 역시 그러한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락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2차 대전을 무대로 하는 대부분의 영화는 언제나 아주 자연스럽게, 혹은 아주 조심스럽게, 별들의 전쟁의 구도를 갖고 있다. 오히려, 문제작이라면 이런 구도를 겉으로 까발려서 의미를 박탈하기 마련이다. 가령 오락 영화에 불과하지만 “더티 더즌”(Dirty Dozen) 같은 영화는 더러운 최하층 계급, 범죄자, 위험인물들로 구성된 영웅들에 의해 가축같이 잔인하게 도살되는 독일 (귀족) 장교들의 모습을 보여주어 일순간 선악구도의 의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것 또한 특별히 강조되지는 않으며, 사실 귀족전통의 말살을 의도적으로 즐기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분명히 오락 영화가 아닌 “유 보트”(Das Boot)에서는 아예 주인공들(독일군)을 몰살시킴으로써 구도를 같이 무너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위의 두 영화에서 전쟁의 재현은 반전주의, 그러니까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Paths of Glory)이나 근래의 휴머니즘, 혹은 리얼리즘을 표방한 작품들이 갖고 있는 그러한 주제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의 구조 자체가 큰 감정적 여과 없이 그대로 재현된다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영화들은 전쟁의 거시적 역학관계가 별다른 의미의 강요 없이 이데올로기적, 정치역사적으로 배분된, 연합군의 패배를 묘사하는 유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도라!도라!도라!” (Tora!Tora!Tora!)나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 같은 작품들과도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패튼”(Patton)은 어떠한 종류의 영화인가? 이 영화는 흥미롭게도 이런 모든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아마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는 경악할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차라리 시저의 전기와도 같은 주제를 지니고 있다. 분명히 제국주의적인 시각을 다루고 있지만, 반 미국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미국적인 한 주인공에 집중함으로써, 그 시각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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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튼이 반 미국적인 이유는 그가 타고난 귀족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패튼에게 자유나 평등이라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승리와 정복이 있을 뿐이며, 실용주의 대신 역사와 고전이 있다. 따라서, 가령 더티 더즌에서는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로 행해지는 비인간적인 작전들이 패튼의 경우에는 순전히 그의 영웅적 리비도에 의한 것이 된다. 그에게 전쟁이란 역사이며, 역사란 그가 삶에서 성취해야 할 목적이다. 반면 정치는 가장 비영웅적인 노예들의 삶의 방식이 된다. 따라서, 그는 시대착오적이다.
패튼은 화면을 압도하는 거대한 성조기와 그 성조기 앞의 거만하고 열광적이며 냉정하기 그지없는 연설으로 시작한다. 패튼은 전쟁이 오로지 승리하고 적을 살육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강변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먼저 정복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군대라는 집단 앞에서 개인의 인격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적에게 살육 당해도 싼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다. 패튼이 가장 혐오하는 것 중 하나는 지키는 것(수성)으로, 지키고 요새를 구축한다는 것, 혹은 방어로서의 진지전은 오로지 노예만이 하는 일이며, 인간이 하는 가장 멍청한 짓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자신이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바로 그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에게 뒤에 남아 있을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미국이다.
패튼은 그렇기 때문에 강력하고, 남성적이며, 귀족적이다. 물론 그는, 다시 말하지만, 반 미국적이다. 이 영화에서 패튼은 별들의 전쟁에서의 주인공들처럼 어떠한 덕목에 타협하면서 실용적으로 선한 인간이 될 생각이 없다. 그에게 전진을 막는 모든 것은 바보같은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궁극적으로 패튼과 같은 영화는 별들의 전쟁 같은 영화와 아무 상관도 없다. 패튼에게는 그러한 아무런 환상이나 변명도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그의 삶이며, 그는 그 영광 속에서 희열을 느끼며, 그의 삶의 의미는 선과 악을 넘어 바로 그 즐거움에 있다. 탁월한 고전주의자로서, 그는 로마 시대부터 살았으며, 나폴레옹의 시대에 살았으며, 프레데릭 대제의 시대에 살았다. 그것은 그가 배운 세계의 역사이며, 그가 아는 세계의 의미이며, 그가 느끼는 세계의 숙명이다. 그가 말하듯 “전쟁 앞에서 인간의 다른 모든 활동은 무의미”해진다. 그가 누차 말하는 환상, 전쟁의 역사 속에 그 또한 항상 존재했다는 그 동질감은 수사법이나 정신병이 아니라 그가 가진 순전한 믿음을 대변한다. 그는 자신이 영웅이며 항상 승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뚜렷한 믿음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모든 다른 덕목들을 버려서라도 그 하나만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모든 순간 바보이거나 미치광이이거나 순진하거나 비열한 타협을 하더라도, 그 하나의 즐거움에 있어서 만은 어느 누구도 그보다 더 탁월해서는 안 된다. 전쟁의 역사와 동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그 모든 영웅들의 역사를, 영웅들만이 갖고 있었던 자기신뢰와 탁월한 귀족성, 어떤 타인도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정신적 동력을, 온 몸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바로 자신의 삶에서 다시 한번 실현하고자 한다. 영화 속 패튼은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삶보다도 이걸 더 사랑한단 말이지.”
패튼은 성조기를 바탕으로 시작하지만, 미국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패튼은 물론 미국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영화지만, 미국적 도덕성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반면, 이 영화는 순전히 공격적이라서 오히려 미국적이기도 하다. 패튼은 미국이 꿈꾸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논리 때문에 실현하지 못하는, 혹은 항상 위선자가 되어야만 하는 그 자리, 모순된 환상의 자리,에 자신을 놓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진정한 영웅이 되며, 동시에 거세되어야 할 위협이 된다. 환상 속에서 미국의 지도자들은 - 케네디를 생각해 보라 – 현대 유럽의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더 전제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지도자들은 훨씬 더 정치적이다. 패튼은 정치가들이 보여줄 수 없는 과격한 진심을 마음껏 드러내고, 바로 그것 때문에 탄압당하는 인물이다. 반면 정치가들은 그 모든 진심을 이데올로기와 도덕성으로 포장해야만 한다. 소련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때에도 패튼의 혐오감에는 악한 존재에 대한 반감 따위는 없다. 그는 단순히 소련이 언젠가는 적이 될 것이 확실하므로, 먼저 그 ‘적’을 살육하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당연히 패튼은 선한 주인공도 아니다. 우리가 속기 쉽고, 또, 반대로 너무 쉽게 속임수임을 꿰뚫어 보기도 하는 것, 가령 냉혈하고 비정해 보이는 주인공의 가슴 속에 있는 뜨끈한 휴머니즘 같은 것, 그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사려깊은 인간이었다 따위의 전도된 휴머니즘을 보여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몇몇 장면의 패튼에게서 그러한 것을 조금이나마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당신의 기대일 뿐 영화는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가령 영화의 두 번째 신은 미국의 힘의 상징인 독수리(Eagle)가 아프리카의 시체 청소부로(vulture)로 전락하고 군인들에 의해 머리가 날아가는 장면인데, 이 순전히 상징적인 장면에도 몇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 우선, 영화에서 휴머니즘을 찾으려는 관객이라면 이런 장면에서도 작품이 순수하게 제국적이거나 전쟁광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궁극적으로는 칭찬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겉보기만큼 제국주의적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이 장면이 단순히 패튼이라는 인간의 영웅화의 전략 속에서 겉치레로 쓰인, 패튼은 제국주의자가 아니었다 라고 주장하려는, 한마디로 거짓된 위장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결국 아직도 제국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주장 모두 영화 자체의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그 기준은 사실상 같으므로 결국 그 이해의 수준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이 경우 어떤 영화의 평가 기준이란 언제나 ‘제국주의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 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좋은 영화라면 제국주의에 반대할 것이고, 나쁜 영화라면 제국주의를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제국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또는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반면, 모든 영화는 제국주의적일 수도 있다. 패튼에게서 재미있는 점은 그러한 제국주의를 은폐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떤 식으로 주인공의 영웅중심적 윤리와 결합하는 지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제국주의적 리비도는 두 가지 윤리 (패튼의 시대착오적 윤리와 정치적 윤리) 사이에서 분열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영화는 보여주지 않지만, 사실상 패튼의 윤리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 억압된 것일 뿐이며, 그것은 제국의 정치적 상황들 속에서 항상 되돌아 오며, 항상 가장 강력한 리비도 중 하나로 작동한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했다 하더라도 노예가 없어지지 않는 유토피아란 말 그대로 유토피아일 뿐인 것이다. 반면, 주노의 변증법의 변형에 따라, 노예의 마지막 노동은 언제나 반란, 혹은 혁명으로 귀결될 것이다.
성조기 앞의 첫 장면에서도, 패튼이 미국의 덕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가 말하는 것은 억압된 미국의 리비도와 같은 것이다. 그가 연설의 모든 내용을 미국적, 혹은 미국의 성격에 돌린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미국인들에게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이 사실은 영화 내내 그의 발언과 정치적 행동들이 평가 받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지휘관으로서의 강직함은 두둔되기도 하지만, 그는, 일반 여론과 정치적 무대에서는, 비들 스미스가 말하는 대로, 미쳤다. 그것은 연합군에서의 미군의 입장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또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국가적 덕목이랄 수도 없는 데다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3분의 1이 온전히 그러한 패튼을 비난하는데 할애된다.[3]
두 번째 장면 역시 사실상 미국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독수리는, 캐서린 협곡에서의 미군의 불명예를 상징할 뿐이다. 오마 브래들리가 말하듯이, 그리고 패튼도 나중에 메시나로 가는 길에 말하듯, 공군 지원이 없어서 라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검사관으로서 브래들리의 평가 결과는 영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패튼이 요구하는 것은 브래들리가 생각하는 사기 증진을 넘어서는 것이다. 브래들리와 패튼은 뛰어난 지도자로서 완전히 다른 두 전형을 보여주는데, 브래들리가 사병들과 구별되지 않는 보병(G.I.) 장군으로 민주주의적 색채를 띤 반면(그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한 신: 메시나로 가는 도중 한 병사가 그가 장군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도대체 어떤 개새끼가 이 작전 책임자냐’고 묻자, 그는 “몰라, 어쨌건 그 놈 목을 매달아야지.”라고 대답한다.) 패튼은 군림한다. 이것이 그가 첫 장면에서 말했던 ‘팀’으로서 군대를 움직이는 방식이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을 일방적으로 몰고 가서 심지어는 불가능한 상황들을 연출하려 한다. 그의 이런 태도가 연합군에서 미군의 위치와 미묘한 갈등을 일으키는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패튼이 시실리에서 7군 전체로부터 배척되는 원인이 된다.
연합군내 미국의 정치적 입장이란 어디까지나 조력자에 불과했으며, 이것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아이젠하워의 연합군 사령관으로서의 정치적 한계였고, 아이젠하워의 대리자처럼 등장하는 비틀 스미스의 외교적 역할이다. 그러나, 마치 미국의 숨은 욕망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영화의 첫 무대가 되는 아프리카에서부터 패튼은 영국 8군의 영웅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와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당시 영국의 전차 부대는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던 독일군 원수 에르빈 롬멜의 부대를 계속해서 북쪽으로 몰아가고 있었고, 패튼(과 브래들리)가 연합군 2군단장(및 대리)로 시실리에 입성하던 때부터 몽고메리와 그는 자연스럽게 경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패튼은 첫 전투에서 롬멜의 부대에 일방적으로 승리할 뿐만 아니라, 독일군을 시실리에서 몰아내는 공동작전(허스키 작전)에서, 사령부의 인증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원래 작전을 밀고 나가 몽고메리보다 먼저 메시나를 장악한다. 하지만, 첫 전투에서도 사실은 롬멜이 직접 지휘한 것이 아님이 밝혀지듯이 패튼의 7군은 롬멜과 직접 대치하는 상황을 사실상 한 번도 갖지 못한다. 그 영광은 언제나 몽고메리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패튼에게는 끝없는 자극과 도전이 된다. 캐서린에서부터 이미 패튼은 롬멜과 대치하고 싶었고, 그가 말하듯, 롬멜에게 ‘아이앰빅 펜타미터(약강 오음보)’의 운율로 된 결투장을 보내 사막 한 가운데에서 두 사람만이 전차로 승부를 짓고 싶어했다. 이것은 물론 완전한 시대 착오이자 미친놈이나 해볼 수 있는 망상이다. 패튼이 생각하는 전쟁이란 영웅들이 서로의 역량을 겨루는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전쟁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패튼에게 롬멜은 어떤 정치적 의미를 초월하는 일생일대의 적이고, 그 기회를 가로채는 몽고메리 역시 그의 경쟁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몽고메리와의 입장 차이에서 연합군의 인증을 받지 못한 패튼은 명령에 불복할 뿐만 아니라,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작전을 강행함으로써 부대 전체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병사들이 말하듯, 시실리에서 늙은 ‘피와 배짱(blood and gut)’ 패튼의 성취는 “우리 피와 그의 배짱(our blood and his gut)”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는 직속 부관들과 지휘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사들과 장군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7군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사실상 제외된다. – 대신 연합군 사령부는 말타-런던-카이로에 압류된 그에게 유령 부대를 배치해서 독일군을 기만하는데 이용한다.) 다시 런던에서의 잘못된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더욱 큰 위기를 맞게 된다.
2
이 영화는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시실리에 이르는 패튼과 7군의 관계로 시작해 그의 정치적 고난을 다루는 중반부를 거쳐, 마지막으로 유럽에서 3군을 이끌고 그가 세계 전쟁사에 남긴 업적을 재현한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패튼은 자기의 꿈을 완벽하게 이루어낸다. 그것은 “정확한 시점에 정확한 지점에서” 부대와 하나가 되어 역사의 한 장을 성취해내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전환점이 필요한데 이 영화에서 전환점은 바로 패튼의 ‘신’으로 돌아옴에 있다.
패튼은, 독일군 정보장교 슈타이너가 분석하듯이, 열렬한 신앙을 갖고 있다. 하지만, 팔레르모에서, 혹은 메시나에서 그가 보여주는 신앙은 이상할 정도로 표면적이거나 과장되어서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허풍이나 망상이란 느낌도 준다. 그런데, 갖은 정치적 실수로 인해 혼란에 빠지고, 결국 자신의 소명에서 제외될 위기에 처한 그는 그 운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자신의 삶과 고난보다 더 큰 것으로 놓음으로써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비틀 스미스로부터 최후 경고를 받고 나오는 길에서 – 장소는 창문들이 열주같이 늘어선 빅토리아식 궁전 복도이다 – 패튼은 소리친다.
내 느낌에 나는, 난 뭔가 위대한 일을 할 운명을 타고 났어,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이 마지막 일은.. 내용은 그렇게 사소한데 영향은 엄청난 게 도저히 우연이라고 할 수가 없어. 이건 신이 하시는 일이 분명해. 인생에 마지막 위대한 기회인데, 온 세상이 다 전쟁 중인데, 나만 안 된다고? 이런 걸 절대로 신이 허락하실 리 없어! 그는 분명히 내 운명을 성취하도록 허락할거야! … 그의 뜻은 이루어질 거라고!
고난을 거부가 아니라 시험으로 돌려버림으로써 다시 신의 편에 서게 되는 패튼. 이 독백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신의 의도를 파악하고 순응하는 대신, 신의 ‘허락’을 강요하는 전도된 방식에 있다. 신의 허락을 간곡히 요구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신의 뜻’은 결국 그 자신의 뜻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영화의 리비도는 일견 지루해 보일 수도 있는 중반부에서 패튼이 단 하나의 진정한 적인 자기(정치를 해야 하는 장군)로부터 다시 자신(전투를 지휘해야 하는 장군)으로 돌아오는 이 과정을 통해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놀랍지만, 당연하게도 이 과정에서 패튼은 변하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더욱더 확고하게 인식하게 된다. 절정을 향해 무턱대고 전진해 나가는 이 영화의 리비도는 어떤 의미에서 정말 대단히 제국주의적이다. 그래서, 패튼을 런던에 두는 연합군의 속임수가 독일군에게 완벽하게 먹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브래들리를 통해 아이젠하워의 이미 오래된 결정, 패튼에게 3군을 맡기는 것,이 전해 질 때, 사실 패튼은 한 발 물러서서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연합군이 그에게 적당한 자리와 기회를 이제서야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그런 의미에서 신의 대리자이자 미국적 리비도의 조절자 역할을 한다.
모든 이들이 아이크라고 부르는 아이젠하워는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거니와 심지어는 패튼과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마저도 없는데, 이러한 부재와 거리감은 그대로 미국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뿐 아니라, 패튼에게는 좌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이크는 항상 ‘옳고 공정’하기 때문에 패튼은 그의 말에 항상 복종하지만, ‘연합군에 지휘권이 주어질 때’ 옳고 공정한 것에도 정치적인 입장이 끼어 들게 된다. 사실 이러한 방식의 세계 이해는 실제로 ‘엄격한 처벌’이 요구되는 종류의 유아론 적인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숨은 신’의 역할을 하는 아이크는 패튼을 내팽개치는 대신 정치적 유예기간을 통해 그에게 가장 필요한 자리를 공식적으로 제공한다.[4]
반면 브래들리는 항상 그의 곁에 있으면서 “단순한 노병” 패튼의 냉정한 거울 역할을 하고 후반부에서는 그의 실질적 지휘관 역할도 하는데,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패튼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남는다. 패튼과 같은 인간이 될 수 없으면서도 그를 이해하는 브래들리와 브래들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높이 평가하는 패튼은 아이크가 없으면 공존할 수 없을 두 전형으로 제시된다. 그 둘 중 하나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도 않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더욱 더 강력하게 매력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뽑은 게 아니네, 아이크가 뽑았지.” 아이크라는 신은 이 두 가지 모순된 전형을 실용적으로 수렴한다. 그러므로, 패튼은 영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영광의 전형이 될 수 있다.[5]
패튼은 브래들리에게 “내가 프리 마돈나인건 나도 잘 알아. 인정해. 몬티한테 참을 수 없는 건, 이걸 인정하지 않는단 거지.”라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사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이미 독일 정보부 수뇌들이 우스개 소리로 연합군에 두 명의 프리 마돈나가 있다고 한 평가와 연결되며, 오히려 패튼을 질책하는 미국 장군들에게 할만한 말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세 영웅, 패튼, 몽고메리, 그리고 롬멜, 중 오직 패튼만이 그 시대착오적인 영웅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질책 받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를 완벽하게 파악하면서도 온전히 존경할 수 있는 것은 적국인 독일의 정보부 장교들이다. 이 영화에서 패튼의 상징이 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의 배경과 외모를 묘사하고 시대착오적 고전주의를 가장 열심히 분석하며, 전쟁성과를 기록해 나가는 것도 독일군 정보부로 나온다. 그들은 어떤 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 영웅에 대한 경배자로 그려진다. (사실 이 영화의 전쟁 신에서 실제로 독일군과 미군의 직접적인 전차전 장면은 단지 엘 가타의 첫 전투, 패튼과 롬멜의 (사실은 패튼의 일방적인) 전술 대결에서만 중요하게 그려진다) 따라서, 그들은 연합군이 패튼에게 고삐를 쥐어 줄 수 없는 사정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한다.[6]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은 패튼과 같은 영웅서사의 환상에 빠진 독자들과 같은 존재이다. 히틀러의 독일도 패튼같이 하나의 서사(아리아 인의 세계 건설)를 완성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현실적 요소들을 탄압하고 배제하면서라도 쾌속 전진해야만 했고, 그래서 자멸의 가능성이 훨씬 큰 도박의 길로 진군해 가게 된다 (대전 후반부로 갈수록 히틀러의 전술적 결정은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되기 때문에 휘하 장군들도 더 이상 그를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어느 순간 패튼은 바로 그러한 망상적인 독자들과의 연루에서 자신을 구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전히 상상적인 환상의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7]
3
노르망디 이후 44년 후반기 유럽 본토 전투에서 연합군은 기대에 비해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아이젠하워는 패튼에게 3군을 맡겨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유럽 전체를 돌아가는 가장 긴 경로로 돌파구를 뚫게 해준다. 이 전에도 노르망디 상륙 때 이미 그는 패튼을 속임수로 활용함으로써 독일 독자들을 우롱했던 적이 있다. 이미 말했듯이, 이 영화에서 아이젠하워는 패튼에게 지휘관 이상의 운명의 결정자나 마찬가지의 위치에 있다.
반면, 영화 속에서 몽고메리는 영웅이면서도 현실적인 인물로 평가절하된다. 몽고메리는 “정신병자 패튼”을 경멸하지만, 패튼 또한 자유롭게 몽고메리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흠. 몽고메리 원수라면, 당신이 부대에 불가능한 일을 요구한다고 말 할거요.” “물론 그러겠지. 왜냐하면, 그가 절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거라는 거니까.”
그리고, 이 마지막 장에서 패튼과 3군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하나가 된다. 그것은 패튼에게 주어진 야심만만한 계획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어진 지도를 넘어선 곳에 까지 진격해 버린 병사들의 성취감과, 혈기 넘치는 병사들을 직접 나서서 정리하는 패튼의 적극성과, 보급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밤새 적과 백병전을 펼친 병사들에 대한 그의 경외심으로 표현된다. 부대와 장군의 동화, 그것은 바로 플라톤이 생각했던 영혼과 인간의 합일과 같은 것으로, 이 영화에서 인간의 삶의 성취를 의미하는 한 방식이 된다. 이것은 로마 시대엔 완전한 복종이라는 군인 정신으로, 르네상스 시대엔 국왕을 머리로 삼아 국민들이 하나의 거대한 몸을 이루는 몸의 정치로 개념 지워 졌었다.
패튼은 처음 연설에서부터 이것을 하나의 팀이라는 개념으로 형상화 한다. 지휘관, 혹은 왕과 휘하의 모든 인원들을 한 뭉텅이로의 거인으로 형상화 하는 이 개념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왕과 국민 모두에게 하나의 거대한 성취에 대한 환상을 불어 넣어 준다. 병사들은 장군을 존경하거나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장군과 “같은 생각”을 하며 장군의 꿈을 공유한다. 그래서 장군은 신의 뜻을 공유한다. 몸의 정치학에서 “우리 피와 그의 배짱”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실현되어야 할 이상인 것이다. 유명한 기도문 일화는 패튼을 정확한 역사의 한 순간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패튼이 말하듯, 그것은 천 년에 한 번이나 올까 말까 한 “정확한 지금”의 순간으로 그 순간 역사는 눈깜짝할 사이에 변할 수도 있고, 산과 바다마저 움직일 수 있다. 이 앞에서 인간의 성채 같은 것 역시 헛된 영광의 상징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것이 신이 준비한 패튼의 역사적 순간이다.
1944년의 미 3군은 로렌 지방에서 보급이 끊겨 멈추어 설 때까지 대전 중 가장 단기간에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많은 정복을 하며 공격한 연합군 군대로 기록에 남았다. (실제 전사에서 바스통을 공격한 것은 3군 내의 3개 사단일 뿐이고, 이 때 3군은 4개 부대로 나뉘어 프랑스 거의 전역을 점령했다. 이때 사령부는 파리 점령을 프랑스 2군에게 양도하기 위해 패튼을 제지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공격 속에서도 계속해서 진군하는 패튼에게 병사들이 어디 가느냐고 물을 때, “베를린에서 종이쪽에 매달려 있는 개놈의 자식들을 직접 쏘러” 간다고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그가 의미하는 것은 물론 전장 통계를 집계하는 행정부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패튼은 사실상 히틀러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쓰고 있는 독일군 장교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만들어내는 자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한 발 앞서 나가려 하는 것이며, 스스로 어떤 ‘패션’을 창조하려 하는 것이다.
영화 속의 패튼이 단순한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암시하는 여러 순간들로 대변된다. 처음에 화려한 제식행진을 보여주는 모로코에 있을 때부터 그는 헐리우드와 바이블을 엮는다. – 이 영화에서 모로코는 그 가장 환상적인 접경 지점으로 등장한다. – 독일군들은 그를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영화를 본다. 또한, 패튼의 순환론은 그가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깊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폭행한 사병에게 사과할 때도 자신은 그런 ‘역할’을 함으로써 군대가 더 큰 것을 성취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 속의 가장 흥미로운 다른 한 순간은 이렇다. 지휘관들에게 눈 내리는 혹한 속에서도 밤새 공격하라고 고함치는 패튼에게 부관 코드맨은 “때로 저들은 당신이 연극을 하는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고 하는데, 패튼은 ‘중요한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걸 구분하는 거야’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패튼이 병사들에게 연기를 한다는 의미를 벗어나 그가 영화 속에서처럼 실제에서도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패튼 역시 자신의 ‘신에 의해서’ 주어진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 ‘신’에게 바스통 진격을 위해 맑은 날씨를 달라고 기도한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면 일종의 정신병이 된다. 패튼은 계속해서 전쟁할 것을 요구하고, 실제로 마지막에 러시아에 대한 그의 태도는 비들 스미스의 말대로 “완전히 미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패튼은 그 광기에 찬 전쟁광적 성향 때문에 유럽전 이후에 태평양으로 이전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의 악명 높은 나치 발언(그는 능력있는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는 대신 그대로 관료로 도입해버렸다) 에 영화는 다른 코멘트 하나를 더 보탠다. 그것은 독일군의 “놀라운 무기들”에 관한 그의 응답이다.
놀라운 무기들? 세상에, 놀라울 거 하나도 없어. 영웅적이지 않은 살해, 영광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고, 영웅도 없고, 겁쟁이도 없고, 부대도, 장군도 없는 게? 생존자와 전사자 밖에 없는 게? 그런 꼴을 살아서 보지 않으니 다행이야.
그 모든 정치적 상황과 기술적 성취가 패튼의 이상, 혹은 독일군들의 기대가 이미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렸음을 알려 준다. 이제 패튼이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된 것이다. 2차 대전은, 그러니까, 16세기부터 지속되어온 고전주의에 대한 마지막 흔적이며 완전한 종말같은 것으로 이 영화에서 이해된다. 적어도 미국에게 그 순간은 아주 중요한 정치적 전환의 순간이기도 했다. 16세기 인간 패튼 역시, 맥베스가 말하듯, 촛불이 꺼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배우와 같다.[8]
4
이 영화는, 처음 시작에서부터 그가 3군 마크가 새겨진 철모를 쓰고 연설하듯, 2차 대전 중 미군의 영웅 패튼과 그의 3군이 이룩한 하나의 성취에 관한 작품이다. 여기서 패튼은 시대착오적으로 고전주의적인 로마의 역사에서나 나올법한 제국적 전쟁, 전쟁이라는 역사의 영광을 꿈꾸는 영웅으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영화는 그의 꿈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었던 것인가를 함께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제는 한 인간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그 인간이 있었던 한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자신이 가진 그 호전적인 이상을 드러내고 마음껏 보여주지만, 동시에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버리기도 한다. 이미 시대가 요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선악보다 더한 ‘시간의 승리’가 있다. 패튼이 영웅일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가 그 순간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 다른 순간에 영화 속의 패튼은 정신병자나 과대망상증 환자에 불과하다. 다행히, 고전주의자로서 영화 속 패튼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나중에 그는 코드맨에게 ‘저들이 뭐라는지 알아? 내가 정신병자라네. 자넨 알고 있었나?’ 라고 말한다.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 되는 순간 자신이 실현했던 전장에서의 마지막 영웅주의도 사라질 것임을 말이다. 이 영화에서 그가 돈키호테에 비유되는 것은 단순히 그의 시대착오를 풍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영웅주의에 대한 일종의 예술적 경고, 그리고 경배와도 같은 것이다.
패튼의 마지막에는 두 가지 경고가 있다. 하나는 아주 강렬하지만 동시에 바보 같은 것으로, 3군에서 해임된 패튼이 브래들리와 걸어갈 때 갑자기 건초마차 한대가 굴러오는 장면이다. 다행히 브래들리가 패튼을 밀쳐서 다치지는 않지만, 패튼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그 모든 것을 다 겪은 후에 건초마차에 치여 죽는 걸 상상해 보게나.” (하지만, 패튼 장군은 실제로 자동차 사고를 당한 후 사망한다.)
또 하나는 풍차의 경고이다. 예의 건초마차가 덮치는 신 바로 다음에 브래들리와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패튼이 애견 윌리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그가 코너를 돌면 갑자기 전쟁의 폐허 사이로 신기할 정도로 탁 트인 초지에 서 있는 거인과 같은 풍차 하나가 등장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패튼이 그 풍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사색하는 장면인데, 여기서 그가 상상하는 것은 이천여년 전 로마의 전승행렬이다.
유럽에서의 행차란 언제나, 로마시대 이전부터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낭만주의와 빅토리아 시대까지도, 단순한 카니발이 아닌 인간 허영의 가장 그래픽한 상징으로 쓰여져 왔다. 영화는 패튼의 나레이션으로 끝난다.
천 년도 넘은 이전에 로마의 정복자들은 행차와 소란스러운 퍼레이드를 통해 승리의 영광을 누렸다. 행차에서는 트럼펫 주자들과 악사들, 정복된 신기한 동물들이 보물과 전리품으로 가득한 수레들과 함께 전시되었고, 정복자는, 포로들이 그의 앞을 걷는 가운데, 승리의 전차 위에, 때로는 흰 옷을 입은 그의 자식들과 함께, 혹은 자식들이 말을 타고 따라오는 가운데, 서 있었다. 정복자의 뒤에는 두 손에 금관을 든 노예 한 명이 서서 그의 귀에 이런 경고를 속삭이고 있었다.
모든 영광은 바람같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영화의 마지막은 영웅주의에 관한 실용주의적 찬양이 아니라 고전주의적 해석이다. 패튼의 시대착오적인 나레이션이 끝날 때쯤에는, 그 역시, 서서히 돌아가는 풍차 날개의 그림자 속에 묻혀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패튼 극장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g-0dTpzNzwo
[1] 물론 이것은 매우 뚜렷하게, 전통적인 제국에 대항하는 ‘젊은’ 제국인 미국을 외디푸스적 관계, 한 가족의 전혀 다른 이름,에 놓는 역할을 한다.
[2] 물론 혹자는 이 영화의 어떤 캐릭터도 선에 대한 신실한 믿음 따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할 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라는 것은 제국과 해방이라는 정해진 구도 자체를 가리킨다. 이 영화에서 제국은 마치 오락게임에서의 깨기 힘든 마지막 스테이지, 대마왕의 성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투쟁의 이유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헐리웃 전쟁오락영화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이러한 구도는 독자적인 개인의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절대적 선으로 담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위선적이다.
[3] 물론 이 영화는 사실상 패튼을 미화하므로 그 억압되고 질책받는 리비도는 관객들에게 더 크게 호소할 수 있게 된다.
[4] 숨은 신은 역사학자 뤼시앵 골드만의 책 제목으로 16세기 법복 귀족과 루이 14세와의 정치적, 종교적 관계를 다루고 있다. 16세기 프랑스 군주의 절대적인 상징적 위치는 라신이나 코르네유, 심지어 몰리에르의 극들에도 잘 나타나는데. 이러한 군주와 신하들의 관계는 위협과 선택적인 수용, 그리고 거세로 이어진다. 영화 패튼의 마지막에서 아이젠하워 역시 패튼을 거세할 것이다.
[5] 대체로 현대 세계에서 귀족성은 언제나 사라져 가는 영광의 시대착오적인 덕목으로서만 현재적 의미를 확보한다. 혹은 그렇게 재현된다.
[6] 사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연합군 처럼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패튼 같이 유능한 장군을 놀리는 것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7]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교묘하거나 혹은 위선적이다. 왜냐하면, 실제 독자는 적군이며 사라져야 할 존재인 독일군이 아니라 패튼을 찬양하는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관객은 바로 자신의 자리에 독일군, 혹은 패튼 그 자신을 놓음으로써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성취하는 동시에 파기해 버릴 수 있게 되고,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기대해 볼 수도 있게 된다.
[8] 물론 실제 배우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작품이란 관객에게 배우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다음 섹션에서는 패튼의 사라짐을 이야기할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주제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님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이 영화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이 마지막은 패튼을 영웅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어떤 경종의 역할 또한 하고 있다는 것 - 감독인 샤프너(그는 빠삐용의 감독이다)와 대본을 쓴 코폴라 모두 그러한 장치를 구사하는 데는 대가이다 - 은 이 영화가 단순히 정치적인 어떤 지점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시간의 승리’라는 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리비도의 억압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숨은 욕망을 드러내고 심지어는 상상 속에서 장려할 수도 있다. 아마 그것은 고전주의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이상적 고전주의란 언제나 완전한 노예와 완전한 주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전주의 위에서만 ‘시간의 승리’는 순수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고전주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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