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패튼이 애용하는 3/4톤 Dodge WC57 command c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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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쓰이는 탱크들은 실제 2차 대전 때 쓰였던 것과는 다른 종들이다. 2차 대전 시 미군의 주력 탱크는 M4 셔먼, 그리고 독일군은 팬저 3, 4호나 팬더, 후기에는 대형 타이거들도 사용했는데, 영화에선 미군과 독일군 모두 M47-48 패튼 탱크를 사용한다. 패튼 탱크는 셔먼보다 크고 무게감 있어 보여서 영화 속 패튼의 군대는 독일군과 대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셔먼 탱크는 독일군의 팬더나 타이거의 장갑을 뚫을 만한 화력도, 방어력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1대 1로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미국 탱크의 몇몇 문제점들은 영화 초반부에 브래들리가 언급한다. 가령 독일 포보다 못한 75미리 포를 쓴다든지 가솔린 엔진이라 타격에 취약하다던지 하는 것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이차 대전 시 모든 독일전차는 가솔린 엔진으로 구동했기 때문이다. 가솔린보다 디젤 엔진이 좋다는 것은 디젤유의 발화점이 높으므로 화재 시 폭발 위험이 적다는 뜻이지만, 이미 언급했듯, 독일 전차 역시 가솔린 엔진을 썼으므로, 이는 미군 전차의 약점과 무관하다. 셔먼 전차가 쉽게 폭발했던 이유는 탄약창이 포격에 쉽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셔먼이 그나마 대적할 수 있었던 것은 팬저들이었고, 팬더나 타이거의 경우 사거리에 들어서기도 전에 포격당해 장갑을 관통당하기 일쑤였으므로, 미군 전차대의 전술은 1대 3 (팬더 1 대 셔먼 3) 혹은 1대 5 (타이거 1 대 셔먼 5) 식의 물량 공세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엘 가타 전투에서 측면 공격을 감행하는 미군의 모습
전후 거의 모든 독일 탱크들은 파괴되었고, 동구권 국가들이나 프랑스에서 한동안 소수의 독일군 탱크를 운용하기도 했지만, 남은 탱크들은 박물관이나 개인 수집가들에 의해 수집되었기 때문에 전쟁 영화에서 ‘진짜’ 독일 탱크를 본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엘 가타 전투에서 독일군의 모습
그리고, 이 영화는 많은 물량의 군용 장비들을 보여주지만, 그만큼 엉성한 부분도 있는데 가령, 미군의 혁신적인 군용차였던 짚차의 경우가 그렇다. 2차 대전중 생산된 짚차는 MA와 MB 이고, 전쟁에 쓰인 것은 MB형 이었는데, 영화에는 이후에 생산되는 M38(1950-52)이나 CJ-3B(1953-65) 같은 차들이 뒤섞여서 등장한다.
M38(왼쪽)과 CJ-3B(오른쪽). 둘다 MB에 비해 큰 헤드 램프를 갖고 있고, CJ-3B의 경우 차고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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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의 중요 인물들(연합군과 추축군 장군들 – 패튼, 몽고메리, 브래들리, 스미스, 알렉산더, 롬멜, 트러스캇 등)에 대한 외모와 묘사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지만, 특히 패튼에 대한 모든 묘사는 실제 그의 일화들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패션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과 병사들에 대한 가혹한 규정 적용, 유능한 장군은 적어도 3분 이상은 반복 없이 욕을 해댈 수 있어야 한다는 엽기적인 태도, 망상적이고 야심적인 전쟁관, 병사들의 피와 그의 배짱,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오만과 교만으로 가득한 장군상, 경건한 종교성, 윤회에 대한 믿음, 그리고 방대한 역사적 지식과 타고난 귀족정신, 그리고, 스스로 시를 짓는 문학성 (패튼은 자작 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과 프리 마돈나적 기질, 거기에 보태서 애견 윌리에 대한 묘사와 영화를 시작하는 유명한 연설과 그의 저급한 우스개들도 실제에 기반한다. 각본을 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패튼에 관한 많은 기록과 회고록들을 리서치했으며, 스스로도 이 영화가 대사 하나하나까지 실제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무척 강조한다. 영화에서 그의 커리어에 돌이키기 어려운 타격을 주는 병사 모욕장면 역시 시실리에서 실제로 일어난 두 번의 사건에 기반하고 있으며 결국 모욕당한 병사 가족들의 청원과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의해 개인적으로 해당 병사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시실리에서 구타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패튼의 모습. 하지만, 그는 연설에서 '사과'라는 표현을 딱 한 번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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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튼은 전술사적으로 보았을 때 기동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몇몇 전투들은 기습전으로 특히 언급할 만 한데, 예를 들자면, 44년 벌지 전투(벌지대전투 ‘Battle of the Bulge (Ken Annakin, 1965)’ 라는 영화도 있다)의 시작이 된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는 결과적으로는 독일군이 전격 전면전의 공세에서 연료고갈로 인한 방어적 국지전으로 돌아서면서 무참한 실패로 돌아가지만, 역사상 가장 통제가 잘된 기습전의 하나로 유명하다. 히틀러는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모든 지휘관으로부터 비밀누설방지의 맹약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아르덴 공세 장면. 독일군을 청소 대상으로만 본 연합군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놀라운 '공격'작전이었다.
그와 반대되는 작전은 서부전선의 승패를 결정한 노르망디상륙 (오버로드) 작전 (최근 감독판 복원된 사뮤엘 풀러의 문제작 ‘The Big Red one (1980)’ (제 1 보병사단 – 상륙작전시 연합군에게 가장 많은 손실을 입혔던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부대 중 하나였다)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 가장 유명한 영화는 ‘The Longest Day (1962)’ (지상 최대의 작전)) 인데, 영화 패튼에서는 노르망디 기습에서 제외되어 칼레에 남겨지는 패튼이 조명된다. 노르망디 기습은 아르덴 공세와는 달리 용간술이 빛을 본 경우로, 연합군이 추축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위협적인 장군 패튼을 속임수로 사용해서 독일군의 관심을 돌려버린 것이다. (스파이전인 포티튜드 작전 - 북부에선 스칸디나비아 지방을 영국의 (가상) 스키부대가 공격하고 칼레에는 패튼의 (유령)부대를 배치했다는 기만정보로써 연합군 측의 프랑스 해안선 돌파시도를 이미 간파하고 있던 독일군의 대항병력(대서양 방벽)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켰다) 영화 패튼에서는 독일 정보부 장교 슈타이너의 상관으로 나오는 알프레드 요들 장군이 롬멜과 논쟁하는 장면에서 병력의 일부를 칼레로 빼야 한다고 주장했던 룬트슈테트의 역할을 한다.
영화 속의 요들 장군과 슈타이너 대위. 두 사람이 패튼을 가장 열심히 분석하는 애독자의 역할을 하며, 관객들에게 정보를 준다.
반면 패튼과 롬멜의 전차전은 모두 기동전의 특징을 지닌다. 기습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보급로와 교두보를 적들이 계산하는 시간 이전에 급속도로 제압해버리는 것이다. (아이젠하워가 패튼에게 바스통 진격을 맡기게 되는 결정적 계기도 이것이다. – 44년 겨울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에 의해 분산된 1군의 일부였던 101 공수사단이 군사 요충지인 바스통에 고립되었는데, 아이젠하워는 48시간 이내에 독일군 포위망을 뚫고 바스통까지 교두보의 재확보를 바랐고, 패튼 역시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코브라 작전 (44년 7월)은 당시 1군 대장이었던 오마 브래들리가 입안한 계획으로, 서유럽의 중심부를 차지하며 영국 및 캐나다 군과 대치하며 연합군의 공세를 막고 있던 독일군을 분산시키기 위해 요충지 캉(Caen)지방을 관통하고 서유럽 내부로의 교두보를 구축하려는 작전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마치 패튼이 코브라 작전의 일부를 맡은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프랑스 외곽으로 돌면서 세느를 돌파하고 라인강 동부에 다다르는 패튼의 3군 진격은 코브라 작전 직후에 행해진다. 즉, 브래들리의 작전은 패튼의 진격전에 대한 준비작업의 역할을 했다.)
반면 몽고메리의 스타일은 신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동시에 다분히 과시적인 면모가 있었는데, 이것이 연합군 내에서 영국과 미국의 미묘한 구도와 전쟁 스타로 떠오른 패튼의 영웅심과 맞물려 유명한 에피소드들을 낳게 했다. 횃불 작전 (영국군과 미군이 남 북으로 서아프리카 지역에 공세를 펼친 작전)에서 미군과 갈등이 있었고, 아프리카 전선과 노르망디에서 승리한 반면, 마켓가든 작전(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머나먼 다리’ ‘A Bridge Too Far (Richard Attenborough, 1977)’ 라는 영화로 알려져 있다)을 처참한 실패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마켓가든의 실패는 단순히 몽고메리의 판단 착오라기 보다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버리고자 했던 희망과 독일군은 이미 전투력을 상실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뒤섞여 연합군 수뇌부 전체가 오판에 빠진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몬티가 탄 영국군 staff car 인 Humber Super Snipe 가 미군 MB를 가로막고 알제리 시가를 질주하는 장면.
곧이어 몬티는 패튼이 제안한 시실리 침공 작전을 거부하고 자신의 작전을 주장해서 관철시킨다.
패튼의 7군과 몽고메리 8군의 경쟁을 다룬 팔레르모–메시나 점령 경쟁은 횃불작전 종료 후 아프리카와 남유럽을 잇는 시실리 (시칠리아) 섬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연합군의 허스키 작전을 다룬 것이다. 당시 몽고메리는 자신이 연합군 전체의 주도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 미군 측의 후방지원을 부탁했지만, 패튼은 오히려 6일만에 팔레르모를 점령해 버린다. 영화에서는 두 장군의 경쟁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2차 대전 중 최대규모의 상륙작전이었던 이 작전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애초에 차후 계획 없이 상륙을 감행해서 이후 공수부대의 지원이 원할하지 못했고 동시에 몽고메리의 독단에 가까운 메시나 점령 계획에서 미군을 후방으로 이동시키는 사이 독일-이탈리아 추축군의 주력이 포위망을 빠져나가 퇴각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러한 지연들 때문에 패튼이 메시나를 점령했을 당시에도 이미 잔존 세력이 대부분 이탈리아 본토로 빠져나간 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메시나에서의 패튼과 몽고메리의 대면은 다소 극화된 것이다. 실제로 당시 북아프리카 지역 연합군 총 책임자였던 해롤드 알렉산더는 패튼의 팔레르모 점령을 승인했으며, 몽고메리는 작전 도중 이미 마음을 바꾸어 패튼에게 메시나 선점을 맡겼다. 그러나 그 두 장군과 미군과 영국군이 항상 미묘한 경쟁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몽고메리는 이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패튼과 비교되며, 전사를 살펴보아도 연합군의 가장 큰 두 작전을 실패 (마켓가든), 혹은 별 성과 없음 (허스키 작전) 이란 결과로 몰고 갔지만, 여전히 북아프리카의 영웅이었으며, 더욱이, 대전의 판세를 뒤바꾼 노르망디 작전을 일구어낸 주역이었다. 또한, 그는 패튼이나 롬멜 같은 전차광은 아니었다.
메시나에서 몬티에게 경례하는 패튼. 몬티가 '웃지 말게(don't smirk). 키스는 하지 않을 테니까' 라고 말하자,
패튼은 '유감이군요. 따귀맞을 줄 알고(in preparation to be smacked by you) 아침에 면도도 싹 했는데' 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장군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롬멜인데 그는 1차 대전 때인 1917년 이미 이탈리아전의 신화적인 존재였으며 (1개 중대병력 (300여명)으로 9000여명 (무려 30배)을 사로잡았다!) 2차 대전 초기 1940년 구데리안이 지휘한 아르덴 전투의 도박적인 전격전(전차와 공습을 동반한 기계화 기동전)에서는 제 7 기갑사단을 이끌고 연이은 기습으로 극우세 최첨단이었던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단시간에 격파해버렸으며 (이때 제 7 기갑사단은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경악스러운 행보를 보여주며 ‘유령사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심지어 단 1개 연대로 전 부대보다 50km 이상을 앞서나가는가 하면 다시 장갑차 1대(와 전차 1대 – 그러나 곧 고장나 버렸다) 만을 가지고 갔던 길을 되돌아 오며 트럭 40대 분량의 포로를 잡기까지 한다(!!). 이후에는 초기 북아프리카전에서 기만, 유인술을 동반한 전차전(자동차를 위장해 가짜 전차들을 만든 뒤 마치 대군이 온 것처럼 꾸며 영국진지로 쳐들어갔다. 그는 모래먼지만 많이 일으키면 적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으로 영국군을 초토화 시키며 독일 본국의 턱없이 부족한 물량지원에도 불구하고 무려 2년여 동안이나 우위를 점한다. 결국 물자보급의 부족과 전체적 전세의 역전으로 패퇴하고 후에 프랑스 해안선의 대서양방벽을 맡게 되지만, 바르바로사와 마켓 가든 전투의 노장 룬트슈테트와의 의견 불일치와 기존 물자와 시간의 부족, 그리고 연합군 측의 포티튜드 작전의 성공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1944년 히틀러 암살모의에 연루되어 체포, 제거된다.
북아프리카를 떠나는 롬멜. 덕분에 패튼은 그와 대적할 기회를 상실한다.
이 화려한 경력에서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듯이 롬멜은 어떤 면에서 몽고메리보다 더 신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패튼보다 더 과격한 면도 지니고 있었다. 많은 경우 그의 위험천만한 독주는 동료 장군들을 기겁상태로 몰고 갔으며 그의 전술은 기갑전격전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드넓은 아프리카나 복잡하고 촘촘한 프랑스의 전장이나 모두 관건은 단순히 전진과 전선의 구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제대로 받쳐줄 수 있는 보급과 공중지원의 문제와 직결되는데, 물자와 보급로가 항상 절실했던 독일군의 경우 전격전으로는 이런 요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벌지 전투의 원인이 된 독일 기갑군단의 마지막 전격전이었던 아르덴 공세도, 히틀러의 굳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다른 게 아니라 연료 부족으로 실패했다. 결국 독일군이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러시아의 그 모든 전선에서 패퇴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어떤 전술적 문제보다도 궁극적으로 물자지원과 연료 및 보급 결여 때문이었다. (1,2차 대전의 진짜 영웅, 그리고 괴물은 다름아닌 물자와 돈 이었다)
심지어, 패튼 역시 사실은 비슷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는 분명히 독일이 가장 무서워한 연합군 장군이었으며, 그의 프랑스 질주는 바스통 탈환 등의 업적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쾌속 진격을 위해 적의 방어거점을 우회하거나 또는 많은 보병들의 필요 이상의 희생을 야기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가령 사르-모젤강 유역의 지그프리트 라인에서 3군 휘하 20군단을 기갑 지원없이 ‘버리고’ 간 사건은 악명 높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패튼이 구하기 전 바스통에 고립된 미군 101 공수사단 휘하 보병들의 사투를 그린 뛰어난 영화 ‘Battleground (William Wellman, 1949)’에서 묘사되는데, 바스통에 갇힌 이 병사들을 구하고 영웅이 된 패튼은 정작 자신의 보병들은 무려 수 개월 동안이나 혹한의 최전방 전선에 내다 버려 괴사상태로 몰고 갔다. 또한, 해멀버그에서의 사적인 작전시행과 실패는 그의 명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고 만다.
바스통 진격작전에서의 시가전 모습
실패한 해멀버그에서의 사위 구출 작전에서 그가 내팽개친 부관 알렉스 스틸러가 영화 초반부에 전사하는 또 다른 부관 딕 젠슨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우연하게도 이 영화의 매우 역설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영화에서 부풀려 묘사되는 그의 젠슨에 대한 애정어린 태도와는 달리 해멀버그에서 스틸러가 포로로 잡혔을 때 패튼은 아예 모른 체 하고 그를 내팽개쳐 버린다. 해멀버그 사건은 영화에서 묘사되지 않지만, 대신 스틸러와 젠슨이 함께 등장하는 이 첫 장면 (패튼은 브래들리에게 두 사람을 소개한다)은 특별한 강조점 없이도 영화를 매우 의뭉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브래들리는 훗날 해멀버그 사건에서의 패튼의 위선에 특히 분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딕 젠슨(왼쪽)과 알렉스 스틸러(오른쪽)가 브래들리 장군에게 경례하는 장면.
이는 아마도 패튼의 기갑전술가로서의 성격과 한계를 반영하는 사실일 것이다. 패튼은 남북전쟁 때부터 지휘관이었던 명문 군인가문 출신으로 웨스트 포인트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기마 장교’였다. 그는 출신성분상 오마 브래들리 같은 보병들의 장군이 아니었으며, 보병들의 희생에 연연하지 않는 진군형, 승리지향형 장군이었다. 이것이 그와 몽고메리, 그리고 롬멜의 출신 성분의 차이를 반영하기도 한다. 몽고메리는 중산 계급이었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한 목사의 아들으로 왕립사관학교에서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동료 생도와 싸우다 불을 지르려 한 전력도 있었고, 대체적으로 충분한 준비를 바탕으로 하는 승산 있는 보병 전술을 구사하는 장군이었기 때문에 보병들의 사랑을 받았다. 롬멜의 경우 순차적이 아니라 히틀러와 정치적 의견이 맞아 고속 승진을 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종종 다른 엘리트 장군들의 경멸을 받았으며 (독일 장교들은 특히 귀족적이고 엄격한 사관학교 전통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전술 역시 적의 의표를 찌르는 뛰어남이 있으나 전체 전세를 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는 했다.
사실 롬멜의 전공이 눈에 띄긴 해도 전세에 결정적인 것은 없었다는 평가도 있으며 사령관으로써 그의 집적부대 통솔 능력은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 또한, 나치 독일의 많은 명장들 중에서도 롬멜이 유달리 유명한 이유는 그가 계속 서부 전선에 머물면서 영-미군과 대치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다른 뛰어난 장군들은 사실 대부분 동부전선 (러시아)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러시아 군인들을 살육한 대가로 나중에 전범 재판을 통해 모두 제거된다. 어쨌거나, 히틀러의 비전문가적인 군사적 참견에 의해 군 전체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롬멜의 기동작전 (그리고 이에 대한 히틀러의 전반적인 묵인)은 독일군에 활로를 뚫어 주었지만, 결국 이러한 출신 상의 한계와 전세의 고립과 불리함, 히틀러의 점점 더 히스테리칼해지는 무리한 요구 등의 악조건에 롬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장군)도 부흥할 수는 없었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독일군의 패배. 아르덴 공세의 패배로 독일군의 회복 가능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패튼의 기동전이 단순히 그의 개인적 성격만을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며, 그것은 장군으로서 전술적 판단에 의거한 것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6살이 어린, 실제 군 계급도 자기보다 낮으나 절친했으며 연합군제하에서는 최고지휘자였던 아이젠하워, 그리고 자신의 보좌역이기도 했으며 오랜 동료였고 때로는 상관이기도 했던 브래들리의 요청에 대체로 순응했지만, 그가 보기에 연합군은 추축군보다 훨씬 우세한 보급과 공수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보급로 구축 실패는 각종 지원품으로 ‘풍선같이’ 부풀었다는 서부 해안의 상황과 효과적이지 못했던 임시방편용 차량운송방식(레드 볼 익스프레스)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노르망디 연안 쉘부르에서 각 전선으로 트럭들이 물자를 운송하는 레드 볼 익스프레스는 연합군의 대부대들이 계속 진격을 거듭하는 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우선 트럭의 수가 모자라 미군은 영국 민간 운송업체로부터 트럭을 대여해야 했으며, 많은 트럭이 중간에 고장나 버렸고, 모든 트럭을 다 운용해도 도저히 제 부대에서 원하는 만큼의 보급을 제 때에 지원할 수가 없었다. 앤트워프같이 수심이 깊은 항만이 절실했으나, 요충지들은 독일군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연합군은 오버로드 작전 이후 서유럽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된 보급로를 구축하는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패튼의 전술적 판단으로 보자면, 보급과 공수에서 절대 열세에 있으나 기술력과 군제 정비가 탁월했던 독일군은 오히려 모험적인 기습, 기동전격전을 펼치는데, 기본 군수면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수한 연합군이 방어와 거점탈환에 급급한 지구전을 선택한 것은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이었다. 패튼의 전략은 독일군으로 하여금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음으로써 아군 손실을 최소화하며 전쟁을 최단시간 내에 결정짓는 것이었고 3군의 프랑스 진격은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와 알렉산더는 이러한 패튼의 방식을 거부하고 보다 안전한 몽고메리의 전략을 지지했으며 프랑스-독일 진격전에서 3군이 마침내 로렌 지방에 도달했을 때 패튼의 보급을 끊어버린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몽고메리를 지원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사실 연합군도 그 정치적 사정과 현실적 여건에 의해 보급로 구축에 실패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즉, 보급을 해주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실패하기는 했어도 마켓가든 작전 같은 것이 어쨌거나 필요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주요 보급로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앤트워프 항구 확보에 실패한 연합군에게 마켓가든 작전은 네덜란드를 통과해 라인 서쪽 하구의 항구를 확보함으로써 최상의 보급로를 구축하고, 인근에 위치한 기계화 독일군의 핵심 군수공장지대였던 루르 지방을 공격해서 전쟁을 단시간 내에 종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중추적인 작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북아프리카의 2군단을 인수받기 위해 장갑차를 타고 도착하는 패튼의 모습. 민간인이고 동물이고 뭐고 없다.
또, 일반 사병을 다루는 그의 문제적인 태도 역시 ‘전술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영화 초반에서 충실하게 재연하듯이 그가 북아프리카에서 2군단을 인수받았을 때 처음 한 일이 바로 군 기강(morale)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그는 실제로 복장 불량에 벌금을 매기고, 사병들을 혹독하게 대했는데, 오히려 이런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가 병사들의 기강을 세우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고, 이후 전장에서 2군단의 사상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된다. 사실, 대전에 참가하기 이전부터 그의 혹독한 훈련방식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전공을 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사병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작전을 강요하기 일쑤였지만 그것은 ‘속력을 늦출 때마다 병사는 죽어나간다’는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영화 패튼에서는 군대를 한계상황으로 몰아 가는 그의 모습이 7군의 메시나 점령과정에서 묘사되는데, 트러스캇 및 브래들리와 대치하는 그는 매우 인상적이다. 브래들리는 트러스캇의 부대로 하여금 몇 십마일을 진격하게 하려는 패튼에게 대부분의 병사들은 단지 몇 야드를 확보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고 항변하며, 또, 자신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지만 패튼은 전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때, 패튼을 연기하는 조지 스캇의 거만한 표정은 기억할만하다. 그는 ‘담대함, 담대함, 항상 담대함!’ 이라는 프레데릭 대제의 경구를 인용한다. 나중에 메시나의 퍼레이드 준비를 하러 가자는 패튼에게 분노한 브래들리는 사망자 보고는 보았느냐고 말하는데, 여기서 패튼은 그에게 계속 방어만 하고 있었다면 사망자 수가 어땠을 지는 생각해 봤냐고 반문한다.
몬티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프레스캇을 독촉하는 패튼과 그에 분노하는 브래들리. 여기에는 세 개의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미군 사기 증진 같은 군사전술적인 문제, 또 하나는 사병들의 안전 문제, 그리고 마지막은 개인적인 영웅심리.
이런 점에서 실제 전쟁은 드라마가 되기 힘들다. 드라마의 드라마틱함은 대개 주인공들이 절망에 빠질만한 어떤 순간을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실제 전쟁은 이런 준비의 ‘순간’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 ‘별들의 전쟁’을 비롯한 빤한 선악구도를 지닌 전쟁물이나 환타지들은 이런 ‘순간’들을 도덕의 이데올로기로 치장할 수밖에 없다 - 물론, 전쟁사에는 드라마 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넘쳐나지만, 이 모든 ‘순간’들은 생과 사, 혹은 승패를 결정짓는 비도덕적인 ‘순간’들이다. 어쨌거나, 항상 공격을 부르짖은 덕분에 그의 부대는 계속 업적을 이룰 수 있었고,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졌으며, 그는 그들의 용맹함을 경배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영화의 첫 전투이자 가장 큰 대규모의 전투 장면이기도 한 엘 가타 전투는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미국이 막 2차 대전에 참가할 때만 해도 그 역할은 조력자에 불과했다. 미국 전차부대는 독일군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롬멜의 군대를 캐서린에서 처음으로 대적했는데,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맛보았다. 만약 엘 가타에서 패튼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연합군 내에서 미국의 이미지와 역할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패튼은 물론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허스키 작전에서 몽고메리가 미군은 영국군의 보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오히려 그를 앞질러 팔레르모와 메시나를 점령해 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미군도 영국군만큼, 혹은 영국군 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그것이 패튼을 미군의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연합군의 가장 무서운 장군이란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 동기였다.
무조건 공격을 독촉하는 패튼. 7군에선 모든 병사들의 원수이자 공포의 대상이지만, 3군에서 마침내 그들과 합일되는 기쁨을 맛본다.
따라서, 패튼이 오버로드 작전에서 제외되는 것은 물론 사병 구타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병 구타사건이 매우 좋은 구실이 되기는 했고, 미군은 그런 측면을 부풀릴대로 부풀려 패튼을 정치적으로 곤경에 몰아넣을 지경이었지만, 그를 빼돌려 독일군의 관심을 돌리는 것은 충분히 놀랄만한 작전이었고, 그것은 먹혀 들어갔다. 아이젠하워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준비 단계에 있을 때 이미 패튼과 서유럽의 3군 진군 계획을 논의했다. 상륙작전 이후 한 달이라는, 전쟁 중이라는 상황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긴 했지만, 패튼의 서유럽 진군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전술적인 측면들이 이 영화 속에서 골고루 부각될 수는 없다. 영화 패튼에 대해 언급할만한 한가지 사실은 이 영화가 반전, 평화 운동과 학생, 인권운동, 시위가 절정에 달해 있었던 1969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반전 영화가 아니다. 심지어 이 영화는 다른 위대한 전쟁 영화들이 지니고 있는 어떠한 비극적 진실이나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다. 또, 이 영화는 전쟁을, 그것도 미군의 영웅이자 전쟁광이었던 한 인물을 다루지만, 그를 통한 미군, 미국, 연합군의 ‘정의’의 승리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69년이라는 특별한 시대적 배경 덕택에 제작자들은 패튼의 쾌속 진군과 정신병적 전쟁광의 면모를 부각시키면서도 그가 지휘 명령체계에 저항하는 독불장군이었음을 특히 강조했으며 동시에 그의 이상이 시대착오적이었으며 그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인간형임을 분명히 했다.
패튼은 역설적으로 공격적인 상업주의자나 성공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거대 자본의 운용자같이 독재의 이빨을 드러내놓고 으르렁대는 강력하고 호전적인 영웅이지만, 동시에 시민사회, 민주주의, 반전주의의 ‘정치성’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너무 순수하게 자신에만 몰두하는 비정치적이고 ‘돈키호테’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가령 손자병법 식으로 본다면 그는 기에 있어서 뛰어나지만, 세(형세)를 구축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형상화하는 인간형으로써 뛰어난 점은 그의 상식을 뛰어넘는 광적인 공격성이 오히려 대오와 명령이 절대시되고 개인성이 배제되어야 하는 전장의 규칙을 뛰어넘어, 일반적인 장군 이상의 장군, 일반적인 전투 이상의 전투로, 전쟁을 몰고간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쟁광 영화이면서도, 특이하게도 순전히 개인적인 투쟁을 보여주는 작품이 된다.
다른 전쟁 영화들보다 훨씬 더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전쟁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는 빠지지 않은 이 뛰어난 영화의 각본을 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컨버세이션’이나 ‘지옥의 묵시록’, ‘대부’와 같은 문제작을 만들어냈으며 이 영화와 같은 인물 탐구로 거대 그룹 GM과 포드의 관료주의와 맞서 싸우게 되는 모험적이고 혁신적이며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한 자동차 개발자의 일대기 ‘터커’를 만들기도 했다. 조지 패튼 장군은 영화에서 묘사된 대로 연합군의 반나치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했으며, 소련의 군대와 장군들과 소련인들을 드러내놓고 경멸했다. 그는 1945년 바바리아에서 미군용차에 의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일각에선 이를 2차 대전 말 반나치 정책이나 미국의 러시아와의 연합과 관련한 견해차로 패튼과의 우정에 파국을 맞은 아이젠하워의 사주에 의한 위장된 암살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물론 신빙성은 별로 없는 가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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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튼은 71년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수상했는데, 놀랍게도 음악과 촬영상을 받지 못했음에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너무나도 멋진 화면들과 제리 골드스미스의 영감 어린 음악으로 다른 어떤 전쟁 영화보다도 더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패튼 장군 역을 맡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조지 스캇은 연기를 두고 투표를 한다는 것, 그리고 누가 더 잘했는지 경쟁하게 만드는 제도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했다. 뭐랄까.. 전장의 '이단아' 라는 영화의 홍보 문구와 어울릴만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오히려 패튼의 캐릭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의 개인적인 69년 정신의 표출이란 느낌이 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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