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o Storico

[Welly] Chevrolet 1963 Impala RPO Z-11 Ronnie & Buddy's Friendly Chevrolet, Mr. 427 I

이박오 2017. 6. 12. 18:45


1958 년 GM 창립 오십주년을 맞아 산하 계열 자동차 회사들은 여러가지 특별판과 리미티드 버전들을 출시했으며, 그 중 가장 큰 계열사였던 쉐보레 에서는 아예 향후 회사의 기함이 될 새로운 브랜드를 선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임팔라 였지요. 임팔라는 60년대에 쉐보레의 최상위-그러나 럭셔리 카보다는 국민차를 지향하는 - 대표적인 승용차량이었으며, 그 상위 트림이었던 카프리스가 등장한 후에도 계속해서 부담없는 대형 승용차로서 미국인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온 모델입니다.




원래 벨 에어의 특별판으로 기획되었던 임팔라는 쉐보레에서 가장 잘 팔리는 차량으로 초기에는 디자인 면에서도 화려한 매력이 있었는데, 거대한 테일 핀이 눈에 띄는 아이코닉한 1959 년 모델까지, 잘나가던 1950 년대 이후, 1960 년대에는 오히려 박스 형의 통제된 동선을 가진 단순한 디자인으로 개편됩니다.





그런데, 60년대의 다소 심심한 듯한 이런 디자인도 임팔라의 인기를 꺾지는 못합니다. 동시대의, 보다 스포티한 메이커들의 장식적인 모델들에 비해 60 년대 초반의 임팔라는, 좀 더 평범하며 단순성이 강조되는 그릴과 직선들의 나열로 대변되는 쭉 뻗은 차체를 가졌었지요. 그리고, 후방에는 독특한 세쌍의 원형 테일라이트로 요란함보다는 중후함이 강조되는, 동시에, 캐딜락이나 포드 링컨 같은 럭셔리함 보다는 서민적인 소박함과 꾸밈없는 분위기가 강조되는 편안한 차량으로 자리잡게 되지요.




특히 쌍발 라이트에 단조로운 그릴로 트럭같이 다소 투박한 느낌까지 주는 60년대 임팔라들은, 차량의 후면부에서 분위기가 반전되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테일라이트들의 장식성으로 디자인적인 반전의 묘미를 추구하여, 부담없이 탈수 있으면서도 은근히 매력적인 차량이란 인식도 심어 줍니다.




화려한 미국 차들 속에서 특별히 크지만 단촐한 디자인으로, 오히려 그 무감각해 보이는 박스 스타일이 극에 달했던 62 년에서 64 년까지의 임팔라 들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도 '이건 너무 특징없이 재미없는 스타일링' 이라는 느낌이 큰데요, 사실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콜렉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차량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왜일까요? 이렇게 멋대가리없어 보이는 차량이 콜렉터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니... 60년대 초 임팔라의 서민적 단순함이 가지는 디자인적 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중저가 18 스케일과 24 스케일을 주로 만드는 웰리 사는, 비슷한 성향을 지녔으나 좀 더 다양하고 역사도 있는 마이스토 정도와 비교될만 한데요, 최근에 Nex 라든지 하는 식으로 좀 더 규격화된, 그러면서도 폭넓은 저가 모델들의 생산에 집중하고 있지요. 미국차로는, 유명한 폰티악 GTO 나 최근의 올즈모빌 로켓 88 의 저가형 모델로, 그리고 그 모델들의 조잡함으로,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인상을 주는 회사가 웰리 이지만, 이 웰리의 미국 차량 모델에도 숨은 보석들이 꽤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63 년식 임팔라 모델은, 대충 한 번만 본다면, 여타 저가 미국차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촌스러운 크롬 덩어리의 느낌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좀 만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실차가 가진 미묘한 장식들을 제대로 잡아낸, 뽀인트를 무척 잘 캣치하고 있는 모델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물론, 측후방의 날아댕기는 임팔라의 마크는 잘 보이지도 않는 프린팅으로, 그리고 트렁크 위쪽과 그릴 위쪽의 쉐보레 레터링도 불분명한 플라스틱 덩어리들로 표현이 되어 있고, 테일라이트도 좀 더 정밀한 재현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그릴의 크롬 페인팅도 좀 더 얇게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고, 심지어 로니와 버디 라는 데칼도 약간 에러가 난 상태이지만, 여전히 이 모델에는 나름의 정확한 재현들이 꽤 있으며, 재미있는 표현들과 이야기 거리도 있지요.




63 년 임팔라의 기본 시판 트림들입니다. 스포츠 세단과 세단, 그리고 컨버터블 쿠페 가 나와 있는데요, 실은 SS 슈퍼 스포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스포츠 쿠페와 컨버터블, 그리고 웨건 모델 등도 있지요. 이 중 SS 버전은 1961년 2세대 임팔라가 새로 등장하면서 새로 들어간 옵션으로 가장 파워풀한 버전이었는데요, 바로 레이싱을 염두에 두고 만든 버전이었습니다. 실제로, 모형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61 년과 62 년의 SS 임팔라들은 나스카와 NHRA 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웰리 모델의 전문 오픈 사진입니다. 63년 임팔라도 기본적인 283 인치 스몰 블럭 V8 에서 327 인치, 그리고 409 인치 빅블럭 엔진까지 확장이 가능했으며, SS의 경우 고성능 348 인치, 혹은 409 (Z-11은 427) 인치 엔진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409 엔진을 단 SS 임팔라가 바로 63년 쉐보레의 화두였지요.



트렁크 쪽 재현은 별로 볼게 없지요? 하지만, 60년대 임팔라 모델의 경우 트렁크 개폐 여부는 모델의 매력에 치명적인 역할을 합니다. 왜냐, 트렁크가 열려야 3 열 테일램프 중 2개만 분리되었다가 맞물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ㅋ 일단 이 모델 정도로 단차 없이 세 개의 테일램프가 잘 맞아들어가면, 모델의 매력도는 무지 업! 됩니다.




좀 더 가까이 본 실내 모습입니다. 무척 단순한 플라스틱 사출의 재현이지요? 연 하늘색 재현은 무척 산뜻하지만, 플라스틱 삘로 충만한 것에 일조하기도 합니다. 근데, 사실 이게 실차의 색깔이었거든요~ㅋ 게다가, 이 하늘색은 바로 로니와 버디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두 색깔 중 하나이지요~



실제 63년 임팔라 스포츠 쿠페의 인테리어 입니다. 개조 튜닝없이 순정의 모습을 유지한 개체로, 카펫 일체형 시트에, 대쉬, 위쪽에는 긴 스피도가 있고, 연료계가 핸들에 살짝 가렸군요. 그 옆에는 오일과 발전기, 그리고 핫-콜드 인디케이터가 사등분된 사각형 형태로 있고, 그 옆에는 아날로그 시계가 있습니다. 핸들 밑으로는 벤트 옆에 라이트와 와이퍼, 벤트(혹은 크루즈) 조절기 버튼들이 있고, 반대편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시동 스위치와 시가 라이터가 있으며 그 옆으로 라디오가 보이는 군요. 핸들 위에는 방향등 조작 스틱과 기어봉이 있으며 그 앞, 위쪽으로 알피엠 미터가 핸들에 바로 붙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개조가 많이 된 SS Z-11 버전의 내부 입니다. 일단 시트가 바뀌었지요. 그래서 센터 콘솔도 새로 달았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두 가지 변화는 핸들 위에 알피엠 미터가 아주 크고 세분화되었다는 것과, 기어스틱이 허스트 기어 봉으로 바뀌어 센터로 내려왔다는 점입니다. 그 중 알피엠 미터는 바로 순정 Z-11 의 특징적인 기본 옵션이었지요. 퍼포먼스 중점 차량이다 보니 가장 중요한 요소였겠지요? 음.. 색깔은 두 차 모두 동일한 연 하늘색이지요? 어쩌면 로니와 버디는 그들의 색깔을 임팔라의 기본 옵션에 있는 색깔로 그냥 정해버렸던 것인지도...




어쨌거나, 로니와 버디의 차량 모형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이 차가 알피엠 미터기가 독특한 Z-11 개체임을 알 수 있고, 기어봉을 역시 허스트로 교체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위에 개조 실차 Z-11 과 이 모델 모두 대쉬 밑 열에 라디오가 재현되어 있는데, 이는 Z-11 의 기본 옵션에 어긋난 것입니다. 왜냐, Z-11 은 순전히 퍼포먼스 중점의 차량이었기 때문에 아예 공장에서 라디오를 달지 않아서, 라디오 부분은 구멍만 뚤린 채 출시되었다는.... 어쨌거나, 제가 알기로는 실차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혹은 어딘가 숨어있기) 때문에, 확실한 대조는 불가능 할 듯 하네요..




이제 이 모델의 심장이라고 할 수있는 엔진 재현을 볼까요? 이 모델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한 이 엔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에어 필터 자리에서부터 바깥쪽 헤드라이트까지 연결되는 두 개의 세탁기 호스 이지요. 고증에 있어서는 이 부분의 확인이 가장 어려운데, 현재 남아있는 Z-11 개체에서 에어 인테이크를 이런 식으로 처리한 차량은 아직 본 적이 없거든요. 다시 말해서, 모형에 따르면, 로니와 버디의 Z-11 은 터보엔진의 활력을 위해 바깥쪽의 로우빔 헤드라이트를 떼버리고 소켓에서 엔진으로 직접 연결되는 에어 호스를 달아 헤드라이트 소켓 자리를 에어 덕트의 용도로 바꾸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대체 에어 필터는 어디 간 거지요???




제가 찾을 수 있었던, 그나마 가장 근접한 사진은 바로 이 한장인데, 헛간에 잠자고 있는 고물 임팔라의 앞모습 사진이었지요. 사진상으로 구멍이 뚤린 채 남아있는 하이빔 라이트 자리가 단순한 소켓인지, 아니면 에어 덕트의 역할을 하게 개조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니 뭐 큰 도움은 안된다는 게 결론입니다. ㅋ




사실 이런 식의 라이트 소켓 활용은 비슷한 시기 포드의 유명한 갤럭시 썬더볼트에서는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로니와 버디가 그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이용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는게 가능은 합니다. 그런데, 퍼포먼스 썬더볼트는 후드의 극단적인 에어 덕트와 그 밑의 커다란 에어필터도 함께 구비해서 더 유명한 차량이거든요~




어쨌건 간에 이 모델에서는 기본적인 409 엔진의 레이블이 붙어 있는데요, Z-11 의 427 엔진은 409 빅블럭에 스트로크와 보어를 강화해서 얻어진 엔진이라고 합니다. 엔진 후드 옆에는 "알루미늄, 만지지 마시오" 라고 써 있지요. 이 역시 Z-11 개체 경량 바디의 특징이었지요.




나름 준수한 웰리의 하판 재현 입니다. 임팔라의 유명한 엑스 빔 - 실제로는 토션에 큰 영향을 못 미쳤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 눈에 띄는 군요. 역시 퍼포먼스 모델인만큼 배기 머플러 라인은 아주 짧은 두 개의 이그조스트 파이프로 운전석 밑에서 잘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빅블럭의 퍼포먼스 차체도 있지만, 역시 임팔라는 스몰블럭의 대형차로서도 인기가 많았지요.

하지만, 콜벳도 아니고, 임팔라 같은 차량이 주연으로 등장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텐데,

63 년 임팔라가 독특하게 등장하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방금 메인 스트릿으로 임팔라 세단을 몰고온 저 남자의 실루엣은?

바로 어 퓨 굿 맨 의 주인공 톰 크루즈 이지요~


 

 

연극 작가였던 아론 소킨이 90년대 초 어느 날 여군 법무장교로 복무하던 가족의 전화통화를 듣고 당시 미국에서 잠깐 이슈가 되었던 기지내 가혹행위에 관한 연극을 하나 쓰게 됩니다. 그게 바로 어 퓨 굿 맨으로, 얼마 후 롭 라이너 감독이 톰 크루즈, 잭 니콜슨, 데미 무어 주연으로 영화화 하지요.



이 영화에서 임관한지 얼마 되지 않는 변호사 캐피 중위 역으로 등장하는 톰 크루즈가 모는 차가 63 년 임팔라인데, 재미있는 것은, 영화 자체의 배경은 60년대가 아니라 90년대 라는 점입니다.

 



해서, 나중에 재판의 무대가 되는 워싱턴 DC 와 함께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인 쿠바의 관타나모 공군 기지에서는 이렇게 와일드한 험비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영화 속 켄드릭 중위 역을 맡은 키퍼 서덜랜드가 험비의 넓은 차체에 적응을 못해서 영화 찍으면서 사병 여러명을 차로 치고 돌아다닌 것은 유명한 뒷얘기이지요~)

 

 

어 퓨 굿 맨 에서의 문제는 '진실'에 관한 것입니다. 데미 무어가 연기하는 강직하고 진실만을 추구하는 갤로웨이 소령이 때로는 약간 진상처럼 보이는 이유는 소령에게 기술이 없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캐피 중위의 경우, 진실과는 무관하게 닳아빠진 승패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에이 플러스 학점을 다 챙기듯 법정 밖 협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약아빠진 법대생에 가깝습니다. 어 퓨 굿 맨은 이 닳아빠진 캐피 중위와 진상 갤로웨이 소령이 각각 가지지 못한 것, 즉, 기술과, 진실에 대한 열망,을 갖기 위해 합쳤을 때 생기는 하나의 현상, 그 이벤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군 부대 내에서의 사병간 구타 - 코드 레드 - 에 관한 것입니다. 결국 코드 레드를 행해서 동료 사병을 죽음으로 몰고 간 병사들은 잘못이 있는가 없는가 - 유죄인가 무죄인가 - 가 법정의 쟁점이지요.

 

 

 

영화의 주인공 캐피 중위는 검사와의 협상이 아닌 무죄 변호를 통해 사병들이 원하는 진실 - 단지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사병들의 명예 - 을 밝히려면, 그 명령의 윗선을 잡아내야 한다는 점에 집중하고, 거기서 군 부대의 기강과 명예, 그리고 명령에 관한 사회적인 시각의 차이까지 끌어내게 됩니다.

 


 

그것은 이런 것이지요. 일촉즉발의 상황에 대치하고 있는 군부대는 전시 상황에 준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정의나 자유 같은 '말랑한' 가치 (진실) 보다 명령과 복종이라는 '절대적' 가치 (국가 안보)가 최우선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사로운 진실을 덮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 안보의 기강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제셉 대령의 논리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너는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 라고 소리치는 그의 태도에는 애송이와는 국가 안보같은 중요한 문제를 논할 수 없다는 크나큰 거리감과 중대 사안 앞에서 고문관이나 놈팽이들에 불과한 몇몇 쓸모없는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는 것은 정당하며 당연하다는 집단우선 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롭 라이너 감독은 이 영화에 아주 많은 상징적 장치를 집어 넣고, 또 그 장치들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분위기와 시점의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요한 분기점마다 반복해서 보여지는 병사들의 조각상이라든지, 영화의 오프닝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화려한 군악대의 행진곡 연주로 시작하는데, 군악대에서의 약간은 들뜬듯한 일체감과 화려한 볼거리는 곧바로 열병식의 제식을 연습하는 생도들의 긴장되고 근엄하며, 압도적인, 즉, 훈련과 기강을 강변하는 장면으로 넘어가지요.

 


다른 많은 영화들, 심지어는 더 락 같은 오락 영화에서도 강조되고는 하는 사명감으로 가득한 군인의 비인간적일 정도로 일사분란한 모습이 위의 오프닝에서는 여과도 장식도 없이 그대로 강변되고 있다는 느낌인데요, 저 장면은 그대로 우리에게 일상과 동떨어진 쇼의 일사분란함을 감상하며 관람하는 일반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저 속에서 직접 총을 들고 우리도 그 일사분란함 속으로 동참해야 하는 지를 물어보는 듯 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사병 구타와 가혹행위, 군부대 이탈과 사병 비리 같은 문제를 외부인의 입장에서 개인의 심각한 권익과 생존권 침해라며 규탄해야 할지, 아니면, 내부인의 입장에서 집단과, 그 집단이 수호하는 사회 전체 - 심지어는 그 집단의 행위를 이해하지도 않으려 하고, 규탄하기만 하는 이기적이고 약해빠진 겁장이들의 사회 - 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옹호해야 할지 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지요.



아니, 어쩌면 더 나아가, 그것은 정부와 국가의 존치를 위해서 불의의 사고와 치안 보호 체계의 오작동 같은 것을 덮어도 되며,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몇백명의 억울한 죽음을 그냥 덮어도 되며, 그를 위한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만약 국가 전체의 경제적 이익에 위배된다면 그냥 덮어버려도 된다던가, 혹은 현재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 과거 역사 속에서 타국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생산했던 희생자들이 늙어서 모두 죽어버리도록 국가가 방치하거나 소극적인, 혹은 현실의 이익을 챙기는 식으로 타협을 해도 된다던가 또는 아니라던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를 다르게 볼 수 도 있습니다. 군복무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소위 '뺑끼'를 쓰는 개인들의 추함과 이기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대학이나 고등학교 모듬에서 자기 할 일은 하지 않고 남이 해놓은 성취를 주워먹는 인간이라든지, 온갖 변명을 대며 힘든 일을 빠져나가고 나중에야 웃으면서 자기도 끼어 있었다고 하는 인간들의 권리도 중요한 것인가? 이런 인간들도 권리를 옹호해줄 가치가 있을까, 하는 그런 문제들..

 


극단적 전체주의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중간에서, 미국인들은 열정과 명예라는 덕목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원동력이자, 인종, 국적, 그리고 세계적인 호혜 평등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국가적인 덕목이지요.

 

 

 

예를 들어서, 미군 최초의 흑인, 그리고 나중에는 한 쪽 다리를 절단한 최초의 장애인 잠수사가 된 칼 브라쉬에의 이야기를 다룬 감동적인 영화 맨 오브 아너 에서 주인공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불같은 열정과 타협하지 않는 명예에 대한 신념으로 인종적 장벽과 신체적인 한계, 그리고, 이 장면에서, 역사적 변화 (새로운 잠수부의 교본과 국가적 '사업'이 된 해군의 목적) 마저도 극복하고, 그의 명예와 인생을 되돌려 받는 데 성공합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으로 명령 불복종에 의해 집단에서 도태되고 칼 브라쉬에의 훈련교관이 되어 그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역사의 그늘로 사라지는 선데이 상사(로버트 드니로 분)와는 달리, 쿠바 구딩 주니어가 연기하는 칼 브라쉬에는 꼿꼿하게 그의 철칙을 지키며, 그에게 주어진 과업을 모두 수행하고, 자신이 내건 조건까지 성취함으로써 역사의 위에 우뚝 서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법정 장면에서, 교본이 바뀌었다는 상급 장교의 말에 쿨하게 '그렇군요' 라고 답하는 선데이 상사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나, 자신이 결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확인해주는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칼 브라쉬에의 음성, 그리고, 역사의 문 밖으로 한명의 교관으로 걸어나가는 선데이 상사를 쫓아가는 브라쉬에의 눈길까지.. 후세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선생과 그의 훈련을 저버리지 않고 역사에 올라서는 제자의 모습을 모두 멋지게 포착해낸 영화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판사자리에 앉아있는 고급 장교들이지요. 인종과 배경을 넘어서서, 한 인간의 성취에 집중해 흐뭇해 하는 늙은 제독들과 마지막에 주인공을 명예롭게 복직시키고 주저앉는 반대역의 장교까지.. 미국적인 명예의 문화적인 가치는 이렇게 초월적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 퓨 굿 맨의 법정 싸움은 전혀 명예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명예에 대한 환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군 기강과 그 속에서의 비리에 대한 옹호를 강변하는 제셉 장군 역의 잭 니콜슨의 연기를 압도적이라고 평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톰 크루즈의 연기가 그에 못지않게 아주 약삭빠르고, 또 강력하게 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어 퓨 굿 맨의 법정은 한 인간의 성취와 명예를 다루는 자리가 아니고, 반대로, 집단주의의 획일적이고 반 개인적인 명예를 완전히 부숴버리는, 파괴하는 자리거든요. 게다가, 이 명예라는 것은 힘으로는 부서지지 않는 아주 뿌리깊고 끈질긴 것이다 보니, 최대한 가려운 데를 긁어서,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수밖에요.

 

 

 

 

그런 의미에서 캐피 중위의 논리적 공격, 장군이 말한 두 개의 논리가 완전히 모순되는 지점을 집어서 공격하는 방식과, 그가 제셉 대령을 다루는 방식, 제셉 대령의 말을 따라하는 듯 (크리스탈..) 반복하며 그의 언어를 훼손하고, 그의 성질을 긁으려고 쓸데없는 질문이나 초딩에게 확인받듯 재차 질문을 하는 방식, 뿐만 아니라, 제셉 대령이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하게 해서, 바로 그 말 속에 있는 군인의 단순한 명예욕을 자극함으로써 스스로 물리기보다는 자백을 선택하게 강요하는 마지막 확인까지.. 이 모든 것은 개인이나 집단의 명예가 자유와 생존권이라는 논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몰려가고 있습니다.

 

 


사실, 제셉 대령의 입장에서, 코드 레드를 자신이 명령했는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국가 안보라는 절대적 위기상황과 개인의 모든 것을 던져버린 그 무자비한 명예 앞에서, 겨우 얼치기 사병에 대한 코드 레드의 명령 따위나 혹은 팔랑거리는 배지나 들이미는 호모같은 하버드 애송이의 자유에 대한 옹호 따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자신의 비위를 긁은 고문관, 나약하고 이기적인, 소위 빠진 ㅅㄲ이기 때문에 집단에 해만 끼치는 개인,을 녀석이 희망하는 대로 전출보내지 않고 부대에 남겨서 혼줄을 내주고 군기를 잡겠다는 것은 오히려 고마운 일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함정이지요. 자격미달의 개인이라도, 그 개인의 생명이라면 어떤 집단의 통일성보다도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을 그로테스크하고 이해불가한 늙은이라고 강변하는 제셉대령의 주장은 강력하고 반박하기 어렵지만, 바로 그 논리의 끝에서 그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개인의 생존권을 침해하고 말게 됩니다. 법정에서는 그것을 불법적인 코드 레드의 시작점 이라는 위반사항으로 잡아내지만, 영화에서는 미국의 자유 안보 논리, 종종 자국의 불안국면을 타개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는 했던 갖은 음모론, 악의 축과 테러에 대한 공포의 조장, 에 대한 경계로 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부적격한 개인을 집단의 생존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 아니면 집단의 통일성을 오염시키면서라도 다양한 개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사실, 어 퓨 굿 맨의 상황은 전쟁 상황이 아니지요. 건강한 집단주의의 환상이 병적인 개인의 생존권에 언제나 우선하는 건지요? 맨 오브 아너의 주인공이 '이념'에서 '사업'으로 변화하는 사회적 변화의 국면에서 과거의 덕목인 '명예'를 우선시하며 판사들의 지지를 얻는 것과는 반대로, 어 퓨 굿 맨의 주인공 캐피 중위는 이전 세대가 가진 안보의 중요성과 당위성, 그로부터 파생된 잘못된 관행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자멸하도록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말하자면, 강인한 아버지의 비뚤어진 논리를 깨부수는 나약한 아들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속에서 그가 타고 다니는 아버지 세대의 임팔라는 캐피 중위의 취향이나 성향이 결코 제셉 대령의 안보지상주의의 근거가 되는 명예에 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상징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셉 대령도 잘 알고 있는 캐피 중위의 아버지, 모두가 존경하는 법무장관이었던 아버지는, 대령이 생도였을때, 이미 전설이었거든요. 임팔라는 이 영화에서 어쩌면, 이 전설적인 이야기로만 등장하는, 제셉 대령보다도 전 세대인, 캐피 중위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지도 모르지요.



이 숨은 아버지는 장식적이지 않고, 거품이 끼지도 않았으며, 딱 필요한 만큼의 기능성에, 직선적인 정직함을 주된 덕목으로 갖추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마치 63년 임팔라의 무료하다 못해 은근히 위엄이 서린 검약한 디자인과도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바로 그 무료하며 심심한 아버지의 아버지 이미지 속에서 또 다른 엄정한 무게와 멋을 재발견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캐피 중위의 동료인 와인버그 는 말하지요. 캐피 중위의 아버지 였다면 절대로 도박을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자신은 아버지나 다른 누구도 아닌 캐피 중위의 변론을 원한다고.

 


영화 속에서 진실을 안고 자살하는 마킨슨 중령은 캐피 중위의 임팔라에 몰래 타서는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캐피 중위의 임팔라는 제셉 대령이나 마킨슨 중령처럼 '대의를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데 능숙한 전 세대와는 또 다른,

그의 아버지 처럼 진실에 대해 열려있던 그 전 세대, 전설과도 같은 아메리카의 정의를 상징하는 지도 모르지요.



흠... 과연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