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보레는 GM 산하 최대 자동차 회사이자, 가장 고객층이 두터운 회사 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고급차보다는 중저가의 실용적인, 뭔가 쉐비(shabby?! no, Chevy!)한, 차량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있지요.
벨 에어의 최상위 트림으로 임팔라가 처음 구상될 때에도 당시 쉐보레의 수석 기술자 에드 콜(Ed Cole)은 보통 미국 시민이 살 수 있는 범위 내의 고급차(prestige car within the reach of the average American citizen) 라고 못박았습니다.
그것이 그저 재미없는 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쉐보레는 그 유명한, 하지만 절대로 진퉁 스포츠카라고는 할 수 없어서 거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낸, 콜벳도 만들었으며, 픽업이면서도 스포티한 엘 카미뇨 같은 차량도 만들었지요.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이 차량들이 그 분야의 첨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특히 미국인이 아니라면 더더욱, 콜벳이 지구 최고의 명스포츠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쉐보레의 퍼포먼스 차량들도 딱히 생각나는게 많지는 않습니다. 가장 유명한 중형대의 쉐빌 외에는 노바나 베가 같은 소형차량이나, 나스카에서 더 유명한 몬테 카를로, 그리고 임팔라 정도로(카프리스는 전에도 언급했듯이, 임팔라의 상위 트림이었지요), 포니카인 카마로를 제외하면, 화려한 차량들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퍼포먼스 보다는 실생활에 가까운 쉐빌이나 임팔라, 그리고 몬테 카를로 같은, 팬시하지 않고 심심한 차량들로도 쉐보레는 나름의 기술력을 보여주려 노력했고,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시보레는 미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가 된 것이죠. 쉐보레는 진짜 서민들의 차 라는 인식이 생겼으니까요. 스포츠카 라기보다는 아메리칸 스포츠카 라고 해야 할 콜벳도, 그런 의미에서, 미국인들이 진정 사랑하는 차가 된 것이죠.
말하자면, 화려한 올즈모빌이나 고급의 캐딜락이 아닌, 옆집에도 그 옆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임팔라 같은 차가 나스카를 평정한다든지, 뭐 그런 것이, 과거 쉐보레의 가장 상징적인 브랜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1963년 임팔라 Z-11 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특별한 차량입니다. 사실, 1962 년 말, Z-11 은 쉐보레의 가장 야심찬 작품이었고, 그 이유는 오로지 그 엔진에 있었지요.
포드의 390 인치 엔진에 자극을 받은 쉐보레는 보어와 스트로크의 확장을 통한 엔진 강화와 알루미늄 부품의 활용을 통한 차체 경량화를 통해 GM 의 348 인치 엔진으로 출력을 409 마력까지 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은 명실공히 큐빅인치당 마력비 1 대 1 을 넘긴 첫 번째 빅블럭 엔진이었습니다.
경량화와 출력의 극대화라는 두 가지의 목표만을 가지고 쉐보레는 이 엔진에 새로운 실린더, 특수 헤드와 밸브들, 두조각으로된 인테이크 매니폴드, 그리고 두 개의 카터 AFB 4 배럴 카뷰레터들 을 적용하고, 이 부품들과 엔진의 대부분을 알루미늄화 합니다.
그 결과로 나온 엔진은 무려 알피엠 6000 에 430 마력에 육박하는, 당시로서는 인치당 최고 출력의 수퍼 엔진이었고, 오직 4단 트랜스미션만 가능했지요.
쉐보레가 이렇게까지 Z-11의 엔진에 신경을 쓴 데에는 62년 임팔라의 성공이 큰 몫을 합니다. 62년 임팔라 SS(수퍼 스포츠) 사양의 경량버전들은 나스카와 드랙 레이싱 모든 부문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이지요. 63년 쉐보레는 SS 사양에서 더 나아가 오직 퍼포먼스를 위한 순수 레이싱 버전의 Z-11 을 제작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63년 초까지 쉐보레는 공장 직조로 57개체의 Z-11을 생산하고, 그에 더해 기존 62 또는 63년형 SS 임팔라에 대체 장착이 가능한 18개의 알루미늄 프론트 엔드도 만들어서 특별 세트로 판매합니다. SS 임팔라 스포츠 쿠페가 2774 달러, 알루미늄 경량 패키지는 1240 달러, 그리고 RPO (Regular Production Order) 버전이라고 불리는 57 개체의 공장 직조 완성품 Z-11 은 대략 4000 달러 였지요.
Z-11 이나 알루미늄 대체 셋트 모두 레이싱 팀이나 드라이버들에게 직접 판매된 것은 아니었고, 대개는 딜러 대 팀, 딜러 대 개인의 관계로 주문 양도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전 개체가 한 번에 다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대대적으로 판매하지 않고, 대회에서 노출시키는 형식이다 보니, Z-11 개체들은 때로는 알 수 없는 차량으로 신비화 되기도 합니다.
가장 유명한 예가 바로 63년 주니어 존슨 (Junior Johnson) 이 몰았던 백색 '미스터리' 임팔라 였지요.
데이토나 500 스톡카 경기에 처음 등장한 미스터리 임팔라는 배급기에 문제가 생겨 리타이어 하기 전까지 월등한 1등을 유지했고, 경쟁자들은 즉시, 심지어 예비 경기에서 이미, 이 차의 힘을 느꼈습니다. 비약적으로 강해진 엔진으로 존슨은 63년 그랜드 내셔널에서 일곱 번 우승하고, 아홉 번 기록을 갈아치우지요.
심지어, 이 엔진이 시대에 앞선다는 이유로 나스카는 존슨과 홀리 농장 양계 산업 팀의 임팔라들을 그 해 말에 경기 출장 금지 조치 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이 개체는 그 별칭 그대로 신비로운 차로 현재까지 남아서 탈라데가의 국제 모터스포츠 박물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1963년, 주니어 존슨의 임팔라 뿐만 아니라, 57대로 추정되는 모든 양산형 (RPO) Z-11 의 운명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게 됩니다. 63년 초반 출시된 57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것이죠. 그러고 보면, 60년대 초 중반의 퍼포먼스 부문에서, 쉐보레 는 유난히 눈에 띄지 않는 브랜드 입니다. 가장 서민적인 미국 자동차의 상징 쉐보레에는 어째서 이때에만 성공적인 퍼포먼스 차량이 그렇게 적은 걸까요?
1970년에야 등장한 베가는 차치하고라도, 60년대 초반에 등장한 노바는 수퍼스포츠 사양 Z-03 이 있었음에도 60년대 후반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64년에 등장하는 중형 기함 쉐빌-말리부도 그 뛰어난 모델들에도 불구하고 그 진정한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을 70년 SS396과 454 가 등장할 때 까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지는 못하는듯 합니다.
어째서 일까요? NHRA의 성장기이자 나스카의 확립기인 이 중요한 시기에 쉐보레는 대체 무슨 역할을 한 것일까요? 59-63년 Z-11 까지 그 전설적이고 강력한 임팔라들은 전부 어디로 가고, 60년대 중반부터의 임팔라의 이미지가 캐딜락의 하위급 중대형 패밀리 세단으로 굳어버린 것일까요?
이러한 부진의 밑바탕에는 당시 GM의 정책적 결정이 깔려 있습니다. 미국 연방 정부는 1911년 규모가 너무 커져서 시장에 경쟁구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최강의 석유 회사였던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 그룹을 특별법에 의거 강제 분해해 버렸던 전력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엑슨(Exxon)과 모빌(Mobil), 그리고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쉐브론(Chevron) 등이 탄생하게 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유명한 독과점규제(Antitrust) 법의 발현이었습니다. 한 회사가 국내 시장 공급에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크게 되면 발현되는 이 법의 내사 대상에는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은 물론 GM 도 연루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63년 이었지요. 61년과 62년, GM은 전미 자동차 판매의 53프로를 차지하는 기업이 됩니다. 그리고 62년 말 부터는 정부로부터의 압력을 받게 되지요. 즉, 전국 판매량의 60 프로가 넘게 되면 GM 의 그룹 해체 작업에 착수할 수도 있다고 한 것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GM 본부는 자회사들에 특별정책을 공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63년 GM 의 레이싱 밴(Racing Ban) 입니다.
레이싱 밴은 GM 자회사들의 과열된 성장을 멈추기 위해 모회사에서 전 계열사의 자동차 경기 참가를 공식적으로 금지한 정책입니다. 회사 차원의 팀 운영은 물론 모두 멈추게 되었고, 공장의 기술적 지원도, 그리고 각 자회사들과 계약 관계에 속한 모든 레이싱 팀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철회한 것이지요.
RPO Z-11을 공급받았던 개인들과 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쉐보레 본사와의 계약은 유지되지만, 막상 파츠, 운영, 그리고 홍보에 대한 스폰서쉽은 끊기게 되고, 무엇보다도, 63년 초반에 생산된 57대를 마지막으로 Z-11 도, 임팔라 SS 의 퍼포먼스 용 강화 버전도 모두 백지화 되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즉, 쉐보레는 의도적으로 임팔라의 퍼포먼스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그 과정에서 Z-11은 사라졌으며, 오직 극소수의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이미 생산된 소수의 Z-11 의 가치가 매겨지게 된 것이지요.
레이싱 밴이 일반 자동차의 판매에 영향을 미칠만큼 퍼포먼스가 중요한 요소일까요? 이 시대의 미국에서는 분명 그랬습니다. 이미 공급된 50여대의 개체들은 드랙 레이싱과 나스카에서 빛을 보았지만, 63년 이후 쉐비 차량들은 레이싱에서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GM은 무사하게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 혁신적인 엔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Z-11 은 고성능 스포츠카로서 임팔라의 마지막을 장식한 차량이 된 것이지요. 게다가, 사후관리의 부실로, 대부분의 개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라진 개체들 중 가장 유명한 하나가 바로 버디 마틴(Buddy Martin)과 로니 삭스(Ronnie Sox)의 프렌들리 쉐보레 레이서 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차량은 두 사람의 오랜 파트너쉽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듯 합니다. 아마 그래서 웰리에서도 이 차를 재현해 준 것이겠죠?
노스 캐롤라이나 시골 농부 집안 출신이었던 버디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직업을 두루 섭렵하며, 취미로 드랙 레이싱을 즐기던 레이싱 마니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들이대기의 전문가였지요. 예를 들어, 그는 1962년 당시 제일 핫 했던 임팔라 SS 버전을 구입했는데, 차량의 성능 향상을 위해 유명 드라이버였던 네드 자렛 (Ned Jarrett) 의 정비와 조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연줄이나 일면식 없이 곧바로 직접 방문하기도 합니다. 사람좋은 자렛이 흔쾌히 돌보아준 이 버디의 임팔라가 바로 63년 소수로 출시된 경량 패키지를 장착한 차량 중 하나 였지요. 전륜 펜더와 후드, 그리고 범퍼 등, 125파운드의 무게를 절감시킨 버디 마틴의 임팔라는 푸른색이었습니다.
반면에 로니 삭스는 벌링턴에 있던 아버지의 가스 스테이션+서비스 정비샾 을 놀이터 삼아 자란 진퉁 드라이버, 혹은 폭주족(?) 에 가까웠지요. 14살 때부터 아버지가 중고차를 사주어서, 첫 차인 32년 플라이모스 쿠페로는 친구들 태우고 마실 나갔다가 쉬프팅 실수로 트랜스미션을 뽀개놓는가 하면, 포드 쿠페, 올즈88 등을 정비하면서 타다가, 55년식 올즈 모델을 몰 때 쯤에는 동네 친구들끼리 경주에 빠져서 사고를 치고 다니게 됩니다. 동네 할머니가 경찰을 불러서 잡힌 적도 있고, 심지어, 친구들이 연루된 사고에서는 사상자가 생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지요. 근데, 놀랍게도, 지역 경찰들은 이 마지막 사고의 수습 후, 이 문제아들을 위해서 돈을 모아 지역 옛 공장에 드랙웨이를 만들어줍니다. 로니 삭스는 이제 합법적으로(?) 지역 레이싱에 참가, 점차 자신의 재능을 다듬어 갑니다.
하지만, 1958년, 이번에는 드랙웨이가 아닌 공도에서의 과속과 난폭운전으로 12개월 집행유예를 받게 된 로니 삭스는 59년 시즌을 쉽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역 폰티악 딜러이자 자신도 나름 유명한 레이서였던 잭 애쉴리(Jack Ashley)의 부탁으로 처음으로 스폰서쉽 하에 애쉴리의 폰티악을 몰고 지역 경기에 참가하게 되지요. '언터처블'이라는 이름의 이 폰티악은 플로리다 데이토나 에서 열린 전국 경기에도 참가하게 되는데, 50 여대의 선발된 참가차 중 챔피언과의 경기를 제안받아 이겼으나, 차후 검사에서 미등록된 철제 빔 이 발견되어 실격당합니다. 유명한 아니 베즈윅(Arnie Beswick)과의 경기를 놓치게 되지만, 이로써 삭스는 처음으로 전국 경기에서 눈길을 끌게 됩니다.
폰티악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로니 삭스와 잭 애쉴리 입니다.
60년 시즌을 40전 39승 으로 마친 삭스에게 애쉴리는 새로 나온 61년 슈퍼듀티 폰티악 팩키지를 즉시 주문해 줍니다. 이 드랙용 폰티악은 특별제작된 11 대중 한대였지요. 하지만, 이 차는 로니의 쉬프팅과 출력을 견디지 못해 트랜스미션이 부서지게 됩니다.
2000년대 초반 잭 애쉴리의 로니 삭스 폰티악은 경매에 나와 이목을 끌기도 했지요~.
그리고 이 때 쯤, 자신감이 붙은 로니는 진정한 자신의 차로 경기를 하기를 원하게 되었지요. 로니 삭스는 1962년 신형 레드 임팔라 SS 버블탑 쿠페를 구입, '썬더 인 캐롤라이나' 라는 이름을 붙이고 시즌을 시작할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썬더 인 캐롤라이나' 라는 이름은 바로 1,2년 전에 개봉했던 B급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드라이버 선생이 드라이버 제자의 부인을 꼬신다나 뭐라나.. 마치 딜러판 아침 드라마 같은 전개였달까요?
어쨌건, '썬더 인 캐롤라이나'는 로니 삭스에게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 차량 이었습니다. 처음에 엔진 회전(rev)가 너무 높아서 짜증이 난 로니는 SS 퍼포먼스 임팔라의 대부와도 같았던 '다이노' 돈 니콜슨 ('Dyno' Don Nicholson) 에게 전화로 상담을 요청하는데, 친절한 니콜슨은 얘기를 들은 후 아마도 잘못된 캠쉐프트가 장착된 것 같다고 견해를 밝힙니다. 로니가 검사해보니 파워글라이드 장치를 위한 캠이 설치되어 있었고, 캠을 바꿔 주자 차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돈 니콜슨은 1962-63 임팔라 퍼포먼스의 대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웰리는 돈 니콜슨의 차도 모형으로 만들어 주었지요~.
앗, 그런데, 바로 이 사진에서 돈 니콜슨의 임팔라 양쪽 로우빔 라이트가 시커멓게 보이는군요!
이 시기는 드랙 레이스가 전국 규모로 확장되고, NHRA가 커지면서, 유명 선수들은 물론, 램 차저스, 골든 코만도스 등 전문 드랙 레이싱 팀들이 속속 성립되고 있었지요. 그때까지는 보통, 경기 우승자에대한 스폰서쉽을 주로 스파크 플러그나 오일 같은 부품 정도에 숙식 제공 정도로 했는데, 60년대 부터 기백달러 이상으로, 두둑한 상금 제도도 생기고, 드랙 레이싱이 점차 산업화 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이 62년 임팔라 SS 의 레이싱 사진에서는 반대로 안쪽 하이빔 소켓이 꺼멓게 보이는 군요~ 반면에 제가 찾은 로니와 버디의 임팔라가 등장하는 그 어떤 사진에서도 모형과 같은 소켓의 활용이 보이는 예는 없었습니다. 로니와 버디의 오리지날 Z-11은 정상적인 헤드라이트를 갖고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지요. 즉, 웰리의 고증-재현 실수 1번 되겠습니다. 뭐 그래도 임팩트는 있지만 말이지요~ㅋ
어쨌거나, 바로 이 시점, 이런 환경에서 같은 캐롤라이나 출신의 로니와 버디는 여러 경기의 경쟁자로 만나게 됩니다. 특히, 버디는 견딜 수가 없었지요. 나름 꽤 승률이 높은 줄 알았는데, 로니만 만나면 이길 재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버디는 로니에게 다가가 한 팀이 될 것을 제안하고, 로니는 후원이 아닌 동업 관계라는 데에 승낙을 하며, 둘은 63년 시즌을 위해 신형 임팔라 Z-11을 주문하게 됩니다.
둘 다 스폰서가 필요했기 때문에 동네의 프렌들리 쉐보레 상회에 스폰서 쉽을 요청하고, 지역 쉐보레 대리점을 통해 벌링턴으로 차를 주문하였으며, 로니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삭스 싱클레어 서비스 샵에서 튜닝을 한 이들은 '로니와 버디' 라는 팀으로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시작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메릴랜드를 거쳐 차례로 전국 대회를 향해 나아갑니다. 위 사진의 대쉬 보드를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로니와 버디는 남부의 쉐보레 팬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는데, 북부에서는 그들의 연승에 대한 의심도 컸다고 합니다. 62년 임팔라 웨건이 끌고 다니는 트레일러에 얹혀서 대회를 참가하던 이 Z-11은 결국, 1963년 인디아나폴리스의 NHRA 내셔널 (파이널)에 진출하죠.
버디 마틴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드라이버로서 로니의 기술은 재능이었습니다. 그는 발과 손의 사용이 딱딱 들어맞았지요. 변속에 더해서, 반응 속도 또한 놀라웠습니다. 그때는 대부분 4단 변속 차량을 몰았지만, 다른 드라이버들은 왼쪽이나 오른쪽 기어를 놓쳤거든요. 하지만, 로니에겐 그런 일이 없었어요. 모두 변명을 했지만, 로니는 누구의 차든 탈 수 있었고, 어떤 식의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Ronnie's skill as a driver was a gift. He was very coordinated with the hand and foot. In addition to hi shifting, his reaction times were outstanding. Although most people drove 4-speed cars at the time, other drivers missed gears left and right, but that never happened with Ronnie. Everybody had an excuse, but Ronnie could get into anyone's car and have no problems whatsoever."
임팔라 앞의 버디 마틴과 운전석의 로니 삭스. 다시 대쉬 보드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모형과의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웰리 모델의 잘못된 고증 재현 2번 되겠습니다. 뭐, 큰 문제는 없지만요~.~
당시 또 다른 유명한 63년 Z-11을 몰았던 데이브 스트릭클러의 '올드 릴라이어블' 임팔라 입니다. 바로 옆에는 닷지 330 도 보이는 군요. 정상적인 Z-11 의 커다란 오일필터를 보실 수 있습니다.
데이브 스트릭클러의 경우 더 유명했던 것이 스톨 헤더와 빌 젠킨스 엔진 튜닝이라는 막강한 뒷배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로니와 버디는 엔진과 튜닝도 직접 손볼수 있었으므로, 전국 대회를 거치면서 기술적 혁신도 이루게 됩니다. 그 때까지는 더 나은 무게분배를 위해 차체 앞바퀴 쪽이 들어올려진 형태를 선호했는데. 그것이 효과가 없음을 알아냈으며, 당시 기준이었던 높은 공기압의 넓은 바퀴폭(rim) 또한 큰 효과는 없음을 알아냈습니다. 오히려, 공기압 낮추자 차가 더 안정되게 빨라졌고, 곧 다른 팀들이 따라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1963년, 로니 삭스는 또 다른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Z-11을 구매한 잭 메이(Jack May) 라는 사람이 로니에게 자신의 차를 몰아달라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버디 마틴과의 동업에 확신을 갖고 있던 로니는 이 제안은 거절했으나, 아무래도, 자신들의 차와 동일한 형제차라는 생각에 엔진 빌딩과 튜닝을 같이 해주기로 동의 합니다. 그리고, 로니와 버디의 오리지널 차는 NHRA SS 클래스 규격을 유지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잭 메이의 차는 순수 매치 레이싱 용으로 개조해 주지요. 그래서, 스펙상 거의 동일한 두 차가 탄생했는데, 잭 메이 차의 인테리어는 레드로 차별화했으며, 벌링턴 출신의 래리 윌슨(Larry Wilson)을 드라이버도 새로 영입해서, 'Mr,427 II' 라고 앞 바퀴 펜더 뒷 쪽에 적고 2호차로 명명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잭 메이의 차량은 2000년대 초에 찾아서 복원한 것이지요. 뉴욕 주 버팔로에 63년식 경량 임팔라가 한 대 있다는 제보를 받은 복원자가 확인, 조사, 발견 당시에는 여러번 덧칠되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이 차량이 로니 삭스가 튜닝하고 운전도 했던 잭 메이의 Z-11 이었음을 확인하고 차량의 매매과정을 추적, 또는 역추적 하면서 중간중간에 따로 떼서 팔아 버린 부품들도 다시 공수해서 완벽하게 복원했습니다. 이 차에는 로니와 래리 윌슨이 공동 개발한 리어 트랜스 미션을 보호하는 트랙션 바가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론, 헤드라이트 인덕션 같은 것은 없지요.
1962년 부터 로니와 버디가 갖고 있던 시보레와의 계약은 GM의 레이싱 밴에 따라 63년 초부터 사실상 무효한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따로 스폰서 쉽을 가지지 못했던 이들이 차를 바꿔야 할 때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로니와 버디를 처음으로 전국에 알렸던 전설적인 Z-11은 63년 시즌 이후로 자취를 감추고, 그들은 1963년 가을 포드 머큐리 팀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1964년 시즌, 그들은 머큐리 코멧(Comet) 을 타고 다시 한번 전국 대회를 쓸어가며, 빌 스루스베리 (Bill Shrewsbury), 돈 니콜슨 (Dyno Don Nicholson), 로저 린다무드(Roger Lindamood), 데이브 스트릭클러(Dave Strickler), 론 펠레그리니(Ron Pellegrini), 그리고 제이크 킹(Jake King) 같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지요.
최고스펙의 차량이었지만, 레이싱 밴 이후로 존재 가치가 사라진 57대의 Z-11은 각 딜러샵의 지원이 끊기자 중요성이 사라지고, 보존도 되지 않아서,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날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7-8 대 정도의 Z-11 들도 대부분 반 파인드(Barn Find) 이후 복원된 것들이지요.
어쩌면 로니와 버디의 오리지널 Mr.427 도 어느 시골 구석의 헛간에서 잠자고 있지는 않을까요?
어쨌거나, 63년을 무사히 넘긴 GM 쉐보레의 임팔라는 1977년까지 최고 인기 브랜드로 군림하며 우리나라의 소나타 같은 존재가 됩니다. 비록 1963 년 까지의 강력한 퍼포먼스의 명차라는 이미지는 퇴색되었지만, 임팔라의 초기 활약을 기억하던 사람들에게는 뭔가 아련한 존재가 된 것이지요.
어쩌면, 바로 이런 아련한 열정과 그 열정을 감추고 있는 무덤덤한 모습에 반한 롭 라이너 감독이 63년 임팔라를 캐피 중위의 차로 쓴 것은 아닐까요? 군대의 화려하고 꽉 끼는 유니폼과 제식, 그 속에 안보와 명예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진실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켜 드러내는 캐피 중위는 마지막에 자신이 제셉 대령의 아들이나 소년이 아니라 미합중국 법무 중위 임을 분명히 합니다. 캐피 중위의 임팔라는 단지 사회초년생이 타는 막 굴리는 똥차가 아니라, 그 모든 진실을 담는 중위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그것은 마치 마치 맨 오브 아너에서 사회 부적격자로 전락한 선데이 상사나 여인의 향기에서 미치광이 장님 퇴역장교가 되버린 프랭크 슬레이드 소령(알 파치노)과도 같을 지 모릅니다. 여인의 향기에는 찰리(크리스 오도넬)와 프랭크가 뉴욕의 페라리 딜러 샵에서 프랭크의 죽기 전 소원대로 페라리를 시승하는 겁나 멋진 장면도 있지만,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는 프랭크는 가난한 찰리를 위해서 썩어가는 집단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명예로운 침묵을 지키는 찰리가 오히려 전통과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연설을 합니다.
1963년 Z-11 이 그 시대 가장 강력한 엔진을 싣고 있었음에도 조직의 목적에 의해 거세된 차량이었듯이, 이 영화들은 모두 개인과 집단의 문제를 다루며, 그 속에는 과거의 명예를 감추고 나락에 빠진 아버지 세대도 등장합니다. 어쩌면 이런 이미지가 바로 매니아들이 생각하는 63년 임팔라 RPO Z-11의 이미지는 아니었을까요?
로니와 버디는 63년 GM 쉐보레, 그리고 64년 포드 머큐리 와의 스폰서 쉽을 거쳐, 1965년, 크라이슬러 플라이모스와 다시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이들은 플라이모스의 명차들과, 그 명차들에 도색된 흰색,적색, 그리고 라이트 메탈릭 블루의 배합으로, 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전설적이며, 가장 눈에 띄는 팀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바로 삭스 & 마틴 이 성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삭스 & 마틴 의 잊혀진 기억 속, 삭스와 마틴을 만나게 해 준 그 시작점이 바로 이 Z-11 임팔라 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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