ジョゼと虎と魚たち- 犬童 一心 (2003)
이 영화는 감상적이다. 영화는 감상적인 코드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가끔 순전히 의도적이다. (조제가 읽고 있는 책 또한 감상적이다) 멋으로 담배를 피우는 조제와 그 역할을 하는 여배우의 연기처럼. 그런데, 이러한 치기어린 감상성도 이 영화의 특별한 이야기 속에서만은 왠지 절실해진다. 구속되고 감추어진 존재인 조제에게 바깥 세상에서의 삶은 그대로 처녀지이며, 그 외부 공간은 사실상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책 속에서, 그녀의 꿈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연기 속에서, 항상 새롭게 구성된다.
전혀 몰랐던 이방인과의 관계, 사랑이란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단순히 역할이나 연기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삶의 시작과도 같지만, 동시에, 이미 너무나도 무수한 상상 속에서 꿈꾸어져 왔기 때문에 다시 일종의 연기가 된다. 그녀는 그 속에서 삶을 연기한다. 그러므로, 그 삶은 가짜이며, 동화책 같은 틴에이지 소설이거나, 꿈 속에서 부유하는 물고기 같이 현실성을 상실한다. 하지만, 물론, 이 연기 또한 그녀에게는 절실하다. 그렇게 가짜이고 유치한 삶이라도 그녀에게는 단 한 번만 주어진다. (그래서, 그녀의 이상한 할머니의 억압과 은폐는 이 영화에서 일종의 사회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 심지어 실제로 등장하는 사회 봉사자들 (과 츠네오의 다른 여자친구) 마저도 이 영화에서는 다른 의도로 사용된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꿈이라 해도, 그것이 딱 한 번의 기회로 그녀에게 주어질 때는 절실한 무게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관객이 보기에는 (츠네오의 눈에도), 감상적이고 빤한 감상성도, 조제 본인에게는 인생의 전부가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감수성은 조제에게만은 '이미 친숙한 것의 반복'이나 경험이 아니다. 단 하나뿐이라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는 연극이라는 인식은 그녀에게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조제는 단 한 번 담배를 피우지만, 그리고, 아마도 익숙하지 못한 연기에 불과하겠지만, 그것은 그 순간 그녀에게는 이미 연기를 통한 삶이며, 따라서 그 어떤 다른 배우가 자연스럽게 피워 무는 담배보다 더 절실하다.
조제에게 여성성이란, 사랑이나 섹스에서 여성의 역할이란, 잡지에 나타난 그대로이다. 수없이 반복해 읽어서 이제는 아예 외워버린 사강의 책은 단지 간접 경험으로 만족되는 대리 환상이 아니며 바로 단 한번의 실연을 위한 절실한 요청이다. 대낮의 삶은 한 순간 한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현실이며, 유모차 속의 숨은 보물이나 마약(상상이나 구설수)이 아닌 한 인간(실재)으로 거리에 나서는 순간의 그녀에게는 모든 김빠진 감수성마저도 그대로 소중한, 단 한번뿐인 삶의 요구가 된다.
따라서 조제의 사랑은 감상적이지 않다. 감상적인 것도 그녀에게 이미 언제나 실제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조제는 모든 것을 걸고 자기 연기에 몰입하는 풋나기 연극 배우처럼 그렇게 삶을 진정으로 연기해 나간다.
츠네오에게 조제는 어쩌면 환상이며 연극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환상이 그저 우리가 연속극을 보듯 바라보는 '환상'이 아니라, 바로 그와 동시에 존재하는 삶이고 실재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환희이며 결국에는 버거운 짐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그러한 삶에 자신을 내던질 수는 없다. 부풀려진 구설수 속에서 유모차 안에 숨어 지내던 조제와는 달리, 그에게 삶은 이미 너무나도 빛바랜, 그저 그런 일상들의 연속이다. 그가, 그저 호기심과 만족이 아니라 삶 전체를 걸고 조제의 연극에 동참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인식 속에서, 츠네오는 언제나 거짓말장이이며, 무책임한 가짜 배우가 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는 조제를 할머니로부터 구하고, 현실로 이끌어내 유모차 밖으로 꺼내 주고, 자신의 (그리고 우리들의) 현실로 내몰아야 할까?
츠네오는 조제와의 사랑을 통해 그의 삶도 더 이상 연극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어떤 구원처럼, 혹은 교훈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조제를 통해, 그에게도 역시 사랑은 단 한 번의 돌이킬 수 없는 현실으로, 다가왔다 스러져 가기 때문이다. 그가 조제로부터 배우는 것은 자신은 언제나 3류 배우라는 사실이다. 단 한번 뿐이기에 어색한 연기라도 그대로 삶이 되는 조제와는 달리, 많은 기회가 있는 잘 생기고 싹싹하며 계산적이기도 한 츠네오의 동정심이나 호기심은 절실함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조제에게 주고 있는 것들이 무언가 일생일대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제와의 관계만이 다른 어느 누구와의 '그렇고 그런' 관계들에서도 얻지 못했던 어떤 무게감을 갖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어느 순간 자신이 도망쳐버릴 때에는, 무언가를 이미 상실해 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감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이유는 이 영화가 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감상적인 것에의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조제는 비현실적이지만 한없이 운명적인 어떤 이야기 속의 감금된 여주인공으로 츠네오의 죄의식을 구성할 것이며,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의 장면은 순수한 기쁨의 묘사로, 어느새 연극이 아닌 연극 속의 순수하게 기쁜 현실, 혹은 그 가상의 현실을 향한 끝없는 '의지'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그 연극성을 고수하지만, 배우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이미 삶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속에서 이들의 삶은 문학적이 된다. 조제의 '아들'이 '멍청이'에게 빌려준 차를 발로 차면서 욕을 하는 순간, 어느 차원에서 (조제의 삶 속의 어떤 작은 연극 속에서) 그는 그 결말을 알고 있는 배우로, 그것이 연극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속하도록 운명지워진 삶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자신의 삶을 해저의 조개에 비유하는 조제 역시, 어떤 세계관 속에서는, 삶을 구조짓는 연극의 결말을 알고 있지만, 그 삶을 마치 "연극배우처럼 진실되게" 살고 싶어 한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무엇이 작가의 본래 의도였건, 영화는 결국 연극이 끝난 후의 연극 배우의 모습을 현실 속에서도 다시 한 번 예술로, 조각같이 빚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고기를 굽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조제를 만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전동차와 함께 등장하는 이 조제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실재의, 일상의 조제이다. 단 한번뿐인 연극은 이미 끝나서 삶은 그대로 진부하고 무의미한 일상으로 타락해 버렸다. 하지만, 그 한번의 연극을 통해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연극배우의 비극성을 획득한다. 가만히 앉아서 지긋이 앞을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게는 마치 하나의 조각상 같았다. 그, 버려진 조제의 표정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끝난 현실이란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동시에, 그 모든 정돈된 응시의 표면에 가만히 포개어진 삶의 역사성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조제에게 삶은 곧 한번뿐인 연극이며 연극은 곧 단 한번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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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글에는 밑에 알라딘에서 퍼온 원작 소설 평과 인용 부분들을 붙여 놓았는데, 이번에 잘라버렸다.
** 뭐 그렇고 그런 좋은 점들도 없진 않겠지만, 역시 틴에이지 소설이란 느낌이 너무 강해서..
*** 에 또, 그래서 이건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 위의 커버는 영화 포스터가 아니라 원작 커버인데, 왠지 영화 포스터들이 그냥 그래서 대신 올렸다..
++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물고기는 산갈치이다. 아래 사이트에 비디오와 간략한 설명, 그리고 사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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