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Rod Steiger & Denzel Washington - from Hatred to Justice

이박오 2012. 5. 24. 09:05

 

 

The Hurricane - Norman Jewison (1999)

 

 

 

나는 프로 권투 선수였습니다.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기술과 증오를 모아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게 내 일이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루빈 허리케인 카터는 살인자가 아닙니다. 사회에 위험요소로 여겨지며 20년을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인간으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고, 하루에 열 다섯번씩 점호를 받았습니다. 사회 정의를 지킨다는 건물에 수감되어 있지만, 거기에 나를 위한 정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이 증거들을 고려해주었으면 합니다.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당신의 양심을 져버리지 마십시오. 법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법이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그 더 높은 원칙을 생각해주십시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정의, 정의일 뿐입니다.

I was a prize fighter. My job was to take all the hatred and skill that I could muster and send a man to his destruction. and I did that. But Rubin Hurricane Carter is no murderer. 20 years I spent locked up in a cage considered a danger to society. Not treated like a human being not treated like a person, counted 15 times a day. I serve my time in a house of justice and yet there is no justice for me. So I ask you to consider the evidence. Don’t turn away from the truth, don’t turn away from your conscience. Please don’t ignore the law. Embrace that higher principle for which the law meant to serve. Justice is all I ask, your honor. Justice.

이 영화로 노만 주이슨은 '밤의 열기 속으로' (In the Heat of the Night, 1967)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무려 30년 후에도 편협한 세상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서운 일이다. 30년 전에 별 생각없는 차별주의자에서 유색인종도 똑같은 사람이며, 때로는 더 존엄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경관 역할을 했던 대배우 로드 스타이거는 이제 냉정하지만, 그러한 '주의'따위에 더이상 연연하지 않는 초월적인 판사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판사 앞에서 루빈 역을 맡은 댄젤 워싱턴은 나는 내 모든 증오를 모아 상대를 파멸로 몰아넣는 직업 싸움꾼(prize fighter)이었습니다 라고 최종 변론을 시작한다. 이렇게 도발적인 수사법은 냉정하던 판사를 동요시킨다.

미국 영화에는 유럽이나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정치, 법정 영화의 전통이 있다. 흑백 영화 시대에도 다소 아동 취향인 듯 해도 여전히 뛰어난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 뿐만 아니라, 감동적인 법정 영화들인 '앵무새 죽이기'나 '성난 열 두명' 같은 걸작들이 있었고 그것은 현대까지 계속 되는 민주주의의 신화인 미국 정치 체계에 대한 영화계의 찬사 같은 것이다. 물론, 그들은 미국 정치가 그만큼 평등하고 정의롭다 라고 치장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미국의 모든 뛰어난 정치, 법정 영화들은 사회의 편협함과 불평등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진실을 덮으려는 기득권과 진실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간의 싸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미국 영화는 미국적 이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것, 그것을 볼 수 있는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 자유 속에서 진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 언제나 감동적인 경험이 된다.

언제나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작품을 만들어온 거장 노만 주이슨의 허리케인 역시 그러한 위대한 영화들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직접적으로 정치나 법정을 치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은 어떤 재판 과정에서의 스릴 같은 것 보다는 그런 것 위에 존재하는, 사회의 무서운 편견과, 그 편견에 대항하지 못하고 무력한 저항에 그치고 마는 사회 운동, 그리고, 그런 것들을 관통해 버리는 어떤 개인들의 자각과 행위 같은 것들을 더 강조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법정 영화가 아니라 일종의 기적적인,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고, 또 요구 되어야만 하는, 어떤 각성에 관한 영화가 된다.

사회 (영화 속에서는 한 형사로 집중되어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결국 모두가 싸우는 것은 그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로 대변되는 사회의 어떤 시선이다.)의 편견에 의해 전 생애의 절반 이상을 합당한 이유 없이 감옥에서 보내는 루빈 카터. 감옥에서의 시간은 그를 복수에 불타는 미치광이로 만드는 대신 자유를 꿈꾸며 염원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그래서, 처음에 그는 자신의 모든 증오를 모아 자신의 신체를 무기로 만들고, 그 무기로 자신을 가두는 어떤 힘이라도 파괴해 버리고 싶어한다. 감옥에서 나온 인생의 첫 번 째 자유로운 시절에 그는 "허리케인"처럼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권투선수가 되어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 간다.

하지만,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그의 두 번째 구금이다. 무고하게 종신형을 세 번 씩이나 받는 죄수 허리케인은 그를 구하려는 사회 각층의 도움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배심원 재판에서 모두 원심 그대로의 선고를 받는다. 경찰과 검사들, 그들의 경력과 권력의 이해관계가 얽힌 주 법정의 싸움에서 진실 따위가 설 자리는 없다. 허리케인은 세상에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박탈 당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스스로 지워나간다. 가족, 경력, 자유, 정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원한(증오로 가득찬 자신)과 욕구(슬픔과 공포로 가득한 자신)를 스스로 지워 버리고, 자신을 '무'로 만드는 것(윤리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바로 영화 속의 '허리케인'의 감옥에서의 윤리가 된다.

대신, 그는 그 거대한 부정의함과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자신만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킨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그가 쓴 감옥 수기인 '16회전 (The Sixteenth Round)'의 헌책을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 흑인 소년이 읽게 되면서부터이다. 나중에 그 소년이 자신을 찾아 왔을 때, 허리케인은 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를 초월하는 (transcending the place) 법의 중요성과 그러한 도구로써의 글쓰기의 마술과 같은 힘. 레즈라에게 허리케인은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라. 그 이상이지.' 라고 한다. 쓰고 읽는다는 것은 상대방과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훨씬 더 창조적이고 구조적인 활동이다. 허리케인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무기(weapon)라고 선언한다. 첫 번째 구금에서 자유를 힘으로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의 신체를 무기로 다듬었다면, 이제 그는 힘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는 읽고 쓴다는 것은 감옥 안에서도 '감옥 벽 위로 올라가서' 세상을 굽어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무고하게 감옥으로 몰아넣은 법정의 절차들을 면밀하게 재검하며, 더 나아가,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의 편견과 부조리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이 특별한 인물의 각성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허리케인은 그렇게 되기 위해 비인간적인 감옥에서 자신을 인간이 아닌 강철로 제련해야 했으며, 모든 인간적인 욕구들을 배제한체, 승산없는 법정 싸움만을 고독하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편견 앞에서의 '기적', 자신을 구금하는 그러한 정의를 초월하는 기적을 일궈내는 것은 허리케인 혼자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뜻밖에도 자신과 아무 연관도 없던 소년 레즈라가 토론토에서 역시 아무 연관도 없는 세 명의 캐나다 사람들과 함께 나타나면서 이루어진다. 이 영화의, 그리고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너무나도 극적인 실화가 안고있는 힘은 이들이 '도움'을 주면서 시작된다. 감옥의 인간적인 간수는 '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해준다.

처음에 무죄란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상품(highly overrated commodity)에 불과하다며 타인의 도움을 계산적으로 따지고 거부하던 허리케인도 결국 고독한 강철에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루빈 카터가 얻는 것은 단순히 재판 과정에서의 도움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감옥에서 버틸 수는 없다는 자각이다. 강철로 감옥에서 홀로 버티는 일의 의미 없음을 깨닫는 것, 그것은 나약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해지는 것이며, '부활'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어떤 관계의 순환을 보여준다. 브루클린의 읽지도 쓰지도 못하던 소년 레즈라는 그의 똑똑함을 눈여겨 본 캐나다 인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그가 산 첫 번 째 책 '16회전'을 통해 허리케인을 알게되고 그의 무고함을 알게 된다. 허리케인은 가난했던 흑인 소년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흑인 소년은 보답으로 삶을 되돌려 준다.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 그에게 한 리포터가 묻는다. 아직도 허리케인 입니까? 나는 언제나 허리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허리케인은 아름답죠.

영화 속의 허리케인은 자신과 레즈라의 이러한 관계를 이렇게 말해준다.

 

 

니가 샀던 첫 번째 책은 뭐였지?

당신 책이요.

.. 우연이었다고 생각하니?

아뇨.

나도 그래.

레즈라.  라자러스의 줄임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루빈. 창세기 29 32. "아들을 보라."

그 둘을 붙여봐, 레즈라. 그러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아들을 보라."  우연이 아니지.

미움이 나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사랑이 꺼내줄거야.

 

Lesra, short for Lazarus. “He who is risen from the dead.”

Rubin, Genesis Chapter 29, Verse 32. “Behold a son.”

You put those two together, Lesra, and you have “Behold a son who is risen from the dead.”

That’s no accident.

Hate put me in prison. Love’s gonna bust me out.

 

 

 

 

*허리케인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YTzvLMUfwB8

 

 

 

**

루빈(Reuben)은 야곱(Jacob)과 레아(Leah)의 첫 번째 아들이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Rachel)에 반해 결혼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라반은 7년동안 그를 부려먹고,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와 결혼시킨다. 따지는 야곱에게 언니를 먼저 결혼시키는 것이 규율이라면서 다시 7년간 봉사하겠다고 약속하면 라헬도 결혼시켜주겠다고 한다. 라헬은 아름답지만 욕망도 커서 야곱의 아이를 낳기 위해 (라반의) 집의 수호신을 훔처나올 정도였지만, 신은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를 동정해 라헬이 아닌 그녀에게 아들들을 점지해준다. 그래서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은 루벤(아들을 보라,Behold a Son)이라 이름지었으며, 두 번째 아들은 시몬(Simeon)(그가 들었도다, He has heard (이 이름은 이슈마엘(Ishmael - God has heard)와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세번째는 레위 (Levi)(연합하다, join) 그리고 네 번째는 유다(Judah)(찬양받은, praised)라 이름짓는다. 야곱은 레아와 여섯 명의 아들을, 레와의 종, 라헬의 종과 각각 두 명씩의 아들들을, 그리고, 마침내 라헬과도 두 명의 아들을 갖는다. 그들이 바로 이집트로 팔려가는 요셉(Joseph)과 막내아들 벤야민(Benjamin)이다. 이 12명의 아들들이 유대교 12지파를 이루게 되며,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지라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다.

 

야곱(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보통 족장설화 라고도 불리며 한 가족의 이야기라기 보다도 12지파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편이 많은데,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에서는 구약 특유의 경쟁관계가 재연되기도 한다. 가령, 이브의 두 아들인 카인과 아벨 (농부 카인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양치기 동생 아벨을 죽인다), 그리고 이삭의 아들들인 야곱과 에서 (교활한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 상속권을 두 번의 사기로 빼앗는다)의 관계가 라헬과 레아의 관계와 비슷한 경쟁관계를 띤다. 또, 에서와 야곱의 관계처럼 레아와 라헬의 관계도 편애와 연관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반대가 된다. 즉, 야곱은 교활함으로 장자의 권리를 탈취하고 축복까지 받는 반면, 라헬은 미모로 야곱을 차지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된다 (라헬의 두 아들은 열두 아들의 막내이며, 라헬은 벤야민을 낳는 도중 사망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죽어버린 아벨 대신 셋을 이브에게 주고 셋의 후손이 노아를 통해 번성하게 하는 것 처럼, 야곱은 훗날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요셉을 팔아먹은 아들들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를 두려워 하는 형들앞에서 울며 그들을 모두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형제들은 모두 화해한다.

 

*  영화 속의 루빈 카터의 삶은 실제의 삶보다는 많이 미화된 편이다. 실제 루빈 카터는 열네 살 때 소년원에 구금된 후 영화에서 처럼 탈출하고, 군에 자원해서 여러가지 경력을 쌓지만, 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공적인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만기 제대 하지 못하고 불명예 제대를 당했으며, 얼마 후 바로 탈옥범으로 체포되어 투옥된다. 그가 출소한 후에도 전업 프로 선수로 나서기 전까지 그의 행적은 매우 불량한 편이어서 강도 죄로 다시 투옥되어 4년 더 옥살이를 한다. 권투선수로서의 경력은 화려한 편이지만, 챔피언쉽을 놓고 싸운 경기에서는 영화에서처럼 불공정하게 판정패 한 것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웠다.

영화에서 뚜렷하게 악인으로 등장하는 델라 페스카는 실제 인물이 아니며, 루빈 카터의 실제 케이스는 영화의 내용보다 좀 더 복잡하다. 이 케이스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카터와 아티스를 길에서 목격했다고 증언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이들의 증언의 진위 여부가 계속 문제시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의 거래 문제도 거론되었다. 하지만, 카터쪽 증인들도 주장을 번복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고, 원래의 두 증인에 대해서도 계속 서로 모순되는 증거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결국 쉽게 해결될 수는 없었다. 카터의 케이스는 주 법정에서 독립적으로 두 번 재판되었고 1985년 연방 법원에서의 상고심에서 평결을 맡은 사로킨은 영화의 대사와 같은 판결문으로 카터를 석방한다. 사로킨의 평결의 요점 중 하나는 원심 판결이 인종적 편견에 근거했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대법원에 항소심을 요청하지만 기각되고, 카터의 케이스는 한 번 더 정식 기소할 수 있었지만, 이미 22년이나 지난 사건의 증인들과 증거들을 다시 모으는 것은 무의미하며, '인종적 편견에 의한 의심'이라는 점을 피해갈 수 없다는 이유로 검찰이 기소를 포기한다.

카터가 석방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8세 였으며, 그 이후 그는 불공정하게 기소된 사람들을 돕는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두 개의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세계 권투 협회로부터 명예 챔피언쉽을 받는다. 하지만, 카터의 케이스에 대해서는 아직도 진위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카터가 실제 범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카터가 석방될 때에도, 그가 범인이 아니라서 (무죄라서) 석방된 것은 아니며, 기소 과정이 옳지 못했기 때문에 석방된 것이다.) 밑에는 카터가 범인임을 지목하는 사이트.

http://www.graphicwitness.com/carter/

+ 하지만,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 사이트는 '인종적 편견에 의한' 의심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