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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 - 그리운 동방

이박오 2012. 5. 11. 09:51

그리운 동방

 

1 - 가족 신화

 

폐병쟁이 명희 누나 아이

어릴 적 아랫동네에 홀아비 폐병쟁이가 살았는데 그 집 앞에는 항상 깨진 사금파리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우리 꼬맹이들은 그 집 대문을 지날 때면 왼손으로 코를 싸쥐고 오른손을 왼팔 오금 위로 얹어 놓아 코끼리코를 늘어뜨리고는 사금파리를 밟고 서서 고추 먹고 맴맴을 세 번 돈 다음 땅바닥에 침을 세우 뱉곤 했다. 그래야 병균이 옮지 않는다고 믿었다. 아내의 손에 들린 사기그릇에는 바로 그때 그 흰 빛이 묻어났던 거다.

당신 그게 뭐야. 나는 쉰 듯한 거친 목소리를 냈다. 아내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않다가 재차 다그치자 심드렁한 말투로 구리 삶은 물이에요 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 중금속은 왜 삶아 먹어. 목소리가 좀 떨려나왔다.   (139)

 

의 배경

그 운동단체에서 나온 건 5.3 인천사태 직후였다. 당시 뿌려진 유인물 중 내용이 급진적이라고 당국이 점찍은 것의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4.13호헌선언 이후 정권의 말기적 무도함에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으리라. 연행된 다음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러나 나는 일 주일 뒤에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내가 풀려난 다음날 단체 핵심동지 서넛이 간신히 수배를 피하고 있던 수유리 아지트에서 한두름에 연행됐던 거다. 그 거처를 알고 있는 사람이래야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물론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쏠리는 의혹의 화살은 너무 치명적이었다. 내 나름대로 수사기관에 외로이 맞서 조직방어투쟁을 하다 나왔는데 위로는 커녕 희뚝머룩한 눈초리들이라니. 그러던 차에 조직에 새로운 변화가 밀려왔다. 당국의 탄압을 받아 조직 자체가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새로이 태동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남은 조직 역량을 집중시키기로 결정이 남에 따라 기왕에 했던 일과 조직은 자연히 발전적으로 해소됐다.  (142)

 

택시 유혹

속력을 약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왼쪽 발가락 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날따라 안개가 많이 껴서 그런지 차체가 많이 흔들렸다. 짐을 짜부가 되도록 쟁여 싣고 남부순환도로를 내달리는 십 톤짜리 화물트럭들이 옆을 긁어대듯 스치고 지나갈 땐 등짝에 소름이 쫙쫙 끼쳤다. 옌장, 빨리 중형으로 바꿔 몰든지 해야지. 이럴수록 어깨힘을 빼야 돼. 짐에 짓눌린 화물차가 고꾸라질 듯 고개를 디밀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단거리 육상선수 모양 끊임없이 곁으로 달겨들었다.

빌어먹을, 내가 밟은 건 브레이크가 아니라 액셀러레이터였다. 다행히 반사적으로 운전대를 비틀어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그 커다란 화물차 뒷바퀴가 갑자기 눈앞으로 커다랗게 확대될 땐 정말 저승사자에게 손목을 홱 낚아채인 듯한 느낌 때문에 의식이 까무룩해졌다. …… 씨앙, 나는 이를 응등그려 물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 여자가 느닷없이 내 어깨를 우악스레 잡아당기는 찰나 내가 깜빡 운전대를 놓치고 왕청되게 액셀러레이터를 건드린 것이다.

당신 정신이 있어 없어?

그래요, 그렇다구요. 이젠 아찌 맘대로 하세요.

여자는 뜬금없이 코 먹은 소리를 내며 모로 기우듬히 내 어깨를 베고 훌쩍거렸다. 나는 당장 길턱에 차를 세우고는 그 여자를 그대로 내 버린 채 반대 방향으로 들입다 몰았다.  (144)

 

광수 애비 광수 형

그런데 이상한 건 약방이나 병원을 찾아갔더라면 하얀 가운을 입은 약사나 의사에게 쩔쩔맸을 사람들이 부라나케 광수 애비를 찾는 판국이면서도 결코 공손한 태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보우 광수 애비, 아 뭘 해 사람이 기가 넘어간다니깐. 얼른 뒤를 쫓지 않구설랑. 오히려 닦달을 해대도 그 좋아하는 술자리를 아무런 불평 없이 박차고 일어나서는 집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보퉁이를 옆구리에 끼곤 냅뜰성있게 따라 붙었다. 

빈 방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듣고 광수 형은 머뭇머뭇 자신이 그 방에 월세를 들 수 없냐고 물어왔다. 아내도 두말없이 좋다고 승낙했다. 사실 광수 형이 내건 조건이 너무 파격적이었다. 물론 보증금은 걸지 않는 조건이었지만 한 달에 십만원씩 내겠다는 거였다. (147)

 

전셋값

온 세상이 전셋값 때문에 발칵 뒤집어진 때였다. 이윤을 찾아 흐르는 자본의 철칙, 평균이윤율 법칙에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잖은가.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이게 웬 기삿거리냐 싶었던지 전셋값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의 내력을 줄줄이 들춰내며 마치 미친개 친 몽둥이 삼년 우려먹을 듯한 기세로 나왔다.

-여보 당신은 내게 천사였소. 우리 이 세상에서는 집 한 칸 없이 쫓겨다니던 신세로 한 맺혀 떠나가지만 그럴 걱정이 없는 저 세상에서는 절대루다 우리의 행복이 이렇게 하이에나처럼 물어뜯기는 일일랑 없을 게요. 당신에게 마지막까지 털어놓고 싶은 말은 고달픈 세상에서나마 당신이 있었기에 나는 진정 행복했다우. 그리고 우리는 우릴 이 지경으로 만든 세상을 원망하진 맙시다. 나도 이젠 정신이 흐려지오~ 가스에 취한 우리 경진이의 얼굴이 오늘따라 왜 이리 귀여운지 모르……

한숨만 폭폭 새나왔다. 어느 신문에 실린 연탄가스 자살 일가족의 가장이 휘갈긴 유서였다. (148)

 

아내 역사(力士)로서의 광수 형 명희 누나

힘이 장사예요. 묵은 김장독을 파내는데 그냥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리던데요. 이 비싼 조기가 어디서 났어 당신? 나는 물에 만 밥을 집적거리면서 아내의 씀씀이에 비해 좀 과하게 여겨져 입덧을 달래려는가 싶어 지나가는 말투로 데면데면 물었는데. 광수씨가 사가지고 왔더라구요.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돌아간 부인이 있었다며요. 제가 그 분을 많이 닮아서 그때 생각이 난다면 건네주는데, 참 받기도 뭣하고…… 거탈은 감사납게 생긴 분이 속은 영판 비단결 같은 구석이 있더라구요. 모든 일에요. 나는 입 안의 밥알갱이를 질겅질겅 으깼다. 웬지 내 눈빛이 깜뿍 흐려짐을 느꼈다. 얼래, 질툰가?! (150-1)

 

역마살

어차피 우리도 이달 안으로 짐을 싸야 하는 처지 아닌가. 그러고 보니 광수 형은 요 얼마 동안 떠나겠다는 암시를 내게 몇 차례 뚱겨주었다.

내가 한곳에서 두 철 이상을 머물러본 적이 없어야. 그놈의 지랄맞은 역마살 때문에 말이야. …… 동해안으로 한 바꾸 삥 돌았으면 속 씨언허겄는데…… 오징어 열둬 축만 걸뜨리고 다니믄 걱정 없어야. 노가다 뛰며 꼬불친 돈두 솔찮고. (152)

 

2부 - 현실과 노동 운동

 

꽃과 꿀벌

이래저래 풀이 죽은 아내를 지켜본다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이 못 됐다.

-당신 어때요. 좋은 세상이 오긴 꼭 오겠죠?

아내는 내 귓불을 살짝 잡아당겼다. 우리는 방 보러 다니다 지쳐 파근한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바로 옆 놀이터의 헌 타이어 위에 앉아 화단의 사루비아꽃 속으로 꿀벌이 기웃기웃 파고드는 모습을 맥없이 지켜보는 중이었다. (153)

 

아내의 배경

그거야말로 깡그리 척결돼야 할 인텔리 잔재라구요. 현실사회주의가 자본론이 없어서 무너지나요? 지금 보면 우리 운동가들 중에서도 이론은 현실에서 다시 뭉쳐진다는 자명한 진리를 그저 건성으로 주워 섬기는 작자들이 태반이라구요. 이론이란 언제나 명쾌한 속성을 갖게 마련인데 이게 바로 지식인들을 흘리는 함정인 줄 모르구설랑. 지식인들이란 항상 현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어쥐고 욕심을 부리려 들잖아요. 이론이라는 집을 지어놓고 모든 현실이 그 안에 들어와 살림나기를 바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집이죠. 모두들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돼요. 당신도 두고보세요. 난 이 삼선조명을 완벽하고도 구체적인 변혁의 한 기지로 만들 거예요. 어설프게 기습적으로 노조설립 신고부터 하고는 이런저런 장애물에 치여 나자빠지는 한탕주의의 전철일랑 되풀이하지 않을 작정이니깐. (154)

 

나쁜 세상 동방의 꿈과 그 속의 명희 누나

그냥 재미로 술술 읽었어요. 당대 사람들의 열정이 부러웠어요. 열정이 없이 그런 책을 읽는다는 건 무척 죄만스런 일이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난 좋은 세상이란 오지 않을 거란, 아니 그런 건 있지조차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쪽으로 내 생각을 굳히고 있는 중이야요.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이 이미 충분히 좋은 세상이라는 뜻도 되는 건가?

오히려 그 반대죠. 충분히 나쁜……

……

그랬을 때, 즉 좋은 세상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충분히 나쁘다 하는 비극적 상황에서 우리들 삶을 버티게 하는 건 뭐지?

그건…… 자존심 같은 게 아닐까요?

자존심?

…… 그런 게 필요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허영 같은 거와 겉모습이 비슷하겠지……

그럴는지도 또 모르구요. 일종의 환상이랄지……

나른한 오후의 눈부신 햇발이 자꾸만 우리의 색 바랜 무릎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사루비아의 길줌한 꽃대롱 속으로 너무 깊이 몸을 담고 꿀샘을 빨아대던 꿀벌 한 마리가 뒤늦게 몸을 빼기 위해 버둥거리는 게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버둥거리던 벌은 꽃이파리 끝을 쨀끔 미어뜨리고는 간신히 몸을 빼내 달아났다. 목덜미 위까지 파르라니 깎아올린 단발머리에 얼굴을 가린 아내는 잠자코 모래밭 위에 손가락 낙서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요즘 되풀이해서 꾸고 있는 꿈에 대해서 아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어릴 적에 학교의 우중충한 창고에서 한 번 꾸었던 것이었다. (157-8)

 

 

 

 

 

 

* 이 소설은 - 김소진의 초기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 - 전설과 민담으로서의 세대 문제와 현실에서의 불능, 불구의 문제를 같이 탐구하고 있다.

 

** 눈에 띄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 구조를 갖는 이 소설의 전반부는 광수형-아내-나의 삼각 관계를 다루고, 후반부는 아내의 실패한 노조설립 일화와 전반부의 모든 사건들 (나의 사건, 아내의 사건, 그리고 광수형의 사건) 이 병렬된다. 그리고, 큰 구조에 속하는 전 세대-명희누나-동방의 꿈 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화적으로 끝맺음한다.

 

*** 5.3 인천사태와 4.13 호헌선언은 모두 대통령 선거제 개헌과 연관된다.

 

5.3 인천사태(1986)는 양 김씨(김영삼,김대중)가 주도한 야권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천만명 서명 운동에서 비롯된 민주화 학생운동이다. 원래 야당의 정치적 의도로 시작된 운동이 광주에서는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 요구로, 그리고 대구에서는 독자적인 학생 운동으로 발전되면서 야권 갈등으로 불거지고, 급기야 야권 지도자 김대중과 야당 총재의 급진 좌익 세력과의 단절 선언으로 이어졌다. 결국 5월 3일 인천에서 예정되었던 야당 (신한민주당) 지부 결성 대회는 야당의 각성과 국민헌법 제정등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학생 1 만여 명의 격렬한 시위로 무산되고,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대치하여 300여명이 연행, 130여명이 구속된다. 야당과 시민단체의 연대는 87년 4월까지 단절된다.

 

4.13 호헌선언은 다음해 (1987) 전두환 대통령이 일체의 민주화 요구와 개헌 논의를 거부, 중단시킨 선언이다. 이는 1월 14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유명한 진술이 인구에 회자되었다)과 야권과 국민들의 활발한 직선제 개헌 논의 등으로 위기감을 느낀 군부 정권의 조치였다.

특히 4.13 사건은 박종철 치사사건과 함께 87년 6월 항쟁 (6월 10일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 지명일) - 26일)의 원인이 된다. 6월 항쟁에서는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6월 9일) 및 사망(7월) 사건이 6월 10일의 대규모 투쟁을 유발시키며 전국적으로 500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시위로 발전, 6월 26일 37개 도시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전국민 평화대행진으로 노동자-학생 운동이 아닌 시민 항쟁으로 발전되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으로 10월 선거에서는 16년 만의 대통령 직선제 투표가 실시된다. 하지만, 당시 야당의 주축이었던 양 김씨가 분열함으로써 13대 대통령에는 노태우가 당선된다.

일설에서는 4.13 선언을 다르게 보기도 한다. 독재 통치를 하려 했던 전두환이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고, 야권이 아닌 자신의 후계자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해 조작한 일종의 정치적 선동이었다는 것이다. 정치 경력이 전무했던 노태우는 6.29 선언으로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고, 양김씨의 분열에 힘입어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된다. 이것은 학계의 해석이 아니라, 당시 중정(중앙정보부)와 경찰 내부의 인사로 부터 흘러나온 야사이다.

4.13 선언 당시 한국 노총은 발표 즉시 지지성명을 내서 노동자들의 빈축을 샀는데, 물론 이 한국 노동자 총연맹은 어용 단체였다.

 

**** 이 소설을 이러한 배경과 연관해서 다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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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5.3 사태

http://archives.kdemo.or.kr/PhotoView?pPhotoId=00758404 

 

4.13 호헌선언

http://archives.kdemo.or.kr/View?pRegNo=00711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