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나비의 통로
종내는 무녀처럼 두 발로 겅중겅중 뛰며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낮은 천장을, 낡은 벽을, 먼지 낀 비닐에 싸인 조각들을 때렸다.
“이리 와, 같이 해.”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달래려 애쓰며, 발가벗은 그녀가 고무공처럼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남김없이 부서졌을 때, 그녀의 얼굴은 흰 석고 가루와 땀이 뒤엉겨 마치 분장한 듯 희었다. 마치 새로운 가면을 쓴 것 같았다. 순간 그녀의 몸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호흡이 정지했다. 목이 부러진 인형처럼 고개가 떨궈졌다.
1초.
다시 1초.
이윽고 그녀가 주술에서 풀려나는 것을, 날개에 핀이 꽂힌 나비처럼 비틀거리며 표본판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 뭐지.”
나는 물었다.
“지금 너에게 일어난 일은?”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검은 눈이 알 수 없는 광채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313-4)
“가끔 그 생각을 하는가 보군.”
“생각하는 게 아니야. 그냥, 불현듯 눈앞에 떠오르곤 해. 그리곤 사라져.”
그녀는 갑자기 추운 듯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껴안았다.
“아마 그게……내 통로인 것 같아.”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 무엇으로 이어지는?”
“내 존재 뒤에 있는 것…… 죽음도 삶도 아닌 것. 심연 같은 것, 까마득히 깊은.”
그녀의 얼굴은 망연했고, 목소리는 희미했다.
“모르겠어.”
“뭘?”
나는 물었다.
“네가 아까 날 꺼냈을 때.”
그녀는 구두 두 짝을 벗고 맨발이 되었다. 두 팔로 젖가슴을 싸안은 채 나에게로 자박자박 다가왔다.
“정말 꺼내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
나는 혀뿌리 아래 고인 시큼한 침을 삼켰다. 나이프에 긁혔던 목울대가 쓰라렸다.
“넌 어땠지?”
“…… 글쎄.” ……
“만일 우리가 꺼내졌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 다시 들어갈 수 없다면…… 저 부서진 석고 껍데기 속으로.” (314-5)
“따뜻한 손이야.”
나는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문질렀다. 내 끈적이는 땀이, 언젠가부터 흘러내린 찝찔한 눈물이, 흰 석고 가루로 얼룩진 그녀의 뺨에 엉겼다. 그녀의 입술에 웃음이 물렸다. 마치 처음 웃는 아기처럼 그 웃음은 불가사의했다. (317)
30. 말할 수 없는 것
“이거…… 혹시 몰라 가져가긴 하지만, 전시는 안 할지도 몰라요.”
어색한 듯 그녀의 손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왠지 사람들에게 보여선 안 될 물건 같아서요. 차라리 선생님이 갖고 있었던 게 다행스러워요.” (324-5)
언제, 어느 골목으로 사라진 것인가? 헐떡이며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작열하는 오후의 햇살을 이마에 받으며, 어지럼치는 거리 가운데 나는 우뚝 서 있었다.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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