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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 -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박오 2012. 4. 18. 21:06

열린 사회와 그 적들 - 김소진 (단편, 1991)

 

1. 상황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오늘 새벽 경찰이 전격적 행동을 취할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병원 앞 도로 양쪽에 쌓아둔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학생들이 교대를 하기 위해서 정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땜에 저그 밖에서 밤새는 갱찰은 모다 몇이나 될꼬?

표천식씨가 혼잣소리로 묻는다.

“글씨 한 천 오백쯤 될끄나?

“그럼 여긴 학생이고 으른이고 다 따져설랑 삼백도 채 안 되고 말이야. 근디 왜 당최 쳐들어오지를 못한디야?

“왠 봉창 뚜딜기는 소린. , 열사가 있응게 그렇제.

“그려 그런가부지. 열사 한나가 천군만마를 당해내는겨.

“그렇지도 않은 거 같구먼. 먼젓번에 안양 거시기 병원에서는 거기두 박 머시기라는 열사가, 아무래도 배 만드는 노동자라구는 해쌓는디, 거긴 여기부덤 나긋나긋한 학생두 아니구 툽툽한 노동자들이 몇백 명씩 떼루다 지켰는데두 모다 성한 데 없이 얻어터지고 열사 몸띵이두 빼앗겨 갈갈이 찢겼다는디, 건 뭐가 되는겨. 워치된 일인지 갈피를 잡기 에려워설랑. (68-9)

 

2. 표천식

손끝에 스친 염낭 쌈지는 묵중했다. , 이것이 그대로 땅에 묻혀 녹이 슬고 만단 말인가. 그는 명치끝에 괴어 있는 묵은 한숨을 빨아들였다. 흥흥, 여보 노랑털이 벗겨지지 않은 황소의 누린내 나는 뒷다리 사골을 푹푹 고아 먹으면 살 것만 같아요. 부황이 들어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며 나자빠져 있는 마누라의 노랑꽃 핀 얼굴 위로 검은 흙덩이가 쏟아졌다.

……

나는 도둑이 아니라고 했지만 문서운 순사 아저씨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 그렇게 경을 치는 분들은 아마 머리나 가심 어느 한 구석이 무쇠일지도 몰라. 숙직실에서 곡괭이 자루가 두 개나 부러져나가고 나서야 난 내가 어쩜 도둑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무서운 아저씨들이 하자는 대로 다 했는걸 암. 내 삽날에 찍혀 걸레처럼 해진 너덜너덜한 살덩이가 눈앞에 팔랑거리고 정말 사람 미치겠더라구.

“당신들 밥풀때기들 때문에 민주화시위가 일반 시민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는 줄이나 아쇼? 당신들 도대체 누구, 아니 어느 기관의 조종을 받고 이런 망나니짓을 하는 거요?  (70-1)

 

3. 강종찬

“얼룩이 성님은, 말이라두 고로케 창알머리 없게 허믄 내가 섭하지라. 조것들 말하는 뽄새 좀 보고도 그라요? 같이 민주화투쟁하며 기껏 고생함시러도 시상에 밥풀때기가 뭐라요, 얼통 터지게. 사람이 입성이 누추하고 행동이 거칠다고 그렇게 깔보는 경우가 제대로 된 경우라요? 아 우리가 뭐 기생충이라? 싸가지 없는 것들 같으니라구. 민주화투쟁 허기 전에 저런 고상짜들하고 먼저 와장창 한판 붙어야지라.

……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프레스 밥’이 된 왼쪽 손목을 멋도 모르고 회사 관리직원의 사탕발림과 은근한 협박에 녹아 알지도 못하는 종이짝에 오른손 엄지를 꽉 눌러주곤 돈 오백만원에 팔아먹었다. 그 통에 산업재해 지정을 받지도 못했고 돈은 치료비 빼고 나니 기껏 길거리 완구노점상 차릴 밑천만 달랑 남았다. 그나마 시작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일제 단속 정책 때문에 밑천마저 홀랑 날렸다. 그때 강씨가 노점 손수레에 쇠사슬로 목을 연결하고는 처연하게 버티는 사진이 몇몇 신문에 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자연히 술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삶의 의지를 잃은 그를 두고 아직 애도 없고 혼인신고도 생략한 채 동거를 하던 마누라가 밤봇짐을 쌌다. (72-3)

 

4. 박상선-정재복

그러나 그가 어딘가로 팔려가는 걸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혹 재복이 조건이 맞은 사람의 봉고차를 타고 갈작시면 상선은 한없이 부러운 눈길로 입가에 떨떠름한 미소를 베어문 채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손가락을 까댁이며 인사를 하곤 했다. 한번은 너무 안됐다 싶어 재복이 자신을 데리고 가던 털수세이 건축현장 오야붕에게 저기 전봇대에 기대선 남자도 같이 데리고 가면 안 되겠냐고 은근히 근중을 떠봤더니 시동을 건 채 창문으로 고개를 빼고 상선 쪽을 힐끗 바라본 다음 킁킁 코웃음을 쳤다.

-하하, 저 양반은 안 되겠시다. 여기가 뭐 딴따라 시장도 아니고 말이우다. 데려다놔도 어디 지대로 품삯을 치러내겠습디까?

재복은 흔들리는 봉고차 안에서 어디 가서 짱이라도 박혀야지 드러워서 다시는 이 날품팔이 인간시장을 기웃거리나 봐라 하는 오기를 어금니 위에 올려놓고 지그시 깨물었다.  (75)

 

5. 밥풀때기

“쓰레기통의 고등어 대가리같이 썩고 무능한 정권 아래서는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돼 몇 년 전부터 야당이 개최하는 집회를 쫓아다녔수다. 그러나 야당 사람들도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학생들의 시위로 옮겨왔는데 우리들이 학생들과 달리 움직인다고 해서 기층 민중인 우리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가, 이 말이우다.

“그러게 첨부터 눈 먹는 퇴끼 얼음 먹는 퇴끼 따루 있다 이거 아닙니까.

현대영 씨는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대책위의 얼굴에 먹칠을 하기 위해 정보기관에서 꾸미는 공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생겼지만 그렇지 않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또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대책위는 검,경으로부터 아마도 여러분을 일컫는 말인 듯한데, 과격 폭력 시위를 일삼는 이른바 밥풀때기들의 수사에 협조해달라는 제안을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찰에 여러분들도 김귀정 열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객임이 분명하므로 연행에 협조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78)

 

6. 꼬르비초빠

바닥에 펼쳐놓은 신문지 쪼가리를 간신히 더듬던 표천식씨가 실성실성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헌디 꼬르비초빠가 당최 뭐하는 치가? 이크, 요 입초사. 사진 봄시러 먼젓번 대통령 아닌감?

“천식이 형님은 좀 국으로 가만히 있으시소 마. 절대루다 개안심더.

“그래 말이다이. 그 분이 그래도 명관이었지. 끽소리 없이 해치우는 게 보통 수완이가?   (79)

 

7. 자본과 억울함

“낮에 핏방울 튄 런닝구 입구 댕기다가 주의를 받은 친구가 바로 저기 누워 있는 상선이가 맞기는 허지만 자해헌 거는 아뉴. 최루탄 파편이 살 속을 파고든 거라니까유. , 남은 거라곤 몸띵이밖에 없는 사람들이 워치케 지 손으로 몸을 상허게 허겄슈.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의식했는지 상선은 가는 한숨 소리를 길게 내쉬다 말고 잠꼬대를 몇 마디 주절댔다.

“나두 델고 가…… 더두 말구 이만원…… 응 좋다구.

“은행을 불싸지르러 가자는 말은 지가 했구만요.

강종천씨는 사위어 가는 화톳불을 쏘삭거리며 느럭느럭 입을 뗐다.

“까놓고 야그하자면 지가 뭐 은행에 알토란처럼 묻어둔 통장이 있남요 아니믄 새록새록 붓는 적금이나 주택부금이 있는감요. 거미줄 한 올 같은 인연도 없어라. 한여름 더위를 먹다 못해 은행에 들어가 보면 괜히 은행강도 취급을 하는지 청원경찰들이 폐쇄회로 켤라 두눈 부라리며 사납게 눈치 주는 턱에 괜히 캥기는 신세다보니……”

“아, 지금 비난을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꺼낸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과격하고 충동적인 발언은 지금 우리의 투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 이렇게 말이죠. 폭압적인 반민주적 통치기구, 고질적 악법과 불평등한 제도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의당 철폐돼야 하지만 예를 들어 은행 같은 제도는 그것과 다르다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고유한 제도요 핵심적 현상이기 때문이죠. 파출소를 기습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어려운 말 허지 마슈. 내가 보시다시피 외팔이 빙신이다보니 겨우내 일자리도 못 찾고 세종대왕님이 그리워 껄떡거릴 때도 은행 창고에는 돈이 썩어났시다. 그게 억울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서 은행이 배고픈 사람 구제하는 건 고사하구 재벌들 돈 대줘서 땅투기나 허게 하고 알 만한 사람에게 떡고물 잔치나 베푸는 데루다 밑구멍 틀어막는, 그따우 마름 노릇밖에 헌 게 뭐가 있었냐 이 말이우. 그리구 막말루다 우리 사회가 돈으루다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 아니유? 그렇다믄 문제는 돈이지. 독재도 칼자루 쥔 놈들끼리 잘 먹고 잘살려고 허는 거고 민주화투쟁은 그와는 다른 맘에서 잘 먹고 살려는 건데 그 와중에서 돈줄을 거머쥔 은행을 호령할 수가 없다믄 되레 없애는게 뭔가 시상이 변하는 데 보탬이 될 거란 밑천 짧은 생각을 먹어봤던 거우다.

“아무튼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경찰이 여러분들이 삐삐에다 일당 운운하는 걸로 봐서 조직적 배후가 있다고 몰아치며 시경 특수대까지 낀 전담반을 편성해 전원 검거할 계획이라니깐 나름대로 신변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할 줄로 압니다.

“허허, 삐삐요? , 덕길아 천식이 허리에 있는 그 고장난 삐삐 좀 보여드려라. 시위 현장에서 주운 건데 망가져서 먹통이야요. 저 천식이란 사람이 실성기가 좀 있어서 아마 장난으로 가지고 놀기는 했어도…… 그리고 아 누가 일당 받고 이런 짓거릴 허겠우? 그거야말로 유서를 대신 써줬다는 괴상망측한 억지하고 수법이 똑 같은 건데 왜들 그러는지…… 날품팔이들이야 어디든 모이면 일당 얘기 아니냐구요. , 이바구를 어디서 듣겠남? 이 시위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제까닥 밥그릇 찰 수 있도록 짬짬이 일거리 잡도리를 해놔야죠.   (80-1)

 

8. 닫힌 사회

현대영씨는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서슬에 꾸벅꾸벅 턱방아를 찧으며 졸던 표천식씨가 눈을 휘둥그래 뜨고는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현대영씨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는 읍소를 시작했다.

“애고 행님, 그저 목심만 살려줍쇼. 이렇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겠심더. 하모 제가 훔쳤제라. 그거 한나도 빼쓰지 않고 여기 있제라. 어어,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이게 어디로 갔지. 애고 나는 이제 영락없이 황천길이다. 사잣밥을 덜미에 짊어졌네 응.

표씨는 양짓녘에서 서캐를 뒤지는 동냥아치처럼 자신의 허리춤을 이리저리 까발리면서 끊이없이 구두덜댔다.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는지 브루스 박 상선도 암만 몸을 흔들어대도 질기디질긴 잠꼬대를 푸닥지게 쏟아냈다.

“저놈 잡아라…… 적이다 적…… 난 시민이야…… 문 좀 열어달라고…… 나 좀…… 헉헉…… 내게도 열어줘…… 아으……”

“제발 그만둬. 이 바보 멍충이야. 열리긴 뭐가 열렸다는 거야. 다 닫혔어. 다 닫혔다구.

재복은 갑자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82)

 

9.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삼당야합의 장본인이며 현 시국 불안의 주범 가운데 한 사람인 변절 정치인의 화환이 어떻게 부자비한 공권력에 무참히 숨진 우리의 순결한 동생 귀정이의 영안실에 버젓이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밥풀때기들이잖아.

둘러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듯 뇌까렸다.

“그 말에 반대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러한 행동은 너무 과격이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기로 이미 의견을 모은즉슨 앞으로는 그러한 감정적 행위를 삼가주기 바랍니다.

……

“지금은 열사의 주검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인데 그런 쓸데없는 일로 저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여론에 빌미만 제공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

“무슨 소리야. 가장 앞장서서 싸워야 할 대학생들이 시신 사수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시위를 해서 싸울 생각은 안 하니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니고 뭐란 말이야. 싸우기가 겁나는 놈들은 당장 이 자리를 뜨라구.

“아무렴, 백골단이 귀정이를 죽였으니 너희들도 의당 백골단을 죽여야 아퀴가 맞아떨어지지 않냐 이거야. , 안 그래? 내 말이 틀렸냐구?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화환을 짓밟았던 사내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한 발짝씩 더 죄어들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단세포적 복수 심리를 갖고 모이진 않았소. 우리는 또다시 누구의 피를 보자고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이오. 분명히 말해두지만, 우리는 다만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싸우려 할 뿐이란 말이요.

……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봐도 그렇고 그간 우리가 쌓아온 경제, 사회적인 역량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의 구조로 접근해가고 있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잖소. 이제 그 흐름의 물꼬를 정치 쪽으로 돌리려는 과도기적 진통을 지금 겪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오.

“무슨 비 맞은 중의 염불 소리런가 잉. 사회가 무슨 대문짝이어라? 열리고 닫히게?

“여기서 열린 사회라는 건 계급이나 종족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신화가 더 이상 개인에게 굴레가 되지 않고 개개인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질적으로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 물질적 풍요와 평등을 이룰 수 있는 마당이며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눈 뜬 다수에 의한 착실하고도 양심적인 사회 운영이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오.

……

“필요 없다. 기회를 따지는 놈들이야 말로 바로 기회주의다. 우리에게 토론은 더 이상 필요 없어. 당장 청와대로 가자.

……

“그만들 두지 못해!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더 이상 두고볼 수가 없다구. 이 따위로 나오면 우리는 당신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어. 어서 그 각목을 바닥에 놓고서 순순히 물러서라구. 아니면 이후로 당신들이 어떻게 되든 우리 책임이 아냐.   (84-6)

 

10. 별이 빛나는 밤

“깼니? 뭐 하간?

“별 세.

-미친 놈.

“재복아. 여긴 별로 안 보이는구나.

……

“재건대 마을엔 어릴 적 별두 많았는데. 별이 빛나는 밤이라구 했지. 후후, 웃기지 마. 관할서 백 경장이 붙였어. 우리 동네엔 옥살이를 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그 치는 동네 순찰을 나오기만 하면 이러는 거야.

-, 요 다 합쳐봐야 열댓두 안 되는 게딱지 동네에서 땅별이 백개는 뜨는구나. 하니 밤중에 댕겨도 뭔 후라시가 필요허겄어? 별이 빛나는 밤의 마을이라. 멋져. 완전히 한편의 시야 시.

“어쩌다 일제 단속 때는 심심찮게 사람 사냥이 벌어지는 동네였어. 툭하면 백차를 앞세우고 경찰을 잔뜩 태운 트럭이 들이닥쳐서 거기서 뛰어내린 푸른 제복들이 동네를 에워싸고는 곤봉을 꼬나잡았어. 동네의 어지간한 남정네들은 모두 가을철 메뚜기 뛰듯 뒷산으로 파고들었지. 나두 무서우니깐 엉겁결에 이리저리 뛰는 거지. 벌집 쑤신듯한 아우성. 애와 아낙이 뒤엉켜 울부짖는 소리. 짤막짤막 끊어지는 무전기 소리 속에서…… 헉헉,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큰 은빛 잎사귀 두 장이 올라붙은 견장을 떠받치고 있던 색안경은 사냥감이 어느 정도 엮어지면 이렇게 무전을 날리지.

-토끼 몰이는 성공적이다 독수리들은 퇴로를 열어주고 돌아와 산토끼들의 가죽을 벗겨라 오버.

“사람들은 경찰이 물러간 뒤에도 밤이 이슥토록 산을 내려오지 않았어. 풀벌레 울음소리가 커지면 산마루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는데 그러면 하나둘씩 등불이 켜지지. 그 등불이 그땐 얼마나 그립고 포근하게 느껴지던지…… 우리는 먼 길에서 막 돌아온 길손 같고……”

아무도 상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막막한 자신의 앞날을 부여안고 어떻게 하면 날이 새기 전에 병원을 빠져나갈까를 궁리하는 표정들이었다.

……

그 다음날 이른 아침 ㄷ일보 경찰 기자가 백병원 경비실의 전화를 붙들고 악을 써가며 두 줄짜리 기사를 부르고 있었다……  (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