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껍질과 껍데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
“껍질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고.” (284)
그녀의 은밀한 시선이 탁자에 놓인 흰 석고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저 딱딱한 물건은 껍데기였으며, 껍질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286)
널 목 졸라 죽이고 말겠어.
“이제부터 네 껍질을 벗겨줄게.” (308)
26. 박제사의 마지막 환상 – 껍데기 잇기
“나보다 더 큰 몸을 가진 여자를 떠서, 그 틀집 속으로 들어가 죽는 것. 그렇게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 좀 어려운 일이겠군.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293)
27. 껍질벗기기 – 박제사 죽이기
그녀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린 것은 그때였다. 기묘하리만큼 낮고 우울한, 늙은 작부 같은 웃음 소리였다.
“넌 정말 가련하구나…... 처음부터 알았어. 네가 가련한 아이라는 걸.”
키득키득, 그녀는 허공을 향해 웃었다.
“네 눈이 맘에 들었었지.”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덕 관념이 없어 보여서?”
“아니, 그것만 없는 게 아니지. 아예 비어 있지. 텅 비어 있어.”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그녀의 늙은 목소리에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광채가 – 언젠가 느낀 적 있는 – 어려 있었다. 오싹한 부조화였다. (293-4)
네가 괴로워한다고 느꼈을 때, 통제할 수 없는 충동에 떠밀려 나를 거머쥐려 한다고 느꼈을 때, 문득 생각했지. 너 역시 가련한 아이였는지도 모른다고. (303)
천천히 알게 됬어. 진실이니 고백이니 하는 따위는 웃기는 거라는 걸. 그걸 들은 사람은 반드시 이용하게 돼 있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별 수 없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이용해. 아주 화가 나거나, 모욕을 주고 싶어지거나 할 때……(295-6)
결국 진짜의 내가 누군지 나는 잘 알 수 없어졌지. ……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난 아직 어리석었어. 그것 …… 이 내 존재의 처음이자 끝이란 생각을 했으니까. 그게 바로 내 얼굴 뒤에 감춰진 진짜 나란 생각 말이야. 사랑을 한다면, 그걸 말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건 가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 (298)
…… 모르겠어. 언제부터 이 모든 것들이 끔찍하게 비어 있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아침에 눈을 떠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졌는지. (300)
다만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야. 호기심과 의심에 사로잡힌 인간들 – 처음엔 너도 그 부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날 시기하고 선망하는 사람들. ……
처음에 널 봤을 때, 날 보는 눈이 끔찍하다고 느꼈어. 뼈까지 투시되는 듯한 악몽이었지. ……
네가 원하는 건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어. 네가 나에게서 뭔가를 집요하게 찾아내려 한다고 느꼈으니까. ……
네가 만든 껍데기들…… 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
그래. 네가 뜨고 싶어했던 내 얼굴, 그게 나야. ……그 외의 것은 없어. (301-2)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유는 단 하나,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305)
28. 두 사람의 (세 사람의, 네 사람의) 죽은 손
처음으로, 내가 얼마나 내 손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를 이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것. 내 얼굴보다 더 나에 가까운 것. 그것이 없다면 나는 없는 것이나 같은 것. ……
상처를 처맨 오른손으로 그녀의 가면을 벗겨 내던졌다. 흰 석고 껍데기가 산산조각났다. (310)
그녀가 바닥에서 들어올린 것은, 거의 형체가 해체되다시피 한 내 오른손의 껍데기였다. 팔뚝에서 흘러내린 피가 손목께를 옅은 갈색으로 물들였고, 곧 부러져나갈 듯한 손가락들의 뿌리마다 검은 피가 굳어 있었다. (311)
그녀가 들고 있는 내 부패된 손의 껍데기 위로 조용히 그 손의 형상이 겹쳐졌다. 엄지와 검지가 동강난 채 고스란히 펼쳐진, 그의 죽은 손이었다. (312)
그 왼주먹은 몇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씁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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