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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그대의 차가운 손 3-2 – 두번째 환상과 또 하나의 진실

이박오 2012. 4. 2. 08:46

 

18. 박제사

그러나 어쨌든, E 자신이 말했듯이,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전에도 몇 번 깨진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흰 가루가 되어 소복이 쌓여 있던 L의 껍데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단 한 번 내리치기만 해도 산산조각나버리죠. 왜냐하면……”

나는 다시 웃었다.

비어 있으니까요.”

……

그때였다. 지난 한 달 동안 줄곧 은밀히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욕망이 의식의 수면 위로 치밀어 오른 것은. 일곱 개의 매끈한 알 같은 민얼굴들이 일렬로 놓인 작업대를 나는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거였군.

나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내가 원한 게. 그거였어.

……

나는 겸손하게 웃었다. 내 미소가 소름끼치게 차가워 보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233)

 

19. 복서의 웃음소리

피로와 취기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에 전에 보지 못했던 색다른 표정이 어려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녀는 우아하지도, 성숙하지도, 관능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어린아이 같을 뿐이었다. 그것이 미처 예상 못했던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나는 놀랐다. (219)

 

깔깔깔, 수화기를 막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역시 전혀 그녀의 것 같지 않은, 무례한 웃음 소리였다.

……

그녀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중성적으로 느껴질 만큼 거친 웃음이었다. 

뭘 망설이는 거예요? 당신의 성스러운…… 졸렬하게 성스러운 작품을 보러 와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잖아?”  (245)

 

그녀의 음색이 어딘가 거칠다고, 며칠 전 내 작업실에서 골반의 틀을 깨뜨렸을 때 질렀던 새되고 생경한 비명과 흡사한 데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252)

 

20. 피그말리온 박제사의 사랑 방식

그때 왜 불현듯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짓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지 나는 모른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입술을 움직이고 말하고 미소 짓는다는 것이 기이한 기적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죽였던 애인이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나는 놀랍고 두려웠다. (258)

 

21. 부조화 2 – 사라진 기억을 찾아서. 기억의 변형. 그리고 빈 자리

좀 전에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온 그녀의 첫 목소리는 생생했고 태연했다. 그 음성의 소름 끼치는 이물감을 나는 천천히 곱씹었다. 그것은 나에게 약간의 구역질을 느끼게 했으며, 동시에 무척 낯익은, 말하자면 정다운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과거의 언제, 어디쯤에서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는지는 기억해낼 수 없었다. (226-7)

 

그 얼굴이 왜 그토록 오싹한 이물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잠시라도 작업실에 두고 싶지 않을 만큼 그 물건은 섬뜩했다.

나는 차분히 작업대 앞에 앉아 그 얼굴에 물감을 칠해보았다. 입술과, 감긴 눈꺼풀과, 갸름한 뺨과 이마를 되도록 실물에 가까운 색깔로 칠했다. 결과는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

그렇게 해서 모두 일곱 개의 얼굴을 뜨고 나자 꼬박 사흘 밤이 지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물감의 색조만을 변형시켰던 것을, 오리털 침낭을 뜯고 깃털들을 꺼내 화려한 색으로 물들인 뒤 장식하기도 했고, 철 지난 잡지들의 컬러 광고 페이지들을 오려 뺨과 이마에 겹쳐 붙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여섯 번째 얼굴은, 그녀의 얼굴이라는 것을 도저히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변형된 형태가 되어 있었다.

……

마지막으로 뜬 얼굴만은 아무것도 칠하거나 장식하지 않았고, 민얼굴에 씌우지도 않은 채 탁자에 올려 놓았다. 그 희고 정교한 가면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 채, 무섭도록 완벽한 고요 속에 잠겨 침묵하고 있었다. (259-60)

 

22. 마스크 3 – 상실의 웃음, 그리고 수수께끼

그녀의 조그맣고 앳된 얼굴이 나이보다 훨씬 늙어버린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 어린 얼굴 안쪽에서 먹 자국처럼 배어나오는 늙은 여자의 얼굴을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265)

 

…… 과거는 생각 안 해요. 미래두 생각 안 해요. 상담 선생님도 그게 좋대요. 내 이빨, 내 몸이 이렇게 된 거, 내 청춘이 흙탕물처럼 떠내려가버린 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 것두 생각 안 해요. 생각하려다가두 얼른 잊어버려요. 그냥, 순간순간 살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녀는 문득 미소 지었다. 수수께끼 같은 평화가 그녀의 입가에 어려 있었다.

“……천국이 따로 없어요.” (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