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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그대의 차가운 손 1-3 - L 이 남긴 것

이박오 2012. 3. 12. 09:47

6. 몸에서 얼굴으로. 그리고, 다시 빠져나갈 수 없는 몸으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무엇인가가, 내 내부의 무엇인가를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결코 알아낼 수 없었다.

 

그해 늦가을 어느 오후, 나는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작업복을 싱크대 서랍에서 꺼내 입었다.

100호 캔버스 위에 진흙을 두껍게 깔았다. 얼굴과 손이 뭉개어진, 납작하게 엎드린 여자를 그 위로 부조한 뒤, 변색한 피의 빛깔로 그것을 칠했다. 나는 뿌연 먼지가 앉은 종이 상자를 열었다. 흰 사리 같은 석고 조각들을 꺼냈다. 엎드린 진흙 여자의 몸에 그 조각들을 붙였다. 흰 뼈 같은 그 껍데기들이 희끗희끗 드러나도록, 그 위로 성글고 거칠게 진흙을 짓이겼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 손으로 빚는 작업이었다.

꼬박 밤을 새워 새벽이 밝았을 때 나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형체없이 뭉개어진 붉은 얼굴을, 손목부터 흔적도 남지 않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진흙 여자의 벗은 등을 향해 나는 손을 뻗었다. 지문을 날인하듯 내 열 손가락을 지그시 눌렀다.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낯선 고통을 나는 느꼈다.

땀에 젖은 티셔츠를 갈아입지 않은 채, 이불을 당겨 덮지도 않은 채,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죽음과도 같은 막막한 잠이 나를 빨아들이도록 내버려두었다. L이 나에게서 떠난 뒤 처음으로 드는 단잠이었다.

(187-8)

 

7. 작가 H의 눈동자 - 라이프캐스팅 1, 2, 3.

 

1. 결국, 그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건 누더기 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의 컴컴한 공동이었는지도 모른다.

2. 그것은 아슬아슬한 결의처럼 보이기도 했고, 패배할 것을 알지만 고집할 수밖에 없는 굴욕 섞인 오기 같기도 했다.

3. 찰나, 나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착각한 것이다. 저것은 석고상을 자른 형상이 아니었다. 저것은, 저 안에서 한 육체가 방금 빠져나온 형상이었다. 석고상의 바깥 면이라 생각했던 거친 윤곽선은 육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었다. ......

껍데기를 품었던 껍데기.

신열에 들뜬 사람처럼,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저 조각을 만든 사람이 K 시에서 보았던 조각의 작가와 동일인인가를. 동일인이라면, 왜 저런 껍데기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12-6)

 

 8. 그대의 차가운 손

 

"왜죠?"라고 H라는 작가는 나에게 물었다. 그 순진하고 당돌한 질문에 대한 답이 존재한다고 믿기라도 하는 듯이. 내가 무슨 말을 뱉어내든, 그것을 진실 그 자체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그녀의 눈은 마치 내 피부를 꿰뚫고, 내장과 혈관들을 꿰뚫고,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영혼이라는 것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눈을 좋아한 적이 없다. 혐오하지는 않는다. 다만 애처로울 뿐이다. 온몸을 던져 진실을 믿고 보여주려 하는 부류의 사람들, 죽었다 깨어난대도 포커 페이스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내 마음을 끌지 못한다.

 

다만, 카페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 애처로운 "왜죠?"가 줄곧 내 뇌리를 맴돌았다. 구체적인 음색과 어조는 차츰 엷어지다가 지워졌다. 말한 사람이나 그 정황까지도 모두 지워져버렸다. 오로지 ""라는 한마디만 남았다. 나는 쓰게 웃었다.

?

왜 내 삶의 가운데는 텅 비어 있는가.

 

택시가 급커브를 틀었을 때 나는 펴고 있던 손바닥을 쥐었다. E의 매끄러운 몸뚱이가 내 손아귀에서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것을 느꼈다. H의 눈이 먹을 넣은 유리알 같았다면, E의 눈은 어두운 거울의 표면과 같다. 그녀가 보는 대상만을 고스란히 상대에게 되비쳐 보여준다. 거울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골목 앞에 택시가 멈출 때까지 나는 E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아랫입술을 일그러뜨린 채 고요히 미소짓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쓰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다. 이 기록은 결코 그 ''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우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