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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그대의 차가운 손 1-2 - 첫번째 환상, 속력

이박오 2012. 3. 12. 09:04

3. L

 

나는 그녀가 잡았던 포즈대로 다리를 뻗고 앉았다. 틀집은 안락하였다. 누군가 틀집의 앞면을 끌어다 붙여주기만 하면 관은 완성될 것이다. 어쩐지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나는 그녀의 등이 닿았던 실팍한 곡선 위로 몸을 기댔다.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감은 눈 위로 겹쳐진 것은 L의 눈이었다. ......

얼마 뒤 조심스럽게 틀집 밖으로 나오고 나자 나는 이상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누구든, 자신의 관 속에 미리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122-3)

 

4. 속력

 

그 느린 동작의 속력을 비롯한 느린 말씨, 느린 감정, 느린 기억의 방식이 내 누선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그 속력이 그녀의 얼굴에 이상한 성스러움과 슬픔을 불어넣었는지도 모른다.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응시하고 싶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

그녀의 손은 여전히 희었고, 연했고, 포동포동했다. 그 부드러움이 흉터에 찢겨 은밀한 고통의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다름아닌 그 흉터가 그녀의 영혼을 무너뜨리고, 그녀의 아련한 속력을 우아함을 파괴해온 것 같았다. (129)

 

5. 성스러움과 착각

 

"처음에 네 손을 봤을 때."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흘러내린 데다 두툼한 모직 머플러에 친친 감겨, 그녀의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네 손이 성스럽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작업실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우리는 잠시 멈춰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돼."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게 어디가 됐건, 자기 몸에 성스러운 것을 가졌다는 건, 수호신을 가진 것과 같은 거 아닐까."

 

그날 밤 잠들기 전에 L은 뜻밖의 고백을 했다.  (1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