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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그대의 차가운 손 1-1 - 죽음, 도착

이박오 2012. 3. 12. 07:17

1. 죽음 을 통한 진실의 능욕  

누군가 그에게 주먹질을 한들,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인생은 쓰레기였다고 단정 내린들, 그는 맞대거리를 할 수도, 멱살을 거머잡고 뒹굴 수도 없었다. 철저하게 그는 무력했다. 더 이상 오른손을 감출 수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잘린 손가락을 능욕하도록 버려둔 채 그는 누워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그때 내가 알게 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사무적인 얼굴의 장의사가 그의 몸을 염습하는 동안 나는 그의 손가락이 잘린 자리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진실은 불쌍한 것이었다. 저렇게 누추한 것이었다. 대대로 고이 물려받아온 보물이 실은 10원 한 장의 가치도 없는 가짜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나는 허전했다.  (73-74)

 

2. 도착적 미학은 능욕당한 진실의 실체를 보기 위해서 요구된다.

이를 테면, 도마뱀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도 도마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지. 그들이 보기엔 우리도 징그러운 짐승일 뿐이라는 생각이었어. 생각해보면, 태어나고 섹스하고 죽어가는 따위의 중대한 인생사들은 기실 가장 동물다운 행위들이라고, 누군가가 그 비슷하게 써놓은 책을 읽기 훨씬 전부터 확신하고 있었지.

……

세 개의 눈을 가진 외계 생물의 형상을 상상하며 우리가 끔찍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그 세눈박이 외계인들은 우리를 끔찍하게 여기겠지. 아마 누가 누군지 구별도 잘 못 할 테지. 우리가 어렸을 때 흑인과 백인들을 누가 누군지 구별 못 했던 것처럼. 하물며 그중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

……

그 해맑은 표정에 넋을 잃은 친구의 옆에서, 나는 그 눈부신 흰 블라우스 아래 숨겨진 그 여자의 육체를 생각하고 있었어.

오해하지 말아.

내가 상상한 건, 정확히 말하자면 생물 시간의 해부도에서 보았던 불그스름한 내장들, 그리고 그 안에서 부지런히 점액이 되어가고 있을 앵두알이었어. 결국 여자애의 대장 속에 똥으로 담길 그 물컹한 즙에 대한 상상은, 그녀가 깜찍하게 흔들어대는 꼭지만 남은 앵두 가지를 보자 더욱 또렷하게 내 눈앞에 그려졌지.

그때 쓴웃음을 물면서 난 생각했지.

이 세상에서, 난 외계인과 다를 바 없구나.  (9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