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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그대의 차가운 손 4-3 - 껍질벗기/기

이박오 2012. 4. 11. 09:55

25. 껍질과 껍데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

껍질이 벗겨지는 기분이었다고.” (284)

 

그녀의 은밀한 시선이 탁자에 놓인 흰 석고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저 딱딱한 물건은 껍데기였으며, 껍질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286)

 

널 목 졸라 죽이고 말겠어.

이제부터 네 껍질을 벗겨줄게.” (308)

 

 

26. 박제사의 마지막 환상 껍데기 잇기

나보다 더 큰 몸을 가진 여자를 떠서, 그 틀집 속으로 들어가 죽는 것. 그렇게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 좀 어려운 일이겠군.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293)

 

 

27. 껍질벗기기  박제사 죽이기

그녀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린 것은 그때였다. 기묘하리만큼 낮고 우울한, 늙은 작부 같은 웃음 소리였다.

넌 정말 가련하구나…... 처음부터 알았어. 네가 가련한 아이라는 걸.”

키득키득, 그녀는 허공을 향해 웃었다.

네 눈이 맘에 들었었지.”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덕 관념이 없어 보여서?”

아니, 그것만 없는 게 아니지. 아예 비어 있지. 텅 비어 있어.”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그녀의 늙은 목소리에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광채가 언젠가 느낀 적 있는 어려 있었다. 오싹한 부조화였다.  (293-4)

 

네가 괴로워한다고 느꼈을 때, 통제할 수 없는 충동에 떠밀려 나를 거머쥐려 한다고 느꼈을 때, 문득 생각했지. 너 역시 가련한 아이였는지도 모른다고. (303)

 

천천히 알게 됬어. 진실이니 고백이니 하는 따위는 웃기는 거라는 걸. 그걸 들은 사람은 반드시 이용하게 돼 있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별 수 없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이용해. 아주 화가 나거나, 모욕을 주고 싶어지거나 할 때……(295-6)

 

결국 진짜의 내가 누군지 나는 잘 알 수 없어졌지. ……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난 아직 어리석었어. 그것 …… 이 내 존재의 처음이자 끝이란 생각을 했으니까. 그게 바로 내 얼굴 뒤에 감춰진 진짜 나란 생각 말이야. 사랑을 한다면, 그걸 말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건 가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 (298)

 …… 모르겠어. 언제부터 이 모든 것들이 끔찍하게 비어 있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아침에 눈을 떠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졌는지.  (300)

다만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야. 호기심과 의심에 사로잡힌 인간들 처음엔 너도 그 부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날 시기하고 선망하는 사람들. ……

처음에 널 봤을 때, 날 보는 눈이 끔찍하다고 느꼈어. 뼈까지 투시되는 듯한 악몽이었지. ……

네가 원하는 건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어. 네가 나에게서 뭔가를 집요하게 찾아내려 한다고 느꼈으니까. ……

네가 만든 껍데기들…… 지루하고 야비하더군. 그런데도 내가 허락한 건 왜였을까? ......

그래. 네가 뜨고 싶어했던 내 얼굴, 그게 나야. ……그 외의 것은 없어. (301-2)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유는 단 하나,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305)

 

 

28. 두 사람의 (세 사람의, 네 사람의) 죽은 손

처음으로, 내가 얼마나 내 손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를 이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것. 내 얼굴보다 더 나에 가까운 것. 그것이 없다면 나는 없는 것이나 같은 것. ……

상처를 처맨 오른손으로 그녀의 가면을 벗겨 내던졌다. 흰 석고 껍데기가 산산조각났다. (310)

 

그녀가 바닥에서 들어올린 것은, 거의 형체가 해체되다시피 한 내 오른손의 껍데기였다. 팔뚝에서 흘러내린 피가 손목께를 옅은 갈색으로 물들였고, 곧 부러져나갈 듯한 손가락들의 뿌리마다 검은 피가 굳어 있었다. (311)

 

그녀가 들고 있는 내 부패된 손의 껍데기 위로 조용히 그 손의 형상이 겹쳐졌다. 엄지와 검지가 동강난 채 고스란히 펼쳐진, 그의 죽은 손이었다.  (312)

 

그 왼주먹은 몇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씁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3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