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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그대의 차가운 손 4-1 - 우리는 왜 증오를 사랑하는가

이박오 2012. 4. 11. 09:51

 

23. 미니멀리즘

극도로 미니멀한, 그래서 사람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199)

 

나는 천천히, 아무런 욕망도 없이, 마치 의무를 실행하는 사람처럼 몸을 씻었다. 그 깔끔하고 완벽한 욕실에 아무렇게나 걸린 내 셔츠와 구겨진 바지는 마치 누더기처럼 보였다. (223)

 

나는 사람들의 돈을 받아서 그들이 사는 곳을 새것으로 만들어주지. 새것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중고품들과 벼룩시장, 재활용품 따위를 난 증오해. 그 물건들에 덕지덕지 끼어있는 시간, 기억, 때와 먼지와 흠, 흉터, 낡아간 흔적들…… 지긋지긋해.  (300)

 

어쨌건 그들의 생활은 좀 더 깨끗한 것, 좀더 쾌적한 것, 좀더 고급스러운 것이 되었을 테니까. 최대한 그들의 취향에 맞춰주었으니, 거울을 볼 때마다 놀라는 공주처럼 자신의 취향에 하루하루 반하곤 하겠지.

내 취향? 웃기지 말아. 사람들은 내 취향이 미니멀이라고 말하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볼까. 난 다만 그게 오래 지속될 영향력있는 스타일이라는 걸 알 뿐이야.  ……

오래전부터 나는 내 말과 행동을 믿지 않았지. 내 웃음을, 눈물을, 내 혀를 나는 믿지 않아.

물론 난 타인 역시 믿지 않아.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 해도 거기엔 조건이 있는 거지. 내 예절과 호의, 외모와 지위, 흔히 인간성이나 마음씀씀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난 뒤에도 그들이 날 좋아할까? 천만에 . 꿈꾸지 않기 때문에 난 실망하지 않아. 특별히 가까운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나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없어. (301)

 

24. 막이 된 표피 진실은 언제도 드러나지 않았었다

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뜨고 싶었던가? L의 몸을 떠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미처 예기치 못했던 진실이 드러나리라 믿었던가? 그것을 내 손으로 거머쥘 수 있으리라 여겼던가? 오산이었다.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싹하고 꺼림칙한 탈 한 조각이 남았을 뿐이었다. ……

그 평범하고 서투른 질문이 그토록 완고하게 내 머릿속에 자리잡은 까닭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모든 행위의 이유들이 뿌옇게 번지며 테두리와 형상이 지워지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조용히 뒷모습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

인상적인 일은, 이 스케치북을 펼치고 만년필이 종이를 미끄러져 나갈 때마다 마치 어떤 막을 더듬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되곤 했다는 것이다. 찐 계란의 껍질을 벗길 때 드러나는 얇고 흰 막 같은 것. 그랬던가. 내 삶의 기억이란, 그 연약한 막 위를 더듬어 나아가고 있었던가.

…… ‘?’라는 단말마의 물음을 들이댔을 때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짜를 보고 싶다면 결국, 심연 앞에 서는 일만이 남는 것 아닐까. 그 텅 빈 심연 속에서 대체 어떤 대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일까. ……

또 한가지 이상한 일은, 마치 그 의문을 동반하듯, L의 입가에 어렸던 불가해한 미소가 이따금 떠올라 좀처럼 사라지지 않곤 했다는 것이다. 그 수수께끼 같은 미소에 담긴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끝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천천히 나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었다. 나는 철저히 내 과거 안에 있었고,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 …… 실제의 삶과 이 기록 사이에 가로놓인 쓸쓸하고 단호한 침묵을 나는 느꼈고, 아마도 글 쓰는 사람들의 우울이나 염세는 그 지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70-1)

 

L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불가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때 내 마음에 자리잡은 의문은, 숨막히게 적요하며 동시에 어딘가 무서운 것이었다. 그 의문을 알처럼 품고 있는 동안, 이상하게도 점점 생생해진 것은 E의 존재감이었다.

…… 그녀의 몸 어디에선가 미미하게 새어나오곤 하던 구역질과 공허의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자석의 같은 극처럼 나를 밀어내곤 하던 환멸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것은 애정이라 할 수도 있고 오히려 반대의 것이랄 수도 있는, 극도로 양가적인 감정이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그 강렬한 양가적 감정이 끝에 쓰라리게 배어 있는 어떤 것이 연민과 흡사한 데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 안쪽을 은근히 베어내는 듯한 그 감정을 나는 당혹감과 함께 느겼다. 그것은 마치 조용한 갈구처럼, 욕망보다 집요하여 뿌리지기 어려운, 쓸쓸한 이끌림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