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마네킹
웃음이 얼굴에서 채 가시기 전에 그녀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그녀의 시선은 아무런 생기가 담겨 있지 않은, 흡사 인형의 얼굴에 박힌 유리알 같은 것이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는데, 그것은 마네킹의 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자연스럽던 그녀의 몸놀림은 굳었다. 호흡까지 멎은 것 같았다. 어깨도 배도 석고상처럼 딱딱했다.
고작 1, 2초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만일 좀더 오래 지속됐다면, 어느 정도 관찰력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짧았고, 가까이 있는 P조차도 전혀 이상한 기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192-3)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가 가셨고, 석고상처럼 온몸이 굳었으며, 호흡을 비롯한 모든 움직임이 완전하게 정지했다. 처음 만났던 날과 꼭 같이 그 상태는 1, 2초쯤 지속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시간을 정지시키고 그녀를 채집한 나비처럼 벽에 꽂아놓은 것 같았다. 마법이 풀리자 나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팔랑팔랑 벽에서 날아올랐다. (213)
12. 내부 (막힌 내부) (막힌 마스크)
베니어판으로 짠 창고 문 앞에 발이 멎은 순간, 냉정하던 그녀의 얼굴이 동요했다.
그것은 두 달 전, 하룻밤 사이에 홀린 듯 제작한 뒤 창고 문에 기대 세워놓았던 진흙 여자의 부조였다. 납작하게 엎드린 등허리에는 흰 뼈 같은 석고 껍데기가 점점이 드러나 있었으며, 변색된 피의 빛깔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얼굴은 형체 없이 뭉개어졌고, 바닥을 짚은 두 손도 손목부터 뭉개어져 있었다. (194)
“진짜라니요?”
“이 공간에서 유일한 진짜 같은 물건이에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진지한 표정이었으며, 두 눈은 여전히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한 쌍의 거울이었다. (230)
13. 신체 분산, 데드마스크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E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펄이 발라진 눈두덩, 자주색 립스틱, 움직거리던 입술의 모양, 표정의 미묘한 변화 따위는 모두 생생했지만, 그것들이 합해진 정확한 얼굴을 떠올리려면 일종의 마비 상태에 빠지곤 했다.
꼭 한 번 E의 전체적인 얼굴을 기적적으로 떠올려낸 찰나가 있었는데, 그 얼굴은 눈빛도 표정도 살아 있지 않은, 마치 서양식 탈이나 데드마스크와 같이 딱딱한 형태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E를 만난 지 일주일 째 되던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내 곁에 L이 누워 있었고 나는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목덜미를 거쳐 뺨을 어루만지려 했을 때 그녀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딱딱하다는 것을 알았다. 놀라 눈을 뜨자, 그것은 L의 얼굴이 아니라 데드마스크 같은 E의 얼굴이었다. 어떤 소리도 반응도 없이 그녀의 몸은 - L인지 E 인지 알 수 없는 – 시신처럼 늘어져 있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어 그녀의 몸을 내팽개치자, 침대에 엎어진 그녀의 얼굴은 형체없이 뭉개어져버렸다. 몸을 떨며 나는 그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이 짓이겨진 얼굴을 뒤집어야 하나. 뒤집어서 확인해야 하나. (205)
나는 차가운 벽을 짚고 비스듬히 서 있었다. 꿈속에서 잠시나마 완전하게 재생되었던 E의 딱딱한 얼굴을 떠올렸고, 그 얼굴의 무엇이 L을 연상시켰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E가 골랐던 L의 네 개의 손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문득, 이 작업실이 지나치게 고요하다고 나는 느꼈다. 이상한 막막함이 내 머리를 감쌌다. (206)
14. 부조화 1 - 사람들의 시선에 관해 L에게 이야기했던 그, 그리고 그를 조롱하는 E
“그리고 어차피……”
그녀는 미소를 보였다.
“모든 건 사라지잖아요? 우리도 그렇고. 우리가 만든 작품도 그렇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E의 말은 신랄하게 나의 어리석은 집착을 비난하고 있었으나, 상냥한 눈빛을 비롯해 얼굴 표정을 이루는 미세한 근육 하나하나가 평화롭고 순수한 호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부조화는 섬뜩했다. (209)
15. 변태 - 그의 눈동자
“아무 도덕 관념 없이, 그냥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이잖아요. 그게 처음에는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214)
“그러잖아도 궁금했거든. 왜 당신이 나에게 접근하는지. 당신은 날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말예요. 내가 경제적으로 유복해 보여서? 성적 매력이 있어서? 아니야.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 당신은, 유령 같은 사람이에요. 어두운 밤에 당신 같은 사람과 단 둘이 마주치면 꽤 무서울 거야. 그런 말 많이 듣지 않았어요?”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말입니다.”
“하긴, 세상에는 눈먼 사람들이 꽤 많으니까. 그리고, 눈멀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보는 것들을 얘기하지 않는 버릇이 있죠.” (253)
“난 정말 오빠를 이해할 수 없어.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우리 애들은 절대로 미술 같은 건 안 시킬 거야.” (272)
16. 막힘 – 분산과 쪼개짐에서 가둠과 원형으로
흙덩이는 완전한 난형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그것으로 한 여자의 얼굴을 빚어내려 했다. 그것이 L일 때도 있었고, E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민얼굴이었다. 어떤 융기와 굴곡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얼굴이 거기 놓여 있곤 했다.
나는 작업대 위에 놓인 여섯 개의 흙덩이들을 바라보았다. 민얼굴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매끈매끈한 알의 형태로 다듬어놓은 것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 진열된 모습을 볼 때면 아는 불가사의한 매혹을 느꼈다. 그것들의 무엇이 내 마음을 그토록 끌어당기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만일 처음부터 난형을 의도했다면 그런 매혹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알들 속에는 내 손의 온기, 압력과 악력, 시간, 기억과 몰입, 숱한 회의와 의문, 집요한 응시와 막막함들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출입구가 없었으므로, 출입구의 흔적조차 완전하게 지워졌으므로, 그것들은 견고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거기, 영원한 시간 속에 둥글게 놓여 있었다. (226-7)
17. 그가 보는 타인의 마스크, 그리고 그 욕망의 눈동자
나는 그 의자에 앉아, P가 방금 꺼내 썼던 얼굴을 벗는 것을, 지극히 단순한 얼굴로 돌아가는 것을, 그 벗어놓았던 얼굴을 잠시 후 다시 걸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236)
“한데 그 여자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과거가 사라지는 것 같더란 말야. 이를테면…… 내가 언제나 추구해왔던 상태, 현재 속에서 충만한 상태가 되더란 얘기야. 과거의 힘이 완전히 정지된 느낌 속에서 그 우아한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면, 그 여자의 말할 수 없이 특별한 개성들이 내 못 자국을 가만히 덮어주는 걸 느낄 수 있었어.
……
욕망이 눈을 가린다. 그때, 그의 찌푸린 눈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의 외로움이 E를 투명한 여자로 만든 것이다.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매끈매끈한 거울의 눈을 가진 그녀를. (240-1)
내가, 엄청난 죄를 지은 것 같은, 어떤 무서운 더러움을 경험한 것 같은…… 아니, 더러움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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