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숨기-빼앗기기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타인의 손이다.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든 조형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내 체온과 냄새는 결코 빨려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90)
어떤 생명을, 숨결을 훔쳐 감쪽같이 내 것으로 만든 듯한 전율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 속에는 혈관도 근육도 뼈도 없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그 손에서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인가가 섬뜩했고, 차가웠으며, 비인간적이었다. (91)
“…… 그런데.”
L의 나직한 목소리가 작업실의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인제 내 게 아니네요.”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선하고 슬프고 작은 얼굴의 부조화가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쳤다.
무엇인가 숨겨져 있었다. 끔찍한 무엇인가가. 그 숨겨진 것 위로, 저 아이는 저렇게 이상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졌다. 순간 나는 그녀에게 애정을 느꼈다.
애정이란 그렇게 쓸쓸한 것이다. (85)
나는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그것을 바라다보며, 그녀가 흡사 짐승처럼 토해냈던 울부짖음을 겹쳐 듣곤 했다. 그 거대한 육체의 껍데기를 누덕누덕 기운 자국마다, 알 수 없는 고통이 뭉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111)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때 문득 나는 L이 내 분신이라고 느꼈다. 오래전, 어린 시절의 어느 때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나의 일부라고. (117)
10. 증오-관
“웃음이란 게 얼마나 웃기는 가짠지,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 말을 뱉으며 L이 지어 보인 그 찰나의 미소 역시, 만일 말의 내용을 듣지 않았다면 더없이 평화롭고 편안해 보였을 것이다. ……
“증거니까. 내가 저런 괴물이었다는.”
껍데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일순 번떡였다.
“안 돼.”
엄숙하게 나는 대꾸했다.
“그건 내 관이야.”
그녀가 웃으리라는 것을 알고 한 말이었다. 짐작대로 그녀는 웃었다. 시니컬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린 채. 그 껍데기를 향하고 있던 적대감으로 가득 찬 눈빛을 돌려, 나에게로 똑바로 쏘아보면서. (138-9)
실지렁이 같은 핏줄들이 꿈틀대는 그녀의 목줄기를, 복서처럼 허공을 휘젓는 주먹을 나는 보았다. 선명하게 핏방울이 맺힌 상처를 보았다.
그런 거였다.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또 목구멍으로 손을 밀어넣은 것이다. 다름아닌 그녀의 이빨이 다시 자신의 손을 찢고, 붉은 피와 함께 식도 아래의 모든 것이 뒤집혀 나왔다. (145)
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어. 갓난애같이 새 몸이 된 것 같았어…… 그런데 아냐. 착각이었어. 평생 못 달아나. 죽을 때까지 난, 내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내 몸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니까.”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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