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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the Quake - Thailand Pt. II

이박오 2013. 7. 6.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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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되돌아가기 바로 전날, 수영장에서 돌아오면서 니밋은 사쓰키를 이웃 마을로 모시고 갔다.

“선생님,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하고 니밋은 백미러 속의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개인적인 소원입니다.”

“뭐죠?” 하고 사쓰키는 말했다.

“한 시간쯤 제게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선생님을 아내하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있어요.”

그렇게 하라고 사쓰키는 말했다. 그게 어디냐고 물어 보지도 않았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모든 일을 니밋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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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숭이에 가까운 아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니밋과 그녀가 지나가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초라한 마을이 그 고급 리조트 호텔 바로 옆에 있었구나 하고 사쓰키는 새삼스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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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눈이었다. 그녀는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으니, 좁은 방에 갇혀 도망갈 곳이 없는 작은 동물처럼 불안한 기분이었다. 사쓰키는 온몸에 땀이 배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가방에서 알약을 꺼내 먹고 싶었다. 그러나 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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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몸 속엔 돌이 들어 있답니다. 희고 딱딱한 돌이래요. 크기는 어린애 주먹만하대요. 그게 어디서 생겼는지 자긴 알 수가 없대요.”

“돌이요?” 하고 사쓰키는 반문했다.

“돌에 글자가 쓰여져 있는데 일본어라서 읽을 수가 없대요. 검은 먹으로 뭔가 작은 글자가 쓰여 있대요. 그건 오래된 것이어서, 분명 선생님은 오랜 세월 동안 그걸 몸 안에 두고 살아왔을 거랍니다. 그리고 그 돌을 어딘가에 버리지 않으면 안 된 답니다. 그러지 않으면 죽어서 화장을 한 뒤에도 그 돌만 남는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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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시일 내에 커다란 뱀이 나오는 꿈을 꿀 거라는군요. 벽에 난 구멍에서 굼실굼실 뱀이 나오는 꿈이래요. 비늘투성이인 녹색 뱀이요. 그 뱀이 구멍에서 1미터 정도 나오면 목을 잡으세요. 놓쳐서는 안 됩니다. 뱀은 얼핏 보기에 무서워 보이지만 해를 끼치진 않는다는군요. 그러니까 무서워해선 안 된답니다. 그걸 당신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양손으로 힘껏 잡으시래요.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계속. 그 뱀이 당신 돌을 삼켜 줄 거라고 해요. 아셨죠?”

“아, 그건 대체......”

“알았다고 말씀하세요” 하고 니밋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하고 사쓰키는 말했다.

노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사쓰키를 향해 뭐라고 말했다.

“그분은 죽지 않았답니다” 하고 니밋이 통역했다. “상처 하나 입지 않았대요. 당신이 바란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만, 당신에겐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랍니다. 당신의 행운에 감사하시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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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안내한 사람은 모두 거기로 데려가나요?”

“아뇨, 선생님. 그 집에 모시고 간 분은 선생님뿐입니다.”

“왜죠?”

“선생님께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총명하고 강하시고. 하지만 언제나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앞으로 선생님은 서서히 죽음을 향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일에만 너무 많은 힘을 기울이면 잘 죽을 수가 없게 돼요. 조금씩 방향을 바꿔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살아가는 것과 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똑같거든요.”

“이봐요, 니밋” 하고 사쓰키는 선글라스를 벗고, 조수석 등받이에서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며 말했다.

“네, 선생님?”

“당신은 잘 죽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나요?”

“전 이미 절반은 죽어 있습니다, 선생님” 하고 니밋은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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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넓고 청결한 침대 속에서 사쓰키는 울었다. 그녀는 자신이 천천히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몸 속에 희고 단단한 돌이 들어 있는 것도 깨달았다. 비늘투성이인 녹색 뱀이 어둠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도 깨달았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 아이를 없애고 밑바닥이 없는 우물 안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한 남자를 30년에 걸쳐 증오해 왔다. 남자가 몹시 괴로워하면서 죽기를 원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늘 지진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기까지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그 지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나의 마음을 돌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먼 산에서는 회색 원숭이들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가는 것과 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똑같거든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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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나에겐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탁 털어놓고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 있어요” 하고 사쓰키는 니밋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걸 입에 올릴 수 없었어요. 나 혼자서 간직하고 살아왔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마도 당신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니밋은 양손을 내밀어 손을 저으며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더 이상 제게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 노파가 말했던 것처럼 꿈을 기다리세요. 선생님 기분은 알 수 있지만, 일단 말을 해버리면 그건 거짓말이 되니까요.”

사쓰키는 그 말을 이해하고, 잠자코 눈을 감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꿈을 기다리는 겁니다, 선생님”하고 니밋은 타이르듯이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참고 견디세요. 말을 하지 마세요. 말은 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사쓰키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이상하리만큼 매끈하고 여린 감촉의 손이었다. 마치 고급 장갑에 싸여서 계속 보호받아 온 듯한 느낌이었다. 사쓰키는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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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지만 라플란드는 노르웨이에서도 최북단에 있는 지방입니다. 북극에서 가깝고, 순록도 많이 있죠. 여름에는 밤이 없고, 겨울에는 낮이 없습니다. 그는 아마 그 추위에 질려 태국으로 온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그는 태국을 사랑했고,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는 그날까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라플란드를 그리워했어요. 제게 곧잘 그 작은 고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3년 동안 한 번도 노르웨이로 되돌아가지 않았어요. 틀림없이 거기엔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그 역시 자기 몸에 돌을 넣어 둔 사람이었으니까요.”

...

“그는 제게 언젠가 한 번 북극곰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북극곰이 얼마나 고독한 동물인가 하는 이야기예요. 그들은 1년에 한 번만 교미를 합니다. 1년에 딱 한 번만이요. 부부와 같은 관계는 그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수컷 북극곰 한 마리와 암컷 북극곰 한 마리가 우연히 만나게 되고, 거기서 교미가 이루어져요. 그다지 긴 교미는 아닙니다. 행위가 끝나면, 수컷은 무언가를 보고 무서워하는 것처럼 암컷의 몸에서 물러선 다음 교미를 한 현장에서 도망칩니다. 글자 그대로 쏜살같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거죠. 그리고 다음 1년 동안 깊은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상호간의 의사소통이라는 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일도 없어요. 그것이 북극곰 이야기예요. 아무튼 그게 제 주인이 제게 이야기해 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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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주인에게 물어 보았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북극곰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까, 라고요. 그랬더니 주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제게 되묻더군요. ‘니밋, 그럼 우리 인간은 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나?’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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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저 잠을 자자. 그리고 꿈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