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The Uninvited

이박오 2012. 2. 19. 09:12

 

The Uninvited

 

 

1.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면이 많은 공포영화이다.

분명히 중반 까지만 해도 흡인력이 있고, 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있으며, 게다가, 가지 문제는 있어도 나름 제대로 다루어지는 완결성있는 구성을 유지하는데도, 영화는 상대적으로 힘이 없이 그냥 차분하게 꿀꿀한 느낌을 유지하기만 한다. 그렇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구성 자체는 오히려 집중력 없이 흐트러진 느낌이다. 그냥 이야기만 끌고 나가도 좋았을 같은데 무의미한 비틀기들이나 산만한 대사들이 영화의 집중을 오히려 방해한다. 시나리오, 감독(이수연), 혹은 편집의 역량이 아쉬운 경우이다.

가령,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식은 군더더기 없이 좋았지만, 지하철에서 내린 정원(박신양) 집에 돌아가서 문이 열린 발견하고 다시 희은(유선) 소리도 없이 들어온 그를 발견하곤 놀란다든지, 마시다 늦었냐는 대사를 하는 장면 같은 것들은 모두가 의미 없는 떡밥일 뿐이라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한다. 물론, 이런 것들을 맥거핀 (이야기가 있는 떡밥.. 아니지만..) 류로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가령 희은이 놀라는 장면 같은 것들이 떡밥이라면, 확실하게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이용하는 편이 차라리 낳았을 것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장면으로 만들어서 관객의 입장에서 희은이 놀랐어? 하고 말게 되었다.

영화에는 이런 장면들이 많다. 가령, 정원이 악몽을 꾸고 일어나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 (정욱) 발견하고 놀라는 장면 같은 것도. 감독이 어떤 의도로 그런 것인지, 정원은 아이쿠 놀래라라는 반응인데, 관객은 어이쿠 놀라셨어요? 정도로 전혀 놀랍지 않게 연출되었다.  , (전지현) 태우고 가던 정원의 차가 고양이를 치고 연이 갑자기 기면 상태로 들어가는 장면 역시 마치 의도적으로 그런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데, 이런 장면에서도, 가령, 김지운 같은 테크니션이라면 사건 장면의 효과를 극대화 시켜서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을 거면 빠르게 편집을 해서 속도감을 주거나 했을 텐데 하는 영화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 보여주지 않았는지, 특별히 다른 의미가 떠오르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의 감독이 의미없는 장면들을 남발하는가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풍부한 상징들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고, 때로는 과도하게 의미에 집착한다. 다시 정원과 희은이 서로를 놀래키는 번째 장면으로 돌아가면, 희은이 쓸데없이 던지는 같은 대사들은 결국 결혼과 가족이라는 주제를 건드리게 된다 (결혼은 지옥이라고 주장하는 정원의 선배를 희은이 싫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비와 우산의 우화). 그리고 건축 설계사인 정원이 이마를 다치게 되는 다음 장면에서도, ‘겉만 멀쩡하지 속은 엉망인건물의 천장에 구멍은 사이로 떨어진 파편에 맞아서 생기는 정원의 이마 상처와 조응하게 된다. 설계 도면과는 달리 쓰레기 더미로 가득했던 건물의 감춰진 천장처럼, 정원의 무서운 과거 역시 얼기설기 막혀진 채로 있다가 우연히 생기는 상처로 인해 봇물처럼 밀려나오게 것이다. (정원은 나중에 희은에게 상처가 벌어진 것이 보여서 징그럽지 않냐고 물어본다)

 

 

결국 영아 살해와 가족 형성의 두려움이라는 문제를 결부시키는 영화의 주제는 이런 모든 장면들에 깨진 거울 조각처럼 흩어져 있기 때문에 파편들이 서로 반사하기 시작하면 영화의 의미망은 왜곡된 형상과 산개된 빛으로 조금씩 드러나며 확장된다.

가령, 정원의 환상 속에 다시 등장하는 지하철 신은 처음엔 잠자는 가만히 앉아있는 아이들로, 다음에는 독이 과자가 이끄는 길로 ( 부분은 마치 핸젤과 그레텔(영화 말고 동화)같았다)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원의 마음 속에 봉인되어 있는 불탄 시체로 전환된다. 다시, 정원의 속에 등장하는 식탁에 앉은 아이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이 그에게 오빠라고 함으로써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을 다른 방식으로 연결시켜 준다. 반면, 연이 정신과 의사에게 해주는 고양이를 안은 여인의 이야기는 정원의 차가 고양이를 치는 사건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도 하지만, 또한 억지로 관계를 형성해 보려는 어떤 여인의 결실 없는 노력이 아이 울음 소리 내는 무서운 고양이의 이미지(하지만, 영화 속의 고양이는 은근히 귀엽다 - 여담이다) 연결되는 영아 살해라는 주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의 모든 사건들은 결국 하나의 의미, 또는 공통된 사건 영아 살해 지시하면서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혀 나가는 묘미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리저리 엮인 시퀀스 들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이 시퀀스들에 반응하는 방식이나 서로 연결되는 과정들은 왠지 부자연스러운 때가 많다. 가령, 처음 희은과 정원의 대화에서 결혼 문제를 이끌어내는 장면도 그다지 효과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는 못하지만, 다시 정원이 악몽을 꾸는 장면을 보아도, 그가 아이쿠 놀래라, 아버지를 순간 아버지,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얘기를 한다. 아직도 악몽을 꾸니? 그래, 새로 가족을 형성한다는 부담이 되는 일이지..  이런 뜬금없는 대사는 너무 억지스러울 뿐더러,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직도 악몽을 꾼다는 말은 정원은 악몽을 꿔왔다는 말인데, 가족을 형성한다는 부담이 된다는 것이 늘상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악몽을 꾸는 것과 결혼의 압박을 이런 식으로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은 작가가 안일하거나 혹은 감독이 자기 주제에 너무 깊이 빠져서 현실 감각을 놓친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원의 심리적 불안함이나 아버지만 알고 있는 그의 봉인된 과거 같은 것들을 연결시키려고 하는 지나친 시도는 장면에 과도한 상징만 남긴 영화를 생경하게 만든다.  

캐릭터들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가는 때도 있다. 가령, 연이 이야기 하다 말고 달라고 하는데, 정원이 이상하게 쳐다본다든지, 정원이 정말로 아이들이 보였어요? 라고 물어볼 연이 갑자기 당신 미쳤어라고 소리치는 장면 같은 것들이 사소한 예들이다. 물론 이런 연출에도 어떤 의도는 있었겠지만, 이해할 없는 설정이나 뜬금없는 대사로 관객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경우라고 있겠다. 이런 식의 문제점은 연과 정원의 기본적인 대사들에서 계속 나타난다. 항상 아프고 힘이 없는 연이 그녀의 남편(박원상) 있을 대사를 치는 방식은 지나치게 연극적이고 맥락이 없어서 쉽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 정원의 시종일관 우유부단한 태도는, 분명 감독이 의도한 것이지만, 영화를 더욱 침침하고 답답하게 만든다.

, 영화의 커다란 문제점은 좋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구성해나가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연과 정원의 캐릭터가 갑갑하고 폐쇄적이어서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캐릭터들이 영화에 오락성이 아닌 현실성을 부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살아나지 못하고 여기저기 상징을 만들어내거나 이야기를 연결하느라 억지스러운 대사나 상황들을 남발한다면, 차라리 대사를 하고 이야기를 간단하게 만드느니만 못한 것은 아닐까? (가령 이미지를 쓰는 감독인 김기덕의 어떤 영화들은 쓸데없는 대사나 설명들을 없앰으로써 강력한 집중력과 공감대를 획득해 낸다)

다시 말하지만, 캐릭터의 기본 설정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영화가 만약 스릴러라면, 스릴러에는 통쾌한 해결을 주는 상황이나 주인공이 없을 뿐이다. 공포 영화로서 갑갑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갑갑함, 특히 정원이라는 인물의 특이하게 어눌한 태도는 사실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어눌해서 순수한 인물이 아니라, 어눌한 외면 속에 거짓과 위선을 감춘 사내이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 주홍글씨에서 정원과 비슷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 캐릭터를 뻔뻔스럽게 연기하는 한석규와 영화에서의 박신양의 갑갑한 연기를 비교해 보면 비슷한 상황에 처한 극명하게 다른 방식의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이끌어 가는지 있다. 혹은, ‘박하사탕에서 설경구 캐릭터가 보여주는 순수함에 대한 동경과 그에 대한 좌절로 나타나는 자기 파괴 같은 것들과도 비교가 될만하다. 영화의 주인공들, 연과 희은과 정원은 모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며, 중에서도 정원은 연약해 보이지만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파괴할 있는 영악한 악한이 된다.

 

 

 

2.       그런데 이런 점들이 단점이기만 할까? 만약 멜로영화라면?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숙명처럼 폐쇄적인 캐릭터들은 영화의 어떤 메시지를 의외로 효과적으로 증폭시키기도 한다. 메시지란 바로 영화가 갖고 있는 멜로물로서의 통찰력이다. 영화 ‘4인용 식탁 기본적으로 공포영화가 아니거나, 아니면,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정의를 다르게 내리는 작품이다. 그래서, 작품은 깜짝 놀라게 튀어나온 무언가로 간을 떨어뜨리지도 않고, 참혹한 광경, 혹은 난폭한 신체훼손을 이용하는 눈을 씻어줘 스타일도 아니며, 다리 내놔 반복하는 원한 복수물도 아니다.

작품에서 굳이 공포라고 만한 것은 대충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유령과 그것을 보는 사람들 (무당의 딸인 연과 숨겨진 과거를 지닌 정원, 그리고 다른 유아 살해범인 정숙(김여진)) 느끼는 공포이고, 다음은 자신이 자기를 버리면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믿는 무엇 ( 영화에서는 정원에게 강박적으로 무게 지워진 가족이라는 개념과 믿음이다) 강제하는 억압이 주는 공포이며, 마지막으로는, 버려짐과 믿음이 없음 이라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이다. 이중 눈에 보이는 공포는 번째 뿐이며 감독은 굳이 공포를 과장되게 보여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이의 유령은 항상 가만히 잠자는 평화롭게 앉아 있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은, 아이들을 통해 상기되는 자기 자신의 잊혀진 과거를 다시 보게 됨으로 해서 진정한 공포의 지옥에 빠진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체의 이미지가 주는 공포의 이미지는 ‘The Others’ 어떤 장면들과도 닮아 있다.) , 영화 속의 다른 번의 영아 살해 장면 역시 전혀 과장 없이 보여지는데, 가령 청소차 사고 장면 같은 것은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다른 공포의 이미지를 선사한다. 한편, 번째 공포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필수 요소로, 영매 역할을 하는 연을 통해 자신들의 은폐된 과거를 보게 되는 정원과 정숙 사람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 영화에서 실제적인 공포의 내러티브를 지니는 사람들은 정원과 정숙(그리고, 어쩌면 연의 남편도)이다.

반면, 그들에 의해 새로운 희생자로 생겨나는 사람() ( 희은)이다. 그리고 ( 희은) 공포는 바로 멜로물이 현실로 다가왔을 우리( 우리의 연인)에게도 피어날 있는 그러한 공포이다. ‘주홍글씨 한석규 캐릭터나 영화의 박신양 캐릭터, 혹은 박하사탕 설경구 캐릭터 같은 인물들이 공유하는 문제점은 자신이 인정할 없는 자기가 행한공포를 견뎌내지 못한다는 점인데, 공통적으로 그들의 멜로는 지옥이 되고, 그들의 연인들은 가장 처참한 희생자가 된다 

 

 

3.       당신은 당신의 연인을 희생해서라도 스스로의 비밀을 지킬 것입니까?

‘4인용 식탁 가장 은근하면서도 깊이 있는 설정은, 이런 멜로를 비밀스럽게 쌓아가는 방식에 있다. 정원에게는 분명 약혼자인 희은이 있고, 연에게는 남편이 있는데, 이런 쌍쌍의 관계는 오히려 비밀스러운 불륜의 관계를 부추키는 형국으로 발전된다. 물론, 정원은 시종일관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만. 왠일인지,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는 연은 무척 비중 있는 배우인 전지현이 맡았고, 감독이 단순히 흥행을 목적으로, 혹은 전지현의 연기력 논란(?) 잠재우기 위해서 그녀를 캐스팅 했을 리도 없다. 정원은 (자신의 악몽을 풀어내기 위해 - 라고 그는 믿는다) 자꾸 연을 스토킹 하고, 자꾸 그녀의 남편과 희은에게 들킨다. 정원은 불륜을 저지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연의 남편과 희은에게 그는 불륜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결정적으로, 연이 정원에게 요구하는 것은 심지어 일상적인 불륜 이상의 어떤 절실한 관계이다. 그것은 그들만이 있는 어떤 진실을 공유하는 것이다. 가령,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눈동자와 마주칠 있는가? 하는 문제 같은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연의 대답은 마주칠 있다 이다. 이것은 과학적이거나 심령적인 문제가 아니다. 단지, 당신은 상대방이 하는 말을 온전히 믿을 있습니까?, 혹은 상대방의 진심을 믿습니까?, 또는, 당신의 연인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과 같은 종류의 문제인 것이다. 영화가 의미를 얻는 지점은, 이런 질문에 대해 도저히 대답할 없는 상황을 갖다 붙일 획득된다. 만약, 당신과 연인의 관계가 어떤 만의 비밀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으며, 비밀이 사회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없는 추악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당신은 연인을 희생하고 사회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희생하고 것인가?

 

 

4.       무당의 죽음

연은 가지 아주 특이한 배경을 지닌 인물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무당의 딸이라는 , 그리고 하나는 기면증 환자라는 것이다. 사실, 감독은 이러한 연의 이야기를 상당히 왜곡된 방식으로 풀어내는데, 가령, 무속 신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연의 남편이나 특히, 정원의 연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연이 귀신이나 어떤 사람의 과거를 본다는 점과 기면증의 도래는 아주 쉽게 신기가 내렸다라는 판단으로 종합될 있기 때문이다. 연에게 신기가 내렸다면, 무당에게 데려가 굿을 해서 그것을 없애거나 혹은 무당이 되게 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거나, 아니면, 그런 식으로 해결할 있다고 이해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연의 남편과 정원은 단순히 연이 정신병자 라고 생각한다. 특히, 연이 무당의 딸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 정원마저 이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은 확실히 아둔하거나 말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원은 영화의 마지막에 거짓말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거짓말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연에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너무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에게 처음 다가갈 때도 사실 그는 필요에 따른 거짓말을 했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믿을 있어요 라고. 그는 이미 정신과 상담 테이프 속에서 연이 하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말을 있었을 뿐이다. 결국 정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연으로부터 얻어내지만, 그것은 곧바로 감추어야만 하는 잔악한 비밀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연을 정신병자로 몰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연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정숙처럼, 자신이 파멸하게 된다)

연의 남편의 환상 속에서 연이 유아 살해범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국 정원의 현실도피와 같은 맥락을 지닌다. 그는 연과 그런 종류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며, 과학적인 사람처럼 보이는데, 자신의 아이를 연이 죽였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연을 정신병자로 몰아넣게 된다. 그러고는 믿음에 자신을 내던진다. 마치, 정원이 그럼, 당신과 내가 것들은 어떡할 건데요, 당신의 기억들은 어떡할 건데요라고 절규하는 연에게 우리 아버지가 아니랬어라고 말도 되는 변명을 하는 것처럼, 그는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에 사로잡혀, 얼마를 지불하고서라도, 병든 아내를 다시 자신의 이성과 과학의 세상으로 구출하고 치료하려고 발버둥친다.

연은 정신과 상담의에게 사람들은 직접 겪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있을 때에만 믿는다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정신분석의 기본 원리이다), 그것이 신기 지닌 그녀를 사회에서 사라지게 한다.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공포라고 있다. 영화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기면증이 연에게는 마치 가위에 눌린 같은 공포, 주위 사람들이 사라져서 목소리만 남는 귀신이 되는 듯한 그런 공포를 선사한다. 사실 사라지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아니라 그녀 자신일 지도 모른다. 그녀가 보는진실들을 사람들은 부정하고, 그녀는 마치 자신이 진실, 혹은 귀신이 돼서 사라져 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결국 무당들이 보는 것이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면증에 빠질 때마다 연은 자신의 어머니가 느꼈을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정원과 같은 사람의 존재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는 혹시나 모든 무당들이 이런 비슷한 절실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본다) 하지만, 정원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하는 연은 자신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결국 저주를 남기고 스스로 귀신이 되는 길을 택한다. 투덕투덕 비가 오던 어느 회색빛 오후 그녀는 어떤 믿기 힘든 진실을 목도했었고, 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진실을 삼켜버리는 정원에게 온몸으로 진실을 증명하면서 사라지고 나면, 햇볕이 나던 아파트 단지는 갑자기 회색빛으로 변하게 된다. (감독이 연과 정원의 집에서 내다보이는 아파트 단지들을 연출하는 방식을 살펴보라 가령 정숙의 아파트에서 내다보이는 일상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징적인 외부가 된다) 그래서, 작품은 미적지근한 공포영화이자 무서운 멜로영화가 된다.

 

 

5.       사라지는 피해자 희은 믿음

멜로 영화란, 아니면, 우리 모두의 멜로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특별한 관계는 남들에게 밝힐 없는 은밀함의 공유로 시작하고, 어느 쪽이 비밀을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관계도 깨진다. 혹은, 반대로, 특별한 관계란, 어떤 밝은 빛을 향한 이상에 가까운 믿음 같은 걸로 시작하고, 빛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관계도 불결하게 타락해선 깨져버린다. 연에게 멜로가 전자의 관계였다면, 보다 일상적인 연인인 희은의 멜로는 후자에 가깝다. 희은이 반복하는 우산의 이야기는 그녀의 믿음을 대변한다. 정원의 아버지는 희은이 밝고 유복하다고 해서 고마워 하는데, 사실 그녀는 단순히 밝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약혼녀 이상의 무언가를 의미하고 요구한다.

기본적으로, 교회라는 공간은, 희은에게는, 모순의 공간이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면서도 우산을 가져가지 않고, 비를 맞더라도 교회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실 억지스럽다. 맞을게 두려워서 집에 안가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희은의 논리가 사실은 이상하지 않은가? 기우제 하면서 우산 가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비슷하게 설득력이 없게 들린다. 하지만, 이렇게 억지스런 우화의 형식을 통해서라도, 희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70년대 개척교회의 선구자였다는 정원의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 끝까지 정원의 비밀을 지켜주는, 심지어 그것이 정원으로 하여금 거짓된 자기기만에 빠지게 만들게 되더라도, 정원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그런 역할을 한다. 하지만, 희은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정원에게,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아, 라고 하면서도 막상 비밀을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비밀을 까발려서 정원의 정체를 낱낱히 드러내려고 하질 않는다. 그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을 지킬 우산을 필요로 한다. 영화는 우산이 볼품없다고 푸념하거나, 쇼핑 샾에서 우산을 고르거나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정원의 우산인 알았던 것은 그녀 자신의 우산이 된다. 그녀는 자기가 비가 오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녀는 비를 두려워하며, 그래서 우산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뜨거운 것을 먹는 그녀를 정원의 아버지와 동생은 아직 애기구나 라고 놀린다. 비를 맞지 못하고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하는, 성장하지 못한 그녀( 정원)과는 달리 정원의 가족들은 뜨거운 것을 삼킬 때의 아픔을 즐길 아는 어른들이다. (뜨거운 것을 먹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영화에서의 설정이란 이런 식이다.)

그녀가 사오는 4인용 식탁 역시 그런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식탁이 모던하지만, 차가운 느낌도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파는 친구가 성공하기는 글렀다고도 하는데, 그러면서도, 그런 식탁도 자기 정도나 되니깐 소화를 있는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떤다. 그런데, 정원이 없었더라도 그런 식탁을 있었을까? 식탁 위에 매달린 완전히 비효율적인 조명은 음식이 아니라 명의 사람의 얼굴을 비춘다. 희은은 현대 가정에서 식탁은 밥을 먹는 자리가 아니라 가족들이 주인공이 되는 자리라고 말한다.

희은의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4인용 식탁은, 많은 비밀을 가진 정원과의 멜로는, 혹은 4명의 가정을 꾸리는 일은, 그런 모험과도 같을 것이다. 자신이 꾸미는 삶에 도전이 되며 그것을 극복하면 빛날 있을 그런 모험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4인용 식탁의 차가움을 직시하거나, 식탁에 놓여질 음식을 바라보거나, 비를 맞거나, 정원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 비가 오기를 기원하지만, 동시에 비를 맞기는 무서워하는, 그런 연인이 바로 희은이다.

역설적으로, 정원이 그녀의 디자인을 보고 연상하는 것은 자신이 잘했어요라는 칭찬받을 기회도 갖지 못하던 어떤 시절일 뿐이다. 희은이 마치 자기 증명, 혹은 과시를 목적으로 같은 4인용 식탁은 정원에게는 오히려 감추고 싶은 진실들이 집요하게 나타나는 신물이 된다. 희은이 돌아올지 돌아오지 못할 영화는 보여주지 않지만, 설령 돌아온다 해도, 그녀의 4인용 식탁은 이상 모험을 가장하는 장식품이 아닌 보기 싫은 얼룩을 의식적으로 자꾸 감추지 않으면 되는, 그런 주물이 것이다.

 

 

6.       믿음을 상실하는 정원 공포

영화는 공포영화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공포로 끝난다. 그것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간에, 정원은 공포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마지막에 지푸라기라도 붙잡듯 희은에게 사랑하니까 돌아오라고 메시지를 남기는 정원, 하지만, 이상 희은의 가장을 택할 수도 없고, 이미 귀신이 되버린 연의 공포스런 진실을 택할 수도 없다.  그는 이미 거짓임이 분명해진4인용 식탁을 부숴버리지만, 환상 속에 식탁은 다시 돌아와 있다. 게다가, 같은 환상 속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희은과 아버지와 동생이 아니라 연과 살해된 아이들이다. 이제 그가 죽인 자는 늘었지만 그는 아직도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한다. 그와 희은은 아마도 그렇게 식탁이 있는 집에 살게 되겠지만, 그들을 둘러싸는 것은 이상 밝은 빛이 아니라, 오는 회색빛 아파트 단지와 너무 뜨거운 수프와 차마 그런 것을 직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비출 밖에 없는 이상한 조명에 비친 서로의 창백한 얼굴들일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성장하는 실패하거나, 혹은, 성장이란 그런 싫고 무서운 것들을 모두 극복해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감내하고 인정하면서 공존할 있을 얻을 있는 것임을 깨닫는 실패한다.

 

 

 

4인용 식탁 트레일러

http://www.youtube.com/watch?v=8n1bhO7k4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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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연과 희은의 이러한 관계는 삼각관계의 어떤 어두운 공식을 형성하지만, 공식 자체는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변형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주홍글씨에서의 삼각관계(엄지원 이은주 한석규), ‘박하사탕에서의 삼각관계(문소리 김여진 설경구) 영화에서의 삼각관계와 동일하지는 않다. 반면 밀양같은 경우는 삼각관계가 아닌데, 그것은 영화가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의 문제가 가장 행복하게 (비사회적으로, 그러나 행복하게)구현된 작품은 아마도 오아시스 같다. 이창동 감독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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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살해의 문제를 다르게 다룬 영화로는 1978 노무라 요시타로 작의 鬼畜’(The Demon)이 있다. 이 영화를 다루는 글이 이 글에 이어질 것인데, 거기서 진정으로 사회문제로 돌아오는 영아살해, 혹은 유기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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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영화에 등장하는 살해 사건들을 조금이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아마도 대부분이 실제 있었던 사건에 기반한 아닐까 싶다. 가령, 아이들에게 독이 과자를 먹이고 지하철에 버린다지든지, 차에 치어 죽은 시체를 하수구에 버린다든지, 아이를 아파트에서 던져버리는 것도 그렇고, 연탄가스를 이용한 가족자살은 워낙 비일비재했던 것도 같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문제를 언급하는 아주 세련된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모든 장면들이 군더더기 없이 매우 인상적으로 재현된다. 굳이 따져야 한다면, 이런 요즘의 영아 살해 문제를 감독은 세대의 미성숙함과 연결짓고 있고, 반대항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에 의해 아이들이 희생당하는 70년대의 다른 잔혹한 현실이다. (뜨거운 것을 삼키고 즐긴다는 것이 비밀을 비밀로만 덮어두고 은폐하려는 것이라면, 또한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장면들과는 달리, 다른 충격적인 장면인 문정숙의 기억 속에서의 우물 장면은 많은 의문을 남긴다. 굳이 그래픽으로 했는지? 나는 처음에 그것이 우물인 줄도 몰랐다. 역시 우물 속에 아기를 내려놓고 촬영하는 힘들어서, 혹은 경제적인, 또는 이미지의 연결 같은 다른 이유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간에 장면의 그래픽은 너무 조잡해서 전혀 우물스럽지(?) 못하며, 아이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전혀 없게 묘사되었다. 설령 그것이 우물임을 바로 파악한다 해도,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쯤 에서야 정숙의 절규를 통해 장면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있게 되는데, 감독의 의도가 서스펜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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